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황금바위산의 주인 (1)
아틸라는 채찍처럼 쇄도하는 혈귀의 팔을 노려봤다.
무휼을 그었다.
콰드드득!
펼쳐진 혈귀의 손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것을 넘어 손목을, 팔꿈치를, 어깨마저 말끔히 절단했다.
치솟던 혈귀의 피가 불타 없어졌다.
이프리트의 반지와 숫돌을 등에 업은 무휼은 그 정도로 강력한 화속성 무기가 되어 있었다.
혈귀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아틸라는 멈추지 않았다.
“어딜 도망가려고.”
혈귀의 옆구리를 향해 무휼을 휘둘렀다.
반쪽짜리 팔로 혈귀가 방어했다.
팔꿈치를 절단하며 이어진 무휼이 놈의 옆구리에 박혔다.
매캐한 탄내를 풍기며 내장이 흘러내렸다.
“새끼. 내장은 아직 사람 같네.”
무휼을 뽑아낸 아틸라가 마무리 일격을 노렸다.
그러나 혈귀의 생존 본능은 대단했고, 녀석은 짤막한 다리를 바퀴벌레처럼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로 도주를 시작했다.
아틸라는 웃었다.
[ 돌진(突進) ]
마귀와 마찬가지로 혈귀는 돌진에 저항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돌진의 관성을 더한 아틸라의 신형이 혈귀를 파고들었다.
놈의 척추에 무휼을 꽂았다.
콰아아아앙!
성의 벽면을 깨부수며 혈귀와 아틸라가 허공을 날았다.
하늘 위엔 작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청명한 달이 떠 있었다.
그것이 아틸라와, 혈귀와, 둘 사이를 연결한 무휼과, 잿개비로 화해 흩어지는 혈액과 살점을 차례로 비췄다.
아틸라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큰 소리로 포효했다.
* * *
십여 분 전.
경비대장은 성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악귀와의 전투에서 생존한 병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영주성에서 끊임없이 불길이 뿜어지고 있다. 대체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경비대장의 눈이 정면을 바라봤다.
바람처럼 날렵한 움직임으로 달리는 가죽옷의 여자.
그림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등에 업고 헉헉대며 달리는 남자.
“사, 살쾡이 암살자! 처, 천천히 좀 갑시다아!”
“무슨 소리야 영주 나리! 아틸라가 위험에 처했을지 모른다고!”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요! 아틸라 님은 악귀가 아니라 악귀 할애비가 한 수레로 온대도 끄떡없을 위인이오!”
“흐응 철혈귀검아. 웬일로 네가 맞는 말을 다 하는구나.”
“난 항상 바른 말만 하는 사나이요!”
“그만 떠들고 빨리 오기나 해! 설마 여자 한 명 업었다고 힘들어하는 거야? 그것도 바토리처럼 날씬한 여자를?”
“철혈귀검아. 내가 무거운 것이더냐.”
“처, 천만의 말씀이오! 바토리 아가씨는 종잇장처럼 가볍소! 혹 떨어뜨렸나 해서 계속 등 뒤를 확인 중이오!”
그제서야 바토리를 등에 업었다는 사실을 실감한 오토가 콧구멍을 벌름댔다.
“드, 등 뒤가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살과 숨결을 느껴 볼 날이 올 줄이야!”
“뭐라? 살과 숨결을 느껴?”
“으히이이익! 나도 모르게 생각을 말로 해 버렸수!”
“뭐야! 더러워 영주 나리! 아틸라에게 전부 일러줄 거야!”
“일러줘야겠구나.”
“제, 제발 그러지 마시오! 그렇게나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요오오오!”
그들의 대화 내용은 형편없고 심지어 천박하기까지 했지만, 경비대장은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카자르의 동료이기 때문이 아니다.
저들은 단 세 명이서 마을에 출현한 악귀 대부분을 섬멸했다.
‘특히 두 여인의 활약이 대단했지.’
어느새 영주성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경비대장은 성의 꼭대기를 올려다봤다.
그 역시 성에서 뿜어지던 화염의 정체는 적마탑 마법사의 마법일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조금 전부터 발생하지 않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마법사가 괴물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콰아아아앙!
영주성 최상층 벽면이 부서지며 새빨간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경비대장의 눈이 커졌다.
‘또 불덩이인가!’
아니었다.
달빛을 등진 붉은 덩어리는 불이 아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인간이라기엔 너무 컸고 팔다리의 비율이 기괴했다.
그것의 복부를 비집고 튀어나온 눈부신 검신이 보였다.
“괴, 괴물이다!”
“괴물이 칼에 맞았어!”
“그렇다면 카자르 공께서……!”
그 순간 하늘 위에서 무언가 포효했다.
그것은 흡사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쿠우우웅!
괴물이 지면에 처박힌 순간 포효의 주인은 밝혀졌다.
“카자르 공!”
“아틸라!”
저렇게 높은 곳에서 추락했건만 붉은 피부의 괴물은 살아 있었다.
아틸라가 녀석의 등에서 무휼을 뽑았다.
“생명력 하난 정말 끝내주게 질기구만.”
옆구리를 부여잡고 일어서던 괴물의 목에 무휼이 꽂혔다.
콰득! 목이 절단됐다.
무휼을 역수로 쥔 아틸라가 괴물의 이마를 내리찍었다.
그 충격에 양옆에 달려있던 놈의 안구가 얼굴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픈가? 넌 이 정도론 죽지 않잖아. 안 그래?”
신음하는 혈귀를 내려 보며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고개 돌려 바토리를 바라봤다.
“이거 죽지 않게 좀 만들어 놔라.”
* * *
해가 뜨자마자 일행은 리옹을 떠났다.
영주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죽은 도시에서는 전날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난 이걸 가지고 일단 적마탑으로 돌아가겠다.”
혈귀의 머리를 손에 든 라일이 말했다.
그는 바토리에게 동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바토리는 거절했다.
“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단다.”
고개를 끄덕이던 라일이 아틸라를 돌아봤다.
그의 실눈이 미세하게 벌어지며 눈동자가 드러났다.
“등 뒤를 조심해라. 전사 아틸라.”
“네 모가지나 조심해.”
라일이 피식 웃었다.
아틸라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라일이 먼저 떠나고, 나머지 일행도 말을 몰았다.
도시를 구한 영웅들에게 리옹의 경비대장은 훌륭한 말을 선물했다.
네 마리 말이 도시를 벗어났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 카자르 공!”
“위대한 전사 카자르!”
“리옹을 구한 영웅!”
“부디 리옹에 또 들러 주시길……!”
그것 말고도 ‘천사처럼 아름다운 마법사’라든지, ‘살쾡이처럼 날쌘 단검전사’라는 등의 괴상한 호칭들이 터져 나왔다.
바토리는 들었냐는 듯 아틸라를 돌아봤고, 아틸라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부정했으며, 카스피는 왜 자꾸 자신을 살쾡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댔다.
오토가 중얼거렸다.
“……어째 날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수.”
그때였다.
“철! 혈! 귀! 검!”
갑작스레 들려온 외침에 오토가 뒤를 돌아봤다.
한 소년이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며 오토를 보고 있었다.
오토도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며 소년을 마주 봤다.
콧구멍을 벌름대며 눈빛을 교환하던 오토가 엄지를 추켜올렸다.
소년도 엄지를 추켜올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오토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래! 내가 바로 철혈귀검, 오토 님이시다! 으하하하하하!”
* * *
그날 밤.
“캬! 이렇게 다시 만나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있으니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 같소! 으하하하!”
사냥한 노루를 불에 구우며 오토가 신나 떠들었다.
“그건 그렇고 그 오줌싸개 제롬이 그리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소! 내 말 등 위에 묶여 질질 끌려다니던 애송이가 전장의 사신 소릴 다 듣게 되다니! 크으……!”
“너 다 울었냐?”
아틸라의 말에 오토가 질겁하며 외쳤다.
“우, 울긴 누가 울었다 그러쇼!”
“우는 거 다 봤어 영주 나리. 그 꼬마와 무슨 사랑에라도 빠진 것 같던데.”
“나도 봤단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난 남자라면 딱 질색이오! 난 여자! 여자를 좋아한단 말이오!”
“아하. 바토리 같은 여자?”
카스피의 말에 아틸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 맞다 아틸라.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뿌에에에에엑! 마, 말하지 마시오 살쾡이 암살자! 진짜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러요!”
“뭐야. 무슨 일인데.”
“아아무 일도 없었수! 정말이오 아틸라 님!”
“흐응.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더냐 철혈귀검아.”
“바토리 아가씨까지 이러기요!”
“이쪽 보고 있을 틈이 어디 있더냐. 노루나 질겨지지 않게 잘 구워 보거라. 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걸 좋아하지 않더냐.”
그렇게 말하며 바토리는 자신의 목 아래를 슬쩍 내려 봤다.
오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히이이이익!”
“지랄발광 그만하고 고기나 구워라. 다 늦은 밤에 시끄럽게.”
“아, 알겠수 아틸라 님! 이 오토에게 맡겨만 주쇼!”
이제 살았다는 듯 오토는 열심히 노루를 구웠다.
바토리는 펀치를, 카스피는 도롱뇽을 데리고 놀았다.
도롱뇽은 꽥꽥 소리치며 반항했지만 아틸라가 던진 술병을 맞고 조용해졌다.
잠시 후, 일행은 여느 때보다 잘 익은 노루 고기를 씹고 있었다.
“흐에에엣! 바토리가 고대의 인간이고, 공주였다고?”
“그, 그게 정말이오! 아틸라 님!”
아틸라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토와 카스피에게 바토리에 대한 것과, 오르피나의 성물을 찾는다는 앞으로의 목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은 둘은 아틸라가 꺼낸 검은 구슬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그게…… 그 리베르인지 뭔지 하는 구슬이란 말이우?”
“그래.”
“아틸라 님이 그 관조자를 구슬로 만든 탓에 바토리 아가씨가 인간이 된 거고?”
“그래.”
“그럼 그 구슬이 해방되면 바토리는 다시 불멸자로 돌아가는 거야?”
“그렇단다.”
바토리의 대답에 카스피는 꿀꺽 침을 삼켰다.
바토리가 보통의 마법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아틸라가 들려준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오토가 중얼거렸다.
“……인간 같지도 않은 거구의 야만전사에, 고대 왕국의 공주이자 불멸의 삶을 살아온 마법사에, 힘을 되찾는 중인 드래곤 도마뱀에, 엿가락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곰새끼에, 귀신 때려잡는 인간 살쾡이에. 이거 나 혼자만 평범한 인간이었소! 하하하하!”
“누가 살쾡이야!”
“하, 할퀴지 마쇼!”
투닥대는 오토와 카스피를 보며 아틸라는 생각했다.
오토. 너도 이제 평범한 인간은 아니거든.
카스피에게 긁힌 뺨을 문지르며 오토가 물어왔다.
“그래서 그 드워프들을 만나 성물을 찾고 나면 구슬을 해방시킬 생각이우?”
“드워프의 도움으로 얻은 성물만으론 부족하지.”
“엥? 그건 또 뭔 소리유?”
“그건 성물의 조각에 불과하니까.”
들이켠 술병을 내려놓으며 아틸라가 말했다.
“아무튼, 모든 성물을 손에 넣어도 구슬을 해방시킬 생각은 없다. 만일을 위한 보험일 뿐.”
그 말에 오토와 카스피는 슬쩍 바토리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바토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틸라의 술병을 들어 홀짝거릴 뿐이었다.
오토의 눈빛이 변했다.
전에 없던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때 일국의 공주였던 신분에 정말 고생이 많소.”
정적이 찾아왔다.
모닥불 타닥거리는 소리가 몇 차례 지나갔다.
침묵을 깨뜨린 건 카스피였다.
“프하하하하하! 뭐야 영주 나리. 바토리가 공주라니까 이제서야 남작 행세하려는 거야?”
“그런 게냐 철혈귀검아.”
“미친놈.”
동료들이 차례로 내뱉은 말에 더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던 오토도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신나게 고기를 뜯고 술을 마시며 밤을 보냈다.
하나둘 일행이 쓰러져 잠들고 밤이 어둠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 때쯤 아틸라는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의 앞엔 피 칠갑을 한 사바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