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악귀 (2)
노르드 왕국 북동쪽 자그만 마을에 살고 있던 조제프는 아인하르트와의 전쟁에 강제징집된 청년이었다.
‘가라! 비열한 침략자 아인하르트를 물리쳐라!’
‘우와아아아아!’
조제프는 최선을 다해 싸웠다.
때론 부상이 그의 육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가기도 했지만, 조제프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젤.’
지젤은 조제프의 약혼녀였다.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던 둘은 오랫동안 서로의 마음을 숨겨오다 지젤의 고백으로 연인 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조제프가 강제징집을 당한 것이다.
‘반드시 돌아올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나 전쟁은 패색이 짙었다.
동부 전선 총사령관 자비에 도베르뉴 공작은 전략전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많은 지휘관이 목숨을 잃었고, 그의 수백 배에 달하는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렇게 점차 전쟁이 패배로 수렴될 것처럼 보이던 어느 날.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달려! 라그나!’
‘호우호우!’
여섯 명의 드워프 용병.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한 명의 인간 전사.
카자르 용병단이 등장한 것이다.
‘카자르!’
‘카자르 용병단이 왔다!’
‘우와아아아!’
카자르와 여섯 드워프는 해일처럼 전장을 휩쓸고 다녔다.
빼앗긴 성들을 차례로 되찾으며 아인하르트를 압박했다.
그리고 마침내.
카자르는 적국의 왕, 샤를 아인하르트마저 쓰러뜨렸다.
‘이, 이겼다! 노르드가 아인하르트를 물리쳤어!’
‘우리가 이겼다고!’
조제프는 기쁨에 날뛰었다.
‘드디어 지젤에게 돌아갈 수 있어!’
전쟁 보상으로 두둑한 동전까지 챙긴 조제프는 부푼 꿈을 안고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조제프는 전쟁의 여파가 마을을 휩쓸지 않았을까 두려워했다.
전시의 치안은 평시와 달리 엉망이 되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제발. 제발 지젤이 안전하기를.’
쉼 없이 발을 움직여 조제프는 마을에 도착했다.
다행히 마을은 떠나올 때 모습 그대로였다.
조제프는 지젤의 집으로 달려갔다.
‘지젤! 내가 왔어 지젤!’
‘조제프……?’
지젤의 표정이 이상했지만 오랜만에 만나 놀란 것이라 여긴 조제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미 늦은 밤이었기에 조제프는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죽은 듯이 꿈속을 헤매던 조제프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조제프가 돌아왔던데.’
‘정말? 조제프가?’
‘그럼 지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지젤은 방앗간 주인 다니엘과 바람이 났잖아.’
……뭐라고?
‘사실을 알게 되면 조제프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심지어 지젤은 다니엘의 아기까지 뱄다지?’
‘뭐? 그게 사실이야?’
‘가여워라 조제프. 그 힘든 전쟁을 마치고 간신히 마을로 돌아왔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조제프는 벌컥 출입문을 열었다.
그곳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조제프는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심했다.
‘꿈이었던 건가. 그래. 그랬던 거야. 지젤이 날 배신할 리가 없지.’
갑자기 지젤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조제프는 참았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해가 뜨자마자 지젤을 만나러 가야겠다 생각하며.
조제프는 금세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머지않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지척이었다.
‘큭큭큭……. 어리석은 자 같으니.’
조제프는 번쩍 눈을 떴다.
거뭇한 그림자가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놀란 조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끈에 포박되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들었나? 조금 전의 목소리.’
그림자가 말했다.
‘그들의 말은 모두 사실이야. 네 약혼녀는 널 버리고 방앗간의 다니엘과 몸을 섞었지. 네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말이야.’
그림자가 웃었다.
‘아니, 언젠가부터 지젤은 네가 정말로 죽길 바라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그녀는 지금쯤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겠군.’
조제프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귀를 기울여. 조제프.’
그림자의 말과 함께 집 밖에서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 들킨 줄 알았지 뭐야.’
‘뭐 저리 잠귀가 밝지? 전쟁의 진흙탕을 뒹굴다 오더니 예민해진 모양이군.’
‘마을에서 징집된 젊은이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녀석이야. 무언가가 있겠지.’
‘조심해. 저 순진한 조제프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살이라도 할지 모르니.’
‘어차피 알게 되지 않을까?’
‘그렇기야 하겠지만 굳이 우리 입을 통해 알게 할 필요는 없지.’
‘하긴. 가엾은 조제프.’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조제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들이 널 불쌍히 여기는 것 같지? 천만에. 저들은 그저 즐기고 있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지젤을 꼬셔 볼 걸 그랬나?’
‘하긴. 지젤 정도면 마을 제일의 미녀라 부를 만하지. 다니엘 같은 늙다리에게 주긴 너무 아까웠다고.’
‘크흠.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난 이미 지젤을 품에 안았었지. 그것도 수차례나. 으흐흐. 으흐흐흐흐.’
‘뭐,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그럼. 조제프 녀석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위로하는 척하며 접근하니 순순히 넘어오더군. 세상에 외로움에 빠진 여자를 꼬드기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고.’
‘이런 제길. 그렇게 헤픈 년이었다면 내게도 기회가 있었는데.’
‘빌어먹을 나도!’
‘흐흐.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그년의 집으로 가 볼까?’
‘그거 좋은 생각이군. 흐흐흐…….’
‘으흐흐흐흐흐…….’
낄낄대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광기에 찬 발걸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조제프는 일어나고 싶었다.
지젤의 집으로 달려가 놈들로부터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지킨다고? 크크크큭.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가. 지젤은 이미 수많은 사내들과 몸을 섞었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간 너를 두고.’
아니야. 조제프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럴 때마다 몸을 죄는 무형의 끈은 점점 더 단단하게 조여졌다.
‘나의 주박을 풀고 지젤에게 가고 싶은가. 그곳에 어떤 잔혹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해도?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인가? 지젤은!’
그림자의 손이 조제프의 목을 움켜쥐었다.
조제프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놈들은 인간의 탈을 쓴 악귀다. 악귀는 너무도 강인하고 교활해 인간의 힘으론 당해 낼 수 없지. 네가 주박을 풀고 놈들을 뒤쫓는다 해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인간의 탈을 쓴 악귀.
‘그럼에도 바꾸고 싶다면 염원해라.’
무엇을.
‘악귀를 죽이고 싶다면.’
다가온 그림자의 속삭임이 비수처럼 심장을 찔렀다.
조제프의 안구에서 핏대가 불거졌다.
몸에서 기묘한 힘이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조제프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섰다.
튕기듯 출입문을 열고 달렸다.
쏴아아아아아!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이 장대비를 쏟아냈다.
그 속을 달리는 조제프의 머릿속은 그림자가 내뱉었던 마지막 말을 되뇌고 있었다.
염원해라.
악귀를 죽이고 싶다면.
‘그보다 더한 악귀가 되는 거다.’
조제프의 팔 근육이 부풀었다.
지면으로 내려온 두 손이 땅을 박찼다.
조제프는 짐승처럼 네 발로 달리고 있었다.
콰르릉!
천둥이 쳤다.
그 순간 어둠에 감싸인 풍경이 밝아지며 선명하게 빗줄기가 보였다.
갑자기 몇 배는 발달된 시력에 조제프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저만치 지젤의 집이 보였다.
출입문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갔다.
“꺄아아아악!”
지젤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십여 명의 사내와 알몸이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조제프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지젤 네가…… 네가 어떻게 나에게……!”
“조, 조제프……!”
조제프의 눈앞이 새빨갛게 변했다.
의식하지도 못했다.
조제프는 가장 앞에 있던 사내의 머리를 손으로 쥐고 뽑아 버렸다.
“꺄아아아아악!”
“이, 이런 시발 저게 뭐야!”
“괴물! 괴물이다!”
자신을 가리켜 괴물이라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며 조제프는 허탈하게 웃었다.
괴물. 괴물이라고? 괴물은 바로 너희들이잖아.
트콰악! 콰득! 빠드드듯!
근육과 살점이 찢어지는 소음이 실내를 울렸다.
조제프가 그곳에 있던 모든 인간의 머리를 뽑아내는 덴 수 초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손에 들린 지젤의 머리통을 보며 조제프는 웃었다.
도망치듯 집을 나와 마을을 벗어났다.
“크흑……! 끼헷! 까드드드득……!”
쏟아지는 빗속을 네 발 달린 악귀가 정처 없이 달렸다.
* * *
먹먹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조제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이 불분명하다.
잠시 꿈을 꾼 것인가.
‘지젤.’
조제프의 손엔 지젤의 머리통 대신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고개를 내렸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쓰러진 사내가 보였다.
그래. 날 받아 준 도적단의 두목이었지.
“야만전사야.”
“악귀로군.”
악귀란 사악한 염원, 또는 그런 힘에 물들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자.
‘테헤누트 하토르처럼.’
테헤누트는 불로불사를 꿈꿨다.
그 강렬한 염원은 테헤누트의 자아를 서서히 집어삼켜 마침내 악귀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다르다.
‘인간이 사악한 염원만으로 악귀가 되는 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테헤누트도 악귀로 변모하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저 사내의 나이는 얼핏 보아도 서른을 넘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다.
‘악마의 개입.’
무언가의 목적을 가진 악마가 저 사내의 정신에 개입했다.
영혼의 귀에 속삭여 심연의 어두운 자아를 강제로 끌어냈다.
아틸라는 라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구 아스투리아에서 집단적으로 출몰한 마귀에 이어, 이번엔 대륙 곳곳에서 악귀들이 출현하고 있다.’
원작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던 일.
하지만 상황은 발생했고, 이 시점에서 인위적인 악귀를 만들어 세상에 혼란을 일으킬 목적을 가진 악마라면.
‘메피스토펠레스.’
녀석밖에 없다.
카앙!
악귀의 손톱과 용아귀가 부닥쳤다.
순간적으로 달려든 악귀의 몸놀림에 아틸라는 조금 놀랐다.
예상보다 훨씬 날카로운 공격.
‘그래. 고위악마의 은총을 받은 악귀다 이거냐.’
얼마 전 상대했던 테헤누트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물론 그때의 테헤누트는 완전한 악귀로 넘어가지 않은 상태이긴 했다.
‘악귀는 악귀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강해지니까.’
또한 악귀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잊어간다.
아틸라는 눈앞의 악귀를 노려봤다.
‘녀석은 아인하르트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분명 최근에 악귀로 변모한 거겠지.’
아틸라는 피식 입가를 올렸다.
리베르의 구속을 해방시킬 힘을 지닌 오르피나의 성물.
그것을 찾아 움직일 때마다 방해물이 나타나고 있었다.
‘바토리마저 환각에 빠져들게 한 일리시아의 환술. 사라진 노움 연금술사 파울루. 악귀가 된 테헤누트. 노르드와 아인하르트 간의 전쟁. 거기에 더해 이번엔 고위악마의 은총을 받은 악귀인가.’
마치 누군가 리베르의 구속 해제를 전력으로 방해하는 것 같다.
물론 의심 가는 존재는 있다.
‘김도현 씨.’
오랜만에 그 빌어먹을 꼬마의 얼굴을 떠올린 아틸라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밀려드는 악귀의 손톱을 무휼로 잘랐다.
이어 선풍처럼 몸을 회전시킨 그가 용아귀를 뻗었고, 뼈와 근육이 박살 나는 파열음과 함께 악귀의 목이 몸에서 분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