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황금바위산의 주인 (2)
“어디서 그렇게 처맞고 왔냐. 사바흐.”
“알고 있으면서 묻다니, 너다운 도발이군.”
사바흐의 눈 밑은 시커멓게 그늘이 져있었다.
아틸라는 소리 없이 웃었다.
“뒈져 버릴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어찌어찌 살아남은 모양이군.”
“쉽진 않았다. 상대편엔 마스터가 둘이나 있었으니까.”
지난밤, 바토리의 마법을 맞고 영주성으로 날아가던 아틸라는 도시 외곽에서 퍼져 오르는 새하얀 안개를 발견했었다.
그게 사바흐의 연막술이라는 걸 알아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연막이 펼쳐진 이유가 리옹에 잠입한 데비쉬 살수들과 싸우기 위함이란 것도.
“죽기 전에 유언이라도 남기려고 온 거냐.”
“농담이 지나치군. 난 사슬낫의 사바흐다. 이 정도론 죽지 않아.”
아틸라는 걸쭉한 핏물을 흘리는 사바흐의 복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사바흐가 중얼대듯 말했다.
“붕대 감으면 낫는다.”
사바흐는 절뚝이는 다리를 살금살금 움직여 카스피에게 다가갔다.
입을 헤벌리고 잠든 제자를 내려 보던 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지어졌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군. 도살자.”
자신의 흔적을 지운 사바흐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틸라가 뒤를 따랐다.
둘만 남게 되자 사바흐는 붕대를 꺼내 대충 몸에 두른 뒤 바위에 걸터앉았다.
“어쩌다 데비쉬의 원한을 사게 된 것인가. 도살자.”
“마스터 하날 죽였거든.”
“무슨 연유였는지는 묻지 않겠다. 다만 그 바람에 카스피는 하싸씬과 데비쉬, 양쪽의 습격을 대비해야만 하는 신세가 됐군.”
“네 앞가림이나 잘 해라. 너야말로 발루아 왕국의 내전에 고용된 몸 아니었냐?”
“그걸 어떻게……, 그렇군. 카스피에게 전해 들은 건가.”
고개를 끄덕이던 사바흐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발루아 건도 진행 중에 있다. 나 정도의 초일류 살수라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것쯤 어려운 일이 아니지.”
“단주의 허가 없이 데비쉬 마스터를 둘이나 처리한 건?”
“괜찮을 거다. 단주는 데비쉬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긴.”
“게다가 데비쉬 놈들도 발루아의 내전에 참여했다. 단주는 오히려 내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 입장이라는 거지.”
“호오. 데비쉬가?”
“데비쉬 놈들로서는 우리 하싸씬을 밀어내고 세력권을 넓힐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분명 총력을 다 하겠지.”
“그렇다면 이제 내 뒤를 쫓을 여유 따윈 없겠군.”
“그 말대로다. 아마도 리옹에 잠입했던 놈들이 널 추격한 마지막 살수들이었을 터.”
“온 김에 심부름이나 해라 사바흐.”
“뭣이?”
사바흐가 배를 움켜쥐며 신음성을 흘렸다.
“크흑 갑자기 배가……. 가볍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중상인 것 같다. 제법이군 데비쉬 녀석들……. 붕대만으론 부족할 것 같으니 어서 단으로 돌아가 영약을…….”
“가는 김에 카스피도 데려가든가.”
“심부름이 아니라 부탁인 걸로 하지.”
“그건 너 알아서 생각하고.”
“말해봐라.”
“적마탑의 마법사, ‘라일 플라마’라는 녀석을 조사해 봐라.”
“아니. 부탁드린다고 공손히 말해 보라고.”
“이 새끼가 뒤질라고.”
아틸라가 도낏자루에 손을 대자 사바흐가 움찔하며 외쳤다.
“뭣이? 적마탑의 마법사라고? 도살자. 넌 이제 적마탑에게까지 원한을 산 것인가!”
“원한 아니니까 설레발치지 말고. 아무튼 녀석에 대해 상세히 조사해 봐라. 뭔가 알게 되면 직접 와서 알려 주고.”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뭔가 찜찜하거든.”
아틸라는 라일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머릿속에 되새겼다.
무엇보다 세 차례나 심안이 통하지 않은 일이 마음에 걸렸다.
“적마탑의 라일 플라마라. 알겠다.”
바위에서 일어선 사바흐가 뒤돌아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카스피 안 만나고 갈 거냐. 같이 밥이라도 한 끼 하든지.”
“다음에 하도록 하지. 지금의 내 모습을 카스피가 보면 마음 아파할 테니까.”
사바흐가 고개 돌려 아틸라를 노려봤다.
“노파심에 말해 두겠는데, 난 네놈이 겁나서 피하는 것이 아니다. 부상만 아니었어도 네놈쯤은.”
“그럼 다음에 멀쩡한 상태로 와서 붙어 보던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물론.”
“아쉽지만 그럴 순 없겠군. 나와 겨루다 네놈이 죽기라도 하면 카스피를 보호해 줄 자가 사라지는 것이니 말이야.”
“에라이 미꾸라지 같은 새끼.”
* * *
이튿날.
적당히 배를 채운 일행은 야영의 흔적을 지우고 말에 올라탔다.
이동하던 중 카스피가 말했다.
“스승님의 꿈을 꿨어.”
“사바흐 말이우?”
“응. 어젯밤에 피투성이가 돼서 내게 오셨는데, 아무런 말 없이 미소만 지으시고는 떠나셨어. 불안해. 스승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 제자바보라면 멀쩡하게 돌아갔으니 걱정할 거 없다, 카스피.
“괜찮을 것이니라 카스피. 그 사바흐라는 사내는 상당한 실력의 살수인 것 같으니 말이다.”
“응. 역시 그렇겠지? 바토리.”
카스피가 헤헤 웃었다.
“그건 그렇고 아틸라 님. 어젯밤에 말했던 성물의 조각이란 거 자세히 좀 얘기해 보슈.”
황금바위산까지는 제법 거리가 남아 있다.
시간도 죽일 겸 아틸라가 입을 열었다.
“구슬이 된 관조자를 해방시키는 데 반드시 성물이 필요한 건 아니다.”
“엥? 그건 또 뭔 소리요? 어젠 그 성물인지 뭔지가 필요하다면서.”
“신의 손길로 관조자가 된 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이야기지. 모든 관조자가 바토리와 리베르처럼 신의 손길을 경험한 건 아니거든.”
“음. 어찌 됐든 바토리 아가씨의 경우엔 성물이 필요하다는 거 아니요.”
“그건 그렇지.”
하늘을 올려 보던 아틸라가 말을 이었다.
“바토리와 리베르를 관조자로 만든 건 오르피나다.”
“오르피나라면, 그 파멸의 신 말이우?”
“그래. 하지만 원래 오르피나는 파멸의 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대 왕국 사르데니야의 신이었지.”
바토리가 말을 받았다.
“달의 신 오르피나. 숲의 신 오르피나. 사냥의 신 오르피나. 순결의 신 오르피나.”
시를 읽듯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카스피가 물었다.
“근데 무슨 이름이 저렇게 많아? 오르피나가 파멸의 신이 되기 전의 이름들인 거야?”
“그렇단다. 오르피나는 달의 신이자, 숲의 신이자, 사냥의 신이자, 순결의 신이었지.”
아틸라가 다시 말을 받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들은 대개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레스는 전사신, 혹은 군신이라 불리지만 그 뜻은 다르지 않지. 하지만 오르피나는 서로 다른 네 가지 속성을 한 몸에 지닌 신이었다.”
“우와. 근데 그런 대단한 신이 왜 파멸의 신이 된 거야?”
“그, 그러게 말이우. 그전의 이름들은 뭔가 다 긍정적인 느낌인데 돌연 파멸의 신이라니. 잘 나가다 어느 날 갑자기 사악한 힘에 빠지기라도 한 것 같잖수.”
바토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틸라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오토. 조금 전 내가 모든 관조자가 신의 손길을 받은 건 아니라고 했었지.”
“그, 그랬수.”
“그들이 구슬로 변했을 땐 성물의 유무와 상관없이 살해자의 의지만으로 구슬을 해방시킬 수 있다. 아니, 애초부터 신의 손길이 닿지 않았으니 성물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말이 맞겠지.”
“옳거니! 이제 알겠수. 그럼 신의 손길로 관조자가 된 자들이 구슬로 변했을 땐 성물이 있어야 해방이 가능하다, 이 말 아니오!”
“그래. 그런데 당시의 오르피나는 네 가지 속성을 한 몸에 지닌 특별한 신이었지.”
“그렇다면…….”
“흐에엣! 그, 그럼 아틸라! 저 구슬을 해방시키려면 성물도 네 가지가 필요하다는 거야?”
“정답이다.”
아틸라가 지금 한 이야기들.
그것은 패영전 세계에서도 극히 소수의 존재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바토리는 고개 들어 아틸라를 바라봤다.
다시금 아틸라의 얼굴 위로 다른 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새장 같던 왕성을 벗어나, 자유로운 바깥세상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해 주었던 사내.
‘야만전사야.’
마음속으로 물었다.
‘정녕 넌, 이전에 나를 만난 적이 없었더냐.’
* * *
사바흐의 말대로 데비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황금바위산 초입에 도달할 때까지 일행은 별다른 방해 요소를 만나지 않았다.
그 말을 바꿔 이야기하자면.
황금바위산 초입에 도달한 뒤엔 훼방꾼을 만났다는 이야기다.
“으힉! 저, 저거 뭐요! 몬스터 아니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몬스터는 원래 수해에서만 서식한다.
그런데 다른 장소도 아니고, 호전적인 황금바위 드워프족의 영역 한가운데인 이곳에 몬스터라니.
“마, 말 좀 해 보쇼 아틸라 님! 저거 지난번에 수해에서 만났던 그놈 아니요!”
“아닌데.”
“엥?”
“오크로구나. 야만전사야.”
바토리의 말대로 놈들은 오크였다.
네 마리 오크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크.’
먼 옛날 인간, 엘프, 드워프, 노움 등의 지성 종족과 마찬가지로 크리엘도라 대륙의 주민이었던 종족.
즉.
엄밀히 말해 그들은 몬스터가 아니다.
‘인간이 다른 종족과 힘을 합쳐 놈들을 몰아냈지.’
그러고는 멋대로 몬스터라 이름 붙였다.
졸지에 대륙의 지성 종족에서 몬스터로 전락한 오크들은 뿔뿔이 수해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진짜 몬스터들에게 죽임당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라도 생존하는 개체는 있는 법.’
극소수의 특별한 오크.
그들은 수해에서 살아남고 적응했다.
‘오크는 원래부터 인간보다 월등한 육체를 소유한 종족.’
게다가 지옥 같은 수해에서 살아남고 진화한 개체의 신체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트롤에게도 밀리지 않을 만큼.’
차이가 있다면 트롤의 개사기 특성인 ‘재생 능력’이 없다는 것.
그러나 오크에게도 그들만의 강력한 특성이 존재한다.
‘광기(狂氣).’
현재 대륙에서 가장 호전적인 지성 종족이라면 드워프를 꼽는다.
그러나 오크의 호전성은 그들을 뛰어넘는다.
아니, 호전성뿐만 아니라 오크는 이전부터 드워프를 뛰어넘는 강인한 육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광기’는 그런 오크들의 본성을 한계까지 드러내는 특성으로, 시전과 동시에 공격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다.
‘물론 약점도 있지만.’
트롤과 엇비슷한 무력을 지닌 오크.
재생 능력을 가진 트롤이 공격과 방어를 아우르는 전천후 몬스터라면.
오크는.
‘공격력 몰빵 몬스터.’
상대하는 이에 따라서는 트롤보다 오크가 더욱 껄끄러울 수 있다.
광기에 사로잡힌 오크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는 전사는 결코 흔치 않으니까.
물론 아틸라는 예외다.
“몸 좀 풀어볼까.”
그는 이곳에 몬스터가 있다는 사실보다, 그 몬스터가 오크라는 것에 더욱 주목했다.
놈들은 본래 지성을 지닌 종족.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에 넘어간 거냐. 너희들도.’
취익! 취이이익!
세 오크가 짙은 콧김을 뿜었다.
오랜 시간, 오직 생존과 복수만을 목표로 수해의 지옥을 견뎌 온 자들.
놈들의 스킬 ‘광기(狂氣)’는, 말 그대로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혹독한 환경에 대한 강력한 저항 수단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런 너희에게도 메피스토펠레스의 간교한 혓바닥에 넘어갈 정도의, 최소한의 지성은 남아 있었다는 건가.’
아틸라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빠져 있어라 할망구.”
“그리할 생각이었느니라.”
수해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마력 감지 능력이 뛰어나다.
근처에 몇 마리의 오크가 더 있을지 모른다.
‘바토리의 마력 냄새를 맡는 즉시 이곳으로 달려오겠지.’
도롱뇽의 마력 역시 마찬가지고.
“펀치. 물러서 있어.”
끼아옹! 펀치가 주인의 말을 따랐다.
오토도 펀치와 함께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자, 펀치와 바토리 아가씨는 내가 맡기시고……!”
“지랄 말고. 오토.”
“네?”
“한 마리 맡아.”
“히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