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112화 (112/425)

112. 귀살 (5)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

다시금 카스피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안구는 핏물처럼 변해 있었다.

키에엣!

악귀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카스피는 회피했다.

귀안으로 발달된 예지 시력.

그것과 더불어 큰 폭으로 상승한 민첩 능력이 그녀의 움직임을 더욱 능수능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아틸라는 귀안에 또 다른 힘이 있다고 했어.’

어떻게 아틸라가 귀살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카스피는 아틸라를 믿었다.

춤추듯 휘둘러진 단검이 악귀의 두 팔을 베었다.

절단을 노린 공격이었지만 다소 얕았다.

단검은 악귀의 단단한 피부를 파괴하기 부적합했다.

‘이 정도론 안 돼.’

카스피는 아틸라가 했던 말을 머리에 되새겼다.

두근두근, 박동하는 심장에 정신을 집중했다.

실타래처럼 그것을 감싸며 회전하는 미지의 기운을 탐색했다.

‘느껴져.’

신기루라 여겨질 만큼 미약한 감각.

하지만 분명 느껴졌다.

쇄도하는 악귀의 공격을 회피, 반격하며 카스피는 그 감각에 집중했다.

양팔로 전도시켰다.

‘천천히.’

카스피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악귀에게 파상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어느 순간 팔꿈치를 넘어선 미지의 기운이 미끄러지듯 양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엔.

화르르르르……!

카스피의 눈이 커졌다.

단검의 날이 붉은 안개로 뒤덮인 것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으힉! 살쾡이 암살자! 몸에 불이라도 붙은 거요!

단검을 덮은 안개가 전신으로 번졌다.

오토의 과장처럼 불같이 타오르는 건 아니다.

다만 적빛의 안개가 전신에서 수증기처럼 피어올랐다.

그 순간 카스피는 자신의 신체가 한 단계 높은 레벨로 재구성된 것을 감각했다.

악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눈앞에 십여 개의 반듯한 직선이 그어졌다.

차앙! 파카앙! 콰득! 콰지지직!

악귀의 몸이 십여 조각으로 잘렸다.

그것을 넘어 절단면에 옮겨붙은 안개가 악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갑자기 마법사라도 된 거요!”

비명을 지르며 악귀가 쓰러졌다.

놈의 생명력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악귀의 몸을 태우던 붉은 안개도 모습을 감췄다.

‘이것이 아틸라가 말했던……!’

카스피는 달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을 가로막던 공기의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달리는 것 같아!’

지면을 박찼다.

그녀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며 팽이처럼 회전했다.

희열에 찬 입꼬리가 위를 향했다.

지금의 몸 상태라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크게 소리 내어 외쳤다.

“가자고 바토리! 펀치! 아하하하하!”

* * *

성에 입장한 아틸라는 계단을 달려 오르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지만, 좋은 소식도 있었다.

‘카스피가 각성했다.’

카스피는 원래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귀살자.

게다가 하싸씬의 자객들을 상대하며 상당한 실전 경험을 쌓았다.

힘을 사용하기 위한 약간의 힌트만으로도 성공할 거라는 걸 아틸라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라일 녀석. 화려하게도 날뛰었군.’

성 안은 시체들로 가득했다.

인간의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악귀의 시체.

‘하긴, 귀살자 다음가는 악귀 살해 전문가는 화속성 마법사니까.’

조금 전 카스피에게도 말했듯.

악귀의 질긴 숨통을 끊으려면 놈들의 의지, 그 자체를 부숴야 한다.

‘머리를 파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

그러나 악귀의 두개골은 인간의 것보다 단단하다.

아틸라 정도의 전사이기에 그것을 손쉽게 자르거나 부술 수 있는 것.

그래서 악귀를 상대하는 덴 전사보다 마법사가 적합하며.

그중 화속성 마법이 가장 뛰어난 효율을 발휘한다.

‘머리를 통째로 태워 뇌를 녹여 버릴 수 있으니까.’

과연 악귀들의 시체는 하나같이 머리통이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반면 다른 부분은 상처 없이 깨끗했다.

아틸라는 라일의 전투법에 내심 감탄했다.

‘제법이군.’

당연한 말이지만, 마법사의 마력 사용량엔 한계가 있다.

특히 화속성 마법은 강력한 위력과 비례하는 상당한 마력을 소모한다.

그래서 라일은 머리통만 확실히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제한된 마법을 사용했고, 높은 확률로 적중시켰다.

‘악귀를 많이 상대해 본 솜씨다.’

그런 라일이 최상층에서 싸우고 있다.

눈앞의 악귀들을 처리할 때보다 훨씬 강력한 마법을 난사하면서.

‘마법 공격이 끊이지 않고 펼쳐지고 있다. 이 정도 실력을 보유한 라일의 공세를 견딜 수 있는 악귀라면.’

아니.

악귀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틸라는 임무창으로 눈을 돌렸다.

[ 파괴된 악귀의 머리 (17/36) ]

[ 파괴된 우두머리의 머리 (0/1) ]

‘우두머리 악귀가 아닌, 그냥 우두머리다.’

몇 마리의 악귀가 아틸라를 습격했다.

라일이 모든 악귀를 처리하진 않은 모양.

아틸라는 용아귀 대신 무휼을 들었다.

달려드는 악귀들을 최대한 난도질하며 처리했다.

악귀들은 제대로 된 공격 한번 성공하지 못한 채 아틸라에게 죽었다.

몇 번인가 추가로 악귀들이 달려들었지만 아틸라는 어렵지 않게 처리했다.

[ 파괴된 악귀의 머리 (36/36) ]

이윽고 아틸라는 최상층에 도달했다.

벽과 천장은 상당 부분이 부서져 별하늘이 드러나 보였다.

그 아래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옷자락을 부여잡고 선 라일의 뒷모습이.

“더럽게도 늦는군. 아틸라.”

라일의 등 너머엔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성 밖에서 쓰러뜨렸던 악귀 혼합물보다 더욱 커다랬다.

“이 도시의 영주다.”

라일의 옆에 서며 아틸라는 괴물을 훑어봤다.

괴물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골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양팔이 지나치게 길었다.

반면 다리는 몸에 비해 짧았고, 두 눈이 어류처럼 머리 좌우에 달려 있었다.

아틸라는 불현듯 생선구이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성에 도착하자마자 영주를 만나 악귀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녀석은 푸짐한 식사로 날 대접한 뒤 귀빈실을 내어주더군.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다시 하자면서.”

라일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읊어 댔다.

“조금 전 귀빈실로 악귀들이 침입했다. 놈들을 제거하자 성 안은 악귀의 소굴로 변해 있었지. 난 악귀들을 쓰러뜨리며 이곳, 영주의 방으로 달렸다.”

“그 결과가 이거라는 건가.”

“그렇다.”

괴물이 된 영주는 몸 곳곳에 화상을 입은 채였다.

팔 한쪽은 부러져 너덜거렸다.

그래서일까, 녀석은 섣불리 이쪽을 공격하지 못한 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방심하지 마라 아틸라. 보통의 악귀가 아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아틸라는 영주의 모습을 주시했다.

‘악귀는 자신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을 포기한 자들.’

그들의 신체는 각자의 갈망과 걸맞은 형태로 재구성되고, 더욱 강력해진다.

그런데 눈앞의 괴물은 그것 외에 다른 차별점이 있다.

‘붉은 피부.’

녀석의 피부는 달궈진 쇠처럼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보통의 악귀는 저런 특징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눈앞의 괴물이 악귀를 넘어 한 단계 높은 등급으로 진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혈귀(血鬼).’

마귀의 상위종이 악마인 것처럼.

악귀의 상위종은 혈귀다.

또한 악마가 대부분의 마귀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 것처럼.

‘혈귀는 악귀를 상회하는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혈귀가 혈귀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

그건 놈들의 피부색이 핏빛인 까닭도 있지만.

더욱 큰 이유는.

‘혈귀가 자신의 피를 이용해 악귀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지.’

혈귀는 악귀를 만들 수 있다.

‘녀석인가. 리옹에 수많은 악귀를 만들어 낸 장본인은.’

확신할 수 없다.

그렇게 단정 짓기엔 납득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

게다가 애초에 영주가 혈귀가 된 원인을 생각한다면.

‘메피스토펠레스가 직접 개입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본래 혈귀는 오랜 세월 악귀로 살아온 자가 낮은 확률로 진화해 만들어진다.

리옹의 영주는 얼마 전까지 인간이었다.

아틸라는 분명하게 그것을 알고 있었다.

‘리옹의 영주는 원작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니까.’

그렇다면 평범한 인간을 단기간에 혈귀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영주와 접촉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라면 역시.

‘메피스토펠레스. 녀석밖에 없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패영전의 악마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환술 능력을 지니고 있다.

‘발키리의 힘을 지키기 위해 일리시아가 펼쳤던 환술 역시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을 이용한 것이었지.’

환술에 빠진 대상의 시간은 실제와 다르게 흘러간다.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실제 시간보다 느리게, 혹은 더욱 빠르게 흐르도록 구성할 수 있다.

아마도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에 빠진 영주는 그 안에서 수십 년에 달하는 시간을 악귀로 보낸 뒤 마침내 혈귀로 진화했을 것이다.

“마법을 더 사용할 수 있나.”

“당연한 소릴.”

“그럼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군.”

“……앞으로 한두 번 정도다.”

아틸라는 무휼을 손에 쥐었다.

이프리트의 반지를 착용했다.

공격할 때마다 쓸데없이 눈이 부셔 언젠가부터 사용하지 않던 물건이지만.

‘혈귀를 상대로는 제법 유용하지.’

화륵! 무휼에 화속성이 부여됐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 이프리트의 숫돌을 사용합니다. ]

[ 절삭력이 상승합니다. ]

[ 공기 저항이 감소합니다. ]

[ 화(火)속성이 추가됩니다. ]

[ 이프리트의 반지와 함께 사용하면 효과가 더욱 증대됩니다. ]

아틸라는 고개 돌려 라일의 얼굴을 바라봤다.

[ 권능, 심안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

[ 심안은 원작자의 세계와 상대의 세계가 강한 교감을 일으켰을 경우에만 발동되는 제한적 권능입니다. ]

아틸라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는 이전에도 라일에게 심안을 시전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모닥불 앞에서 말고기를 뜯을 때.

두 번째는 마차를 타고 이동 중에 라일이 자신을 돌아봤을 때.

“물러나 있어라.”

“뭐라고?”

“그 한두 번 쓸 마법으로 네 몸이나 지키라고.”

라일이 코웃음쳤다.

“웃기는 소리군. 내 도움이 없다면 제아무리 너라도.”

라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틸라가 혈귀에게 돌진했다.

“저런 미친!”

혈귀도 가만있지 않았다.

녀석의 팔이 더욱 길어지며 갈고리 같은 손톱이 자라났다.

아틸라를 향해 쏘아졌다.

“빌어먹을. 아틸라!”

라일이 소리쳤다.

라일의 두 손에 강력한 화속성 마법이 피어났다.

이내 그의 두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저것은……!”

무휼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아틸라는 웃었다.

그는 혈귀와의 전투에서 불필요한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 남은 시간 01:21 ]

‘시간이 많지 않거든.’

아틸라는 영주성에 도착한 이후, 용아귀가 아닌 무휼을 사용해 악귀들을 베었다.

필요 이상으로 난도질을 해 가며.

그것엔 이유가 있었다.

[ 성검, 무휼의 공격이 적중했습니다. ]

[ 축성의 인장이 발동합니다. ]

[ 성검, 무휼의 공격이 적중했습니다. ]

[ 축성의 인장이 발동합니다. ]

[ 축성의 인장이 발동합니다. ]

[ 축성의 인장이 발동…… ]

[ 축성의 인장 발동 효과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파지지지짓!

무휼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뿜어졌다.

그것이 화속성과 융합하며 무휼의 날을 길게 변화시켰다.

만티코어의 목을 절단했을 때보다, 더욱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