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귀살 (1)
그날 밤 여관 식당엔 거나하게 술상이 차려졌다.
아틸라는 식당을 통째로 빌렸다.
그간 모은 금화가 상당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으하하하하! 이렇게 아틸라 님을 다시 보게 되다니! 언젠가 만나게 될 줄은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꿈에도 몰랐소!”
얼큰하게 취한 오토는 새삼 감정이 복받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아틸라를 껴안으려 했다.
그런 오토를 발로 걷어차는 것으로 아틸라는 포옹을 대신했다.
“케헥……!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내장이 모조리 터진 것 같다!”
“새끼. 엄살은.”
아틸라가 히죽 웃었다.
말이나 행동과 달리, 아틸라 역시 오토와 카스피를 보며 상당한 반가움을 느끼고 있었다.
“뭐야 영주 나리. 왜 헛소릴 하고 그래.”
바닥을 뒹구는 오토를 내려 보며 카스피가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스피와 오토가 리옹에 있던 이유는 그들이 시공추적의 반지를 이용해 바토리를 추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리옹에 도착할 무렵 반지의 신호가 끊겼고, 그래서 두 사람은 이곳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던 것.
“내가 반지의 마력을 잠시 차단했었느니라.”
바토리의 말에 카스피가 놀라 물었다.
“엥? 왜?”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만나야 재회의 기쁨이 더욱 크지 않겠느냐.”
“그건 그러네. 아하하하하!”
카스피가 깔깔 웃었다.
그녀는 오토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바들바들 몸을 일으킨 오토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틸라 님은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요?”
“뭐가.”
“아스투리아 왕국으로 갔다가, 이상한 곳으로 사라졌다가, 그러고는 후마이야 왕국에서 다시 아스투리아, 그 뒤 후마이야를 재차 거쳐 이곳 노르드 왕국까지. 뭘 그리 빨빨대며 돌아다니신 거냐, 이 말이오.”
“뭐야 너. 스토커냐?”
“엥? 스토커는 또 뭐요. 거참 여전히 혼자만 알아먹는 말을 잘도 하시네.”
아틸라의 이동 경로를 오토가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
카스피는 시공추적의 반지를 통해 아틸라와 바토리가 여행한 지역들을 짐작하고 있었고, 오토는 카스피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동료였으니까.
물론 아틸라도 그것을 알았다.
“펀치.”
술병 하나를 통째로 비운 아틸라가 펀치를 무릎에 앉혔다.
그러고는 볼록해진 펀치의 배를 쓰다듬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뭐? 드래곤? 이렇게 쬐끄만 도마뱀이 정말 드래곤이라고?”
카스피는 손가락을 집게처럼 사용해 도롱뇽의 덜미를 잡아 올렸다.
휘둥그렇게 뜬 카스피의 두 눈이 도롱뇽을 구석구석 탐색했다.
“놔! 이거 놔라! 미물!”
도롱뇽은 내려놓으라며 파닥파닥 발버둥 쳤지만, 펀치에게도 이기지 못하는 실력으로 카스피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도롱뇽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크흑……! 이몸이 언제까지 이런 하찮은 미물들에게 수모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 나도 좀 보고 싶소!”
오토 역시 신기했는지 카스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기회를 잡은 도롱뇽은 카스피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오토의 뺨을 냅다 할퀸 뒤 펀치의 입안으로 숨어들었다.
“으악! 미친 도마뱀이 날 공격한다!”
엄살을 부리는 오토를 무시하며 아틸라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윽고 악귀가 된 조제프에 대한 내용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카스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륙 곳곳에 악귀들이 등장하고 있는 건 맞아. 발루아 왕국도 그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듯하거든.”
“발루아 왕국이?”
“응. 출몰한 악귀들 때문에 대영주들의 이권다툼도 잦아드는 중이라 하더라고. 아무래도 남의 땅을 탐하는 것보단 자기 땅을 지키는 게 우선 아니겠어?”
원작에서도 발루아 왕국은 이즈음 심각한 내전에 빠진다.
그 내전을 종식시키며 발루아의 왕이 되는 게 샤를이고.
‘발루아의 내전이 유야무야될 정도로 악귀들이 기승을 부린다는 건가.’
“아 참, 악귀에 대한 정보는 스승님께서 몰래 알려주고 가셨어.”
“사바흐가?”
여전히 제자바보 노릇하고 있는 모양이군. 사바흐.
“응. 뭐, 하싸씬의 별책도 철통보안은 아니니까. 그리고 스승님 말로는 교단에서 나에 대한 추적을 잠시 멈췄다나 봐.”
“발루아의 대영주들이 전면전을 포기한 대신 하싸씬의 살수들을 고용했다는 거군.”
“흐에엣! 그걸 어떻게 알았어?”
카스피가 놀라 물었지만 아틸라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 아무튼, 그런 연유로 교단은 지금 살수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나 봐. 그래서 영주 나리와 함께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던 중, 일단 아틸라와 바토리를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카스피의 눈이 바토리를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바토리는 알고 있는 거지? 내가 지닌 이상한 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단다.”
그렇게 답한 바토리는 눈동자를 굴려 아틸라를 쳐다봤다.
아틸라는 무심한 표정으로 술병을 들이켜고 있었고, 그러자 도롱뇽에게 맞아 부어오른 뺨을 문지르던 오토가 옳다구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이고 아틸라 님. 마침 살수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 진짜 골백번도 넘게 죽을 뻔 했수다.”
“뭐가 또.”
“참나, 말도 마쇼! 하싸씬 놈들이 아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이대는데 그냥! 내 한 번은 똥 싸다 바지도 못 올린 채 싸운 적도 있다는 거 아니요!”
“아 그 얘기 좀 그만하라니까 영주 나리. 진심 더러워 죽겠어.”
“진짜 추잡하게도 죽을 뻔해서 이러는 거 아니요! 그 모습으로 죽기라도 했으면 내 정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했을 거요!”
항변하던 오토가 은근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험험. 근데 아틸라 님. 살쾡이 암살자가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하더란 말이우.”
“뭘.”
“하이고 내 입으로 말하기 낯간지럽지만서도 뭐, 기왕 말 꺼낸 거 마무리는 지어야지 않겠수? 험험 뭐라더라? 나 정도 실력이면 이제 웬만한 전사와는 싸워도 지지 않을 거라나 뭐라나.”
“호오. 그래?”
“무, 물론이오! 아니 사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지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아주 그냥 압살을…….”
쾅! 술병을 내려놓으며 아틸라가 큰 소리로 웃었다.
내심 아틸라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오토는 그 비웃는 듯한 반응에 울컥했다.
“정말이오! 내 거짓말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으하하하하! 그래그래.”
“살쾡이 암살자가 요즘 얼마나 강해졌는지 아틸라 님은 모를 거요! 그런 무시무시한 실력을 지닌 살수가 아주 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해 준 말이란 말이오!”
“누가 안 믿는대?”
아틸라가 웃음을 멈췄다.
그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불현듯 오토는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뭐요. 갑자기.”
아틸라가 용아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 들고 밖으로 나와.”
“네? 거, 검은 갑자기 왜요?”
아틸라는 부웅, 용아귀를 휘두른 뒤 여관 뒷문을 나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토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아이고 아틸라 님! 내가 잘못했소!”
* * *
여관 뒤편엔 호수를 옆구리에 낀 너른 공터가 있었다.
그곳 중앙에 아틸라와 오토가 마주 섰다.
“검 뽑아.”
“내, 내가 실언을 했소! 내 주제에 압살은 무슨! 이, 잊어 주시오 아틸라 님!”
술기운 따위 진즉에 다 날아갔다.
오토는 바들바들 떨리는 얼굴로 자신의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요놈의 주둥이! 요놈의 주둥이! 아이고 내가 요놈의 주둥아리 때문에 제 명에 못 살지!”
“헛소리 집어치우고 검이나 뽑아.”
“지, 진짜 하시게요?”
“팔 하나 잘린 다음에 뽑을래?”
아틸라가 용아귀를 겨누자 오토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아틸라가 낮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검을 뽑은 오토가 죽상을 하며 말했다.
“……흑! 제발! 아틸라 님……!”
“선공은 양보하지.”
그런 두 사람을 바토리와 카스피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토리가 윗입술을 핥았다.
“흐응. 즐거운 여흥거리가 되겠구나.”
두 여인을 원망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던 오토는 다시 한번 아틸라에게 불쌍한 똥개 같은 표정을 지어 봤지만.
“확 그냥 면상을 뭉개 버릴까 보다.”
결코 대결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주저하던 오토의 검이 추욱 아래로 늘어졌다.
“나, 난 못하겠수. 내가 어떻게 감히 아틸라 님을 공격할 거다아아아아!”
전투를 포기할 것처럼 굴던 오토가 태세를 바꿔 돌진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틸라가 히죽 웃었다.
“새끼. 어디서 같잖은 꾀를.”
“누, 눈치챈 거요!”
오토는 이를 악물며 검을 내질렀다.
‘시부럴! 될 대로 돼라!’
첨예한 파공음이 공기를 갈랐다.
아틸라는 가볍게 용아귀를 휘두르는 것으로 그것을 막았다.
‘날카롭군.’
검 한 번 부딪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오토의 검술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는 것을.
‘이 정도면 미카엘 급은 되겠는데.’
아틸라는 가스코뉴 공작령의 세 검호를 떠올렸다.
남쪽 수해 수비대장, 스테판 변경백.
북경 수비 총사령관, 브누아 방백.
붉은 기사단의 단장, 미카엘.
‘순수하게 검술 실력만이라면 미카엘이 제일이지.’
다시 말해 미카엘은 가스코뉴 공국 최강의 기사다.
그런 미카엘과 오토가 동급이라고, 아틸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파캉! 캉! 카아앙!
오토의 검이 신들린 듯 춤을 추었다.
폭풍 같은 기세로 아틸라를 습격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 모든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방어했다.
“비, 빌어먹을! 한 대만 좀 맞아 주쇼!”
“싫은데.”
그 말과 함께 용아귀가 반격의 곡선을 그었다.
오토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대로 받아 낸다면 검은 물론 어깨까지 으스러질 듯한 일격.
그런 아틸라를 상대로 오토는 놀라운 기술을 선보였다.
순간적으로 어깨 힘을 빼고 검의 방향을 틀어 공격을 흘려낸 것이다.
‘어쭈.’
아틸라는 조금 놀랐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최선을 다한 일격은 아니었지만.
막아 낼 거란 생각은 못했다.
‘이것 봐라?’
예상을 뛰어넘은 오토의 기술.
아틸라는 그 광경에 순수한 흥미를 느꼈다.
‘재미있군.’
그리고.
오토의 기술에 놀란 건 아틸라만이 아니었다.
“흐엑! 내, 내가 어떻게 한 거지!”
누구보다도 오토, 그 자신이 가장 놀랐다.
오토를 향해 아틸라가 달려들었다.
기술을 쓸 틈도 주지 않고 용아귀를 뻗었다.
콰앙! 오토의 검이 사선으로 튕겨났다.
그때였다.
시이이잇.
완전히 튕겨 낸 줄로만 알았던 오토의 검이 기묘한 곡선을 그렸다.
흡사 허공을 가르는 제비처럼 날렵한 움직임.
‘이건 또 뭐야.’
놀라운 일이었다.
검을 머금은 오토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는가 싶더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아틸라를 습격했다.
용아귀를 맞고 튕겨난 방향과 완전한 반대쪽.
카스피가 소리쳤다.
“나, 나왔다! 영주 나리의 필살기! 제비꼬리!”
얼씨구. 이름까지 지었냐. 제비꼬리?
“제, 제발 이거 맞고 쓰러지쇼!”
발악하듯 외치는 목소리와 달리 오토의 눈빛은 예기로 가득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쉬이 가질 수 없는 눈빛.
아틸라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이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