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121화 (121/425)

121. 키클롭스의 감옥 (1)

후마이야 왕국의 왕 테헤누트 하토르는 자신의 목에 드리운 검날의 주인을 바라봤다.

‘이자가 바로.’

먼 동쪽, 마귀의 바다를 건너 아스투리아 왕국을 집어삼킨 아인하르트의 군주.

패왕, 샤를 아인하르트.

“전투 코끼리 부대의 운용은 제법이었다. 왜 그동안 후마이야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는군.”

지면에 눌린 테헤누트의 무릎이 경련했다.

그녀의 뒤엔 반듯하게 목이 잘린 전투 코끼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 이것을 본다면 전장 수 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칼날이 마법의 도움으로 코끼리를 공격했다고 상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헤누트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코끼리는 샤를 아인하르트의 일검에 즉사했다.

“과연 남쪽의 패왕 샤를 아인하르트. 그대는 아틸라가 했던 말 그대로의 전사로군요.”

샤를의 눈썹이 꿈틀댔다.

“아틸라를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그는 후마이야 왕국 최강의 코끼리 기수니까요.”

테헤누트의 말에 샤를은 아주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서늘한 시선은 테헤누트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테헤누트는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다.

알 수 없는 빛을 발하는 샤를의 검신.

그것이 코끼리의 목을 단칼에 베어 낸 것처럼, 자신의 목 또한 같은 운명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인생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로구나.’

테헤누트는 기억하지 못했다.

악귀로 변하려는 자신을 완력으로 억제한 아틸라가 예언처럼 내뱉었던 말을.

‘넌 아인하르트의 군대를 맞아 싸운다. 그리고 샤를의 손에 죽는다. 이후 카멘이 새로운 왕이 된다.’

후마이야의 전투 코끼리는 강하다.

하지만 아인하르트의 군대는 더욱 강력했다.

대장군 피핀 에드발.

궁정 마법사 제롬 아그리피나.

그들이 이끄는 금사자 기사단의 무력은 후마이야의 전투 코끼리를 전략적으로 각개격파했다.

그러나.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아인하르트의 군세 속에서 그 무엇보다 압도적인 파괴력을 발휘한 것은.

‘샤를 아인하르트.’

단 한 명의 힘.

“그대는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군요. 승자의 마땅한 권리로서 내 목을 취하도록 하십시오.”

“도주한 기수들을 불러들여라. 항복한다면 아인하르트의 깃발 아래서 이전과 같은 권세를 누리게 해 주겠다.”

“재밌는 제안이군요. 그러나 후마이야의 코끼리 기수들은 항복을 모른답니다.”

“그대는 어떠한가.”

“나 역시도, 왕국의 영광스러운 코끼리 기수 중 한 명이지요.”

엷은 미소를 지으며 테헤누트는 목을 늘어뜨렸다.

자신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왕가에 집결된 여러 유력 가문의 전투 코끼리들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아인하르트의 군세를 몰아쳤다.

그리고 패배했다.

하지만 후마이야 왕국은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길었던 삶은 이곳에서 마침표를 찍겠지만, 카멘을 포함한 많은 코끼리 기수들은 무사히 본진으로 후퇴했다.

샤를의 검이 들어 올려졌다.

다가올 운명을 받아들이며 테헤누트는 웃었다.

“카멘. 오늘부로 그대가 왕국의 새로운 주인입니다.”

검이 번득였고 핑글, 테헤누트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그녀의 세상이 회전했다.

부릅뜬 시선이 하늘 위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것은…….’

쏟아지는 지옥불.

그 사이로 드러난 날개 달린 괴물들.

그뿐만이 아니다.

흑빛으로 화한 지면을 뚫고 검은 해골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건…… 무슨…….’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테헤누트는 샤를의 외침을 들었다.

수많은 인간의 전투 함성.

미지의 존재들이 내뿜는 악의 가득한 포효.

금사자의 검이 회전한다.

잘린 뼈다귀의 잔해가 바닥을 구른다.

부옇게 흐려지는 시선 위로 눈먼 검날이 날아들었다.

* * *

후마이야 왕국 국경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던 샤를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적에 조금 당황했다.

테헤누트의 숨통을 끊자마자 등장한 괴물들.

샤를이 직접 지휘하던 중앙 부대는 큰 손실 없이 놈들을 제거했지만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부대도 있었다.

병영으로 복귀한 샤를은 제롬을 불렀다.

“파우스트?”

“아틸라와 함께 서쪽 엘프들의 영역, 서리나무숲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아틸라와 서리왕의 대화를 들었었죠.”

아틸라는 이렇게 말했었다.

‘파우스트가 다시금 마수를 펼치려 하고 있소. 먼 옛날 그랬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날, 파우스트를 저지했던 바토리는 힘을 잃었소.’

‘놈들을 막으려면 바토리의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소. 그건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될 거요.’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힘을 되찾는다라. 그렇다면 아틸라는 현재 그것을 위한 여정을 하고 있다는 건가. 파우스트를 막기 위해?”

샤를은 노르드 왕국과의 전쟁에서 자신을 가로막았던 아틸라를 떠올렸다.

이유는 몰랐지만, 녀석은 그때 카자르라는 이름을 사용했었다.

“노르드와의 전쟁에서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놀라운 활약을 보였습니다. 이미 그녀는 상당량의 힘을 회복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만…….”

“다만?”

제롬은 서리왕과 아틸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대가 직접 그녀를 관조자로 되돌리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지금의 그녀는 치유에 성공한다 해도 이전과 같은 마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구슬을 깨뜨리려면 리베르와 바토리를 관조자로 만든 신의 성물이 필요하오. 난 아직 그걸 가지고 있지 않소.’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자신의 짝, 리베르 파테르를 잃고 인간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녀가 지닌 힘은 관조자 시절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여겨집니다.”

“재미있군.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이 일부에 불과하단 말인가.”

“리베르를 쓰러뜨려 구슬로 변화시킨 것은 아틸라. 또한 아틸라는 구슬을 깨뜨려 그녀의 힘을 완전하게 회복시킬 수 있는 ‘신의 성물’을 손에 넣을 계획이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관조자. 구슬. 그리고 신의 성물이라.”

샤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아틸라를 자신의 동료로 삼겠다는 생각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아틸라의 목적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린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같은 불사자들을 상대해야 한다, 이 말인가.”

“지금의 그녀는 불사자가 아니지만, 그렇습니다.”

“아틸라가 리베르 파테르를 구슬로 만든 방법은?”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다만 아틸라는 리베르 외의 다른 관조자를 쓰러뜨린 전적이 있습니다. 할리와 노이어……. 아, 할리의 짝인 노이어는 하싸씬 출신의 살수 카스피가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파우스트를 비롯한 관조자들에 대해 제롬이 알고 있는 지식은 흩어진 퍼즐 조각 같았다.

그것들은 모두 아틸라와 바토리의 대화에서 유추한 것과, 아틸라 일행을 떠날 때 길잡이를 맡아 준 슈시아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이었다.

“이번에 등장한 괴물들은 마귀와는 달랐다. 아무리 죽여도 끝없이 살아나더군.”

“놈들은 사령술로 일으킨 사자(死者), 언데드입니다. 저는 아틸라와 함께 여행할 때 파우스트의 관조자 할리가 소환한 리치(Lich)를 상대한 일이 있습니다.”

샤를의 손에 숨통이 끊긴 언데드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이 지닌 아레스의 신력 덕분인지, 아니면 요정들의 신기로 벼려 낸 검 ‘듀란달’ 때문인지 샤를은 알 수 없었다.

샤를은 아레스의 신력과 듀란달에 대해 이야기했던 낯선 복식의 소년을 떠올렸다.

아포스톨로스.

‘하지만 고대의 인간들은 날 이런 이름으로 부르곤 했죠.’

‘붉은 눈의 귀공자.’

마귀, 관조자, 사령술사, 언데드, 그리고 아포스톨로스.

그동안 벌어지지 않던 기묘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크리엘도라 대륙이 인간들만의 땅이 아니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새삼 그것을 실감하게 하는 요즘이었다.

‘이 또한 나의 목표를 위해 거쳐야 할 산이리라.’

샤를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제롬은 머릿속 퍼즐을 맞춰 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자그만 실마리를 발견했다.

“서리나무숲을 향해야 할 듯합니다.”

제롬은 노르드 왕국과의 전쟁 때, 아틸라의 곁에 슈시아가 없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곳에 존재할 ‘발키리의 힘’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 * *

한편 파우스트가 아인하르트 왕국을 침공하기 하루 전, 아틸라는.

“뭐 이리 금방 돌아왔냐. 사바흐.”

황금바위산의 으슥한 어둠 속에서 사바흐를 만나고 있었다.

“여기서 적마탑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아울러 라일 플라마라는 녀석에 대해 무언갈 알게 되거든 돌아오라는 말을 남긴 건 네놈이 아니던가. 도살자.”

“지난번 상처는.”

“호오. 네가 내 걱정을 다 해 주는 것인가. 물론 말끔하게 나았다.”

“걱정은 개뿔. 네가 죽으면 잡다한 일 시킬 심부름꾼이 없어지니까 그렇지.”

“이런 시발놈이.”

“그래서, 뭐 좀 알아냈냐?”

“물론이다. 나는 하싸씬의 마스터! 사슬낫의 사바…….”

“알았으니 쓰잘데없는 사설은 빼고.”

“라일 플라마가 적마탑 소속의 마법사라는 것은 확인했다. 그런데.”

“그런데?”

“녀석은 적마탑 내에서 실종 처리가 되어 있었더군.”

“실종이라고?”

“하지만 머지않아 문제는 해결됐다. 라일 플라마 본인이 적마탑으로 복귀했으니까.”

아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옹을 떠나며 라일은 적마탑으로 복귀하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뭐야 그럼.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이곳까지 달려왔을 이유가 있겠나.”

“거참 더럽게도 뜸 들이고 앉았네. 원하는 게 있으면 빨랑 말해 봐라.”

“귀염둥이 카스피와의 저녁 식사.”

“저녁은 진즉 먹었다. 아무튼 야식이든 술자리든 만나게 해 줄 테니까 본론만 말해.”

“라일 플라마가 이전과 달라졌다고 하는군.”

아틸라의 눈이 꿈틀거렸다.

“달라져?”

“그렇다. 라일 플라마는 나름 적마탑의 기대주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혈귀의 머리통을 가지고 돌아온 녀석은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적마탑이 한동안 떠들썩했지.”

“이전에도 분명 강했지만, 마탑의 임무를 받고 떠나 실종되었다가 돌아오니 더욱더 강해졌다 이건가.”

“그 말대로다.”

“적마탑의 반응은?”

“처음엔 믿기 어렵다는 눈치였지만 머지않아 수긍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그 정도로 재능 있는 마법사였던 모양이더군. 라일 플라마는.”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다.

아틸라는 라일과 겨뤄 본 적이 있었고, 리옹에서 그가 쏘아 낸 마법들은 상당한 수준의 화속성 마법사만이 발현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이전과 달라졌다는 부분만큼은 신경이 쓰인다.

또한 그것은 그가 라일에게 지닌 의심의 불씨를 더욱 타오르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했다.

“알았다 사바흐. 카스피를 데려오지.”

“잠깐. 거울을 좀 보겠다.”

제자바보 사바흐가 멋을 부리는 동안 아틸라는 카스피를 데려왔다.

“흐에에엣! 스승님! 안 그래도 크게 다치신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고요!”

“하하하 카스피! 난 그리 쉽게 다치지 않아! 난 사슬낫의 사바흐다!”

사바흐는 카스피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그러니까 파우스트가 아인하르트를 침공하기 수 시간 전.

아틸라, 바토리, 오토, 카스피, 그리고 크누트 스톤핸드는 수해 속에 감춰진 ‘문’을 향해 떠났다.

그런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사내가 있었다.

라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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