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귀살 (4)
경비대장은 괴물을 쓰러뜨린 사내를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대체…… 이 무슨……!’
리옹의 경비대장을 맡기 전까지 전사로서 겪을 산전수전은 다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의 괴물을 쓰러뜨린, 저 괴물보다 더욱 괴물 같은 사내의 존재는 그간의 경험을 모두 부정하게 만들었다.
‘지금 내가…… 이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사실이란 말인가……!’
이내 경비대장은 자신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괴물의 포효에 놀란 말이 자신을 떨어뜨린 채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밤공기를 짓누르던 짙은 고요가 휘발된 것은 그때였다.
“우와아아아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주저앉았던 주민들도 서로를 끌어안았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경비대장이 사내에게 다가가 말했다.
“괴물을 쓰러뜨려 줘서 고맙소.”
사내는 말이 없었다.
무언갈 골몰히 생각하는 듯했다.
경비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카자르.”
사내가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나온 순간 경비대장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카, 카자르……. 카자르라면……!”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당신이 그 유명한 드워프 용병단의 단장! 카자르란 말이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의 눈을 떴다.
카자르가 누구인가.
저 사악한 남쪽의 침략자 아인하르트로부터 노르드 왕국을 구한 전쟁영웅이 아니던가!
“저, 정말 카자르라고?”
“저분이 노르드 왕국의 구세주, 카자르……?”
사위가 웅성거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주민들이 아틸라를 향해 조심조심 다가왔다.
말로만 듣던 전쟁영웅.
혜성처럼 등장해 아인하르트를 격파한 카자르 용병단의 무용은 이미 노르드 왕국 전역으로 퍼져 있었다.
분위기를 읽은 오토가 재빠르게 나섰다.
“하하하 그렇소! 여기 이 사람이 바로 사자왕 샤를 아인하르트를 쓰러뜨리고 노르드 왕국을 구한 전사 중의 전사! 영웅 중의 영웅! 그 이름도 유명한 오동나무 용병단의 돌격대장! 카자르요!”
아틸라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린 오토가 제 가슴을 활짝 펴며 외쳤다.
“아울러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위대한 전쟁영웅 카자르가 몸담고 있는 오동나무 용병단의 단장! 카자르의 절친한 친우이자 철혈귀검성의 성주! 오토요!”
그런 오토를 보며 카스피와 바토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아틸라의 곁에 다가서며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방방 달려온 펀치도 아틸라의 발치에서 혀를 내밀었다.
“그, 그렇다면 저분들이 바로……!”
“불패의 용병, 카자르의 동료들!”
병사와 주민들이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바라봤다.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거구의 야만전사.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고귀한 기품의 여자.
자신을 성주라 소개한 이후 왠지 모를 위엄이 느껴지는 사내.
가죽옷 위로 드러난 탄력적인 몸매와 시원스러운 미소가 매력적인 여자.
그러나 조심스레 의문을 표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이 없는데…….”
그랬다.
카자르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그가 6인의 드워프 전사를 이끌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의구심으로 수렴되어갈 때쯤 누군가 소리쳤다.
“그만들 해! 저분은 카자르가 맞아! 카자르 공이 아니라면 누가 저런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단 말이냐!”
그 말에 주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카자르 공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지!”
“카자르는 남쪽의 패왕 샤를 아인하르트마저 쓰러뜨린 위대한 전사라고!”
“버서커 카르타고의 뒤를 잇는 불패의 전사!”
“우와아아아아!”
그 말이 맞는다며 더욱 커다란 호응을 유도하는 오토.
당연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주민들을 둘러보는 바토리와 카스피.
아틸라의 어깨에 올라 끼아오오옹! 길게 포효하는 펀치.
그러나 아틸라는 주변 상황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 파괴된 악귀의 머리 (7/36) ]
[ 파괴된 우두머리의 머리 (0/1) ]
쓰러뜨려야 할 악귀는 아직 29마리가 남았다.
아니 애초부터 36마리가 전부가 아닌, 훨씬 많은 수의 악귀가 등장할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우두머리는 아직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이곳이 아니라면.’
아틸라는 고개 돌려 영주성을 바라봤다.
오토가 아틸라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뭐 하는 거요 아틸라 님! 이럴 때 거하게 폼 한 번 잡아 보지 않고서!’
히죽히죽 입꼬리를 올리는 오토를 무시하며 경비대장에게 물었다.
“경비대는 전원 이곳에 있는 거요?”
“성벽을 지키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놓은 채요. 나머진 모두 여기로 출동했지.”
“영주성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나 있소.”
“이곳의 인원과 비슷할 거요.”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공기를 울렸다.
저 멀리 영주성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병사들이 소리쳤다.
“저, 저게 무슨!”
“성이 불타고 있어!”
“설마 괴물들이……!”
“괴물이 성을 습격했다! 이놈들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야!”
병사와 주민들이 동요했다.
카자르의 등장 덕에 괴물로부터 안전해졌나 싶었더니 또 다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아틸라는 성에서 벌어진 상황을 짐작했다.
‘라일이 무언가를 향해 화속성 마법을 시전했다.’
그것도 대단히 강력한 마법을.
저 정도의 마법은 자신과 바토리를 공격할 때는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력을 숨겨 두고 있었나. 라일.’
마차 위에서 자신을 돌아보던 라일의 음흉한 실눈을 떠올렸다.
‘바토리와 곰새끼가 없었으면 넌 벌써 나한테 뒤졌어.’
“오토.”
“왜, 왜 그러슈.”
“오랜만의 호위 임무다.”
오토가 반사적으로 바토리를 돌아봤다.
바토리는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틸라가 이어 말했다.
“카스피.”
아틸라는 카스피에게서 시공추적의 반지를 받아 냈다.
“이건 왜.”
“파티를 유지하려면 필요하니까.”
“뭐?”
“악귀들이 오고 있다.”
아틸라의 말대로였다.
골목 사이사이에서 악귀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틸라의 눈이 카스피를 똑바로 바라봤다.
“카스피. 네 힘은 귀신을 처치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뭐?”
“물리 공격으로 악귀를 처리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네가 지닌 힘을 잘 이용하도록 해.”
“그게 무슨…….”
아틸라는 카스피에게 귀살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카스피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이야기를 마친 아틸라가 경비대장에게 말했다.
“먼저 성으로 가겠소. 악귀들을 처리하고 오시오. 내 동료들이 도움을 줄 거요.”
끼아옹! 펀치가 자신도 있다며 존재감을 알렸다.
펀치의 이마를 쓰다듬은 아틸라가 바토리를 돌아봤다.
바토리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처럼 성으로 날려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냐.”
“잘 알고 있군.”
말은 모두 도망쳤다.
그렇다고 달려서 가기에 영주의 성은 그리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지 않다.
“끄아악……! 끄흑! 컥……!”
자리에 있던 병사와 주민 사이에서도 악귀로 변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경비대장은 기사와 병사들을 통솔하며 진을 갖췄다.
주문을 읊조리던 바토리가 아틸라를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퍼엉! 아틸라의 몸이 불타는 영주성을 향해 대포알처럼 날아갔다.
“으아아아악!”
이번에도 아틸라는 고통을 참기 어려웠는지 고함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소리 내 웃던 바토리가 오토, 카스피, 펀치를 돌아봤다.
“우린 악귀들을 처리하며 따라가 보자꾸나.”
* * *
하늘을 날던 아틸라는 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불타는 집.
짐승처럼 먹이를 쫓는 악귀들.
도망치는 주민들.
‘난리도 아니군.’
메시지가 떠올랐다.
[ 파괴된 악귀의 머리 (8/36) ]
‘벌써 한 마리 처리했나.’
아틸라가 시공추적의 반지 한 짝을 확보한 덕에 파티는 해제되지 않았다.
카스피와 오토의 간략 능력치를 살펴본 아틸라는 다시금 둘의 성장을 체감했다.
‘고생깨나 했나 보군. 둘 다.’
아틸라의 눈이 도시 외곽에서 무언갈 발견했다.
‘응?’
낯익은 광경이었다.
새하얀 안개가 장막처럼 펼쳐지는 저것은.
콰콰쾅!
그때 영주의 성에서 또다시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화르르르르르!
불꽃이 아틸라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
아틸라는 무휼을 들어 막았다.
약간의 화상을 입는 것으로 피해는 면했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성을 향해 날아가던 관성이 감퇴하며 그의 몸이 때 이른 낙하를 시작한 것이다.
‘바닥으로 떨어지면 위험한데.’
원래 바토리는 아틸라를 영주성 최상층으로 날리려 했다.
처음 불꽃이 뿜어진 위치가 그곳이었고, 그래야 낙하의 충격 또한 덜할 것이기 때문.
그러나 불의의 습격을 받은 아틸라는 영주성까지 날아가지 못했고 위태로운 추락을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맨바닥이 아닌 어느 민가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는 것.
아틸라는 몸을 웅크려 손과 얼굴, 그리고 장기를 보호했다.
콰쾅!
아틸라의 몸이 건물과 부닥치며 폭음을 울렸다.
소모된 체력을 확인하며 아틸라는 벽돌의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네.”
성을 향해 달렸다.
* * *
카스피는 사슬낫 대신 단검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틸라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귀안은 상대의 공격 경로를 파악하는 것에 그치는 기술이 아니다.’
카스피도 알고 있었다.
이 기술의 이름이 귀안이라는 것은 몰랐지만.
귀안을 사용하면 상대의 공격 경로 파악과 더불어 자신의 민첩성이 대폭 향상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틸라는 그 이상을 말했다.
‘귀안엔 또 다른 힘이 내재돼 있다. 아니, 귀안은 사실 귀살자의 진정한 능력을 개방할 수 있는 열쇠에 불과하지.’
‘그, 그럼 어떻게 하라고 아틸라.’
‘심장을 감싸며 도는 귀기(鬼氣)를 양손으로 집약시켜라. 그 후 무기를 향해 밀어내는 거야.”
‘뭐? 귀기?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다. 네가 직접 체화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 길이가 긴 사슬낫보단 단검이 적합할 거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틸라는 영주의 성을 향해 날아갔고, 자신은 이곳의 악귀들을 처리해야 한다.
콰지직! 바토리의 마법에 악귀 한 마리가 쓰러졌다.
“부담 갖지 말거라 카스피. 천천히, 차근차근 해나가면 되는 게야.”
“바, 바토리 아가씨야말로 천천히 좀 갑시다!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아틸라 님에게 맞아 죽소!”
그 말대로 바토리는 오토의 호위 따위는 무시한 채 악귀들을 섬멸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껏 마법을 뿌려 대니 제법 신이 나는구나.”
바토리가 소녀처럼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스피는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바토리.’
바토리가 왜 저렇게 앞장서서 악귀들을 처리하는 것인지 카스피는 알았다.
자신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것이다.
‘그래. 내겐 바토리가 있어. 영주 나리와 펀치도 있고.’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천천히. 집중하는 거야 카스피. 실패해도 괜찮아. 나에겐 믿음직한 동료들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