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105화 (105/425)

105. 악귀 (1)

“무엇을 도와 달란 말이더냐.”

“악귀 소탕.”

“악귀?”

아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테헤누트 하토르가 악귀로 진화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격했었다.

라일이 말했다.

“그렇다. 구 아스투리아에서 집단적으로 출몰한 마귀에 이어, 이번엔 대륙 곳곳에서 악귀들이 출현하고 있다. 수개월 전 브뤼노 백작령 근처에서 엄청난 수의 마귀가 등장했던 건 그대들도 알고 있겠지.”

라일이 말고기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애초에 난 그 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적마탑에서 파견된 몸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아인하르트는 마귀들을 모조리 섬멸한 뒤 아스투리아를 삼켜 버렸지.”

주우욱, 라일이 이빨로 고기를 뜯었다.

미남자가 저러니 저것도 나름 그림이 된다고 아틸라는 생각했다.

“당시 난 아스투리아를 세심히 조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스투리아로 향하는 모든 관문은 막혀 버렸고, 심지어 아스투리아를 흡수한 아인하르트는 노르드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지.”

그때가 생각 나는 듯 라일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이 난 후마이야 왕국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테헤누트 하토르가 금기의 마법에 손을 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역시 적마탑의 누군가는 풀어야 할 숙제였으니까.”

“그러던 중 테헤누트의 부탁으로 기상전에 참여하게 됐다 이건가.”

아틸라는 테헤누트가 악귀로 변했던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라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비슷하다. 그렇게 난 기상전에서 아틸라, 너를 만났다. 그리고 의심했다. 네가 지닌 불가사의한 힘은 일반적인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니까.”

라일이 깔끔히 발라먹은 뼈를 펀치에게 던졌다.

끼아옹! 펀치가 앞발로 그것을 날려 버렸다.

“마치, 마기(魔氣)처럼.”

“내가 마귀들을 불러냈다 생각했던 건가.”

“조금은 의심했었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네가 지닌 힘은 마법이 아니지만 마기 역시 아닌 것 같더군.”

라일이 바토리를 돌아봤다.

직전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이 날카로운 눈빛.

바토리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눈치를 챈 것이더냐.’

라일이 말한 것처럼 아틸라의 신기는 마법이 아니다.

그러나 바토리는 알고 있었다.

아틸라의 신기가 마기와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보통의 애송이는 아니로구나.’

아틸라가 신기를 펼칠 때마다 뿜어지는 독특한 기운은 상당히 미약하다.

바토리조차 처음엔 그것을 어렴풋이 눈치만 챘을 뿐.

오히려 그 기운을 더욱 정확히 감지한 건 슈시아였다.

‘왜 그의 몸에 마력장(魔力帳)을 두른 거지?’

길잡이 숲을 통해 칼날 산맥을 향하던 어느 밤, 슈시아는 물었었다.

그녀의 말대로 바토리는 마력장을 이용해 아틸라가 지닌 ‘어떤 기운’이 방출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직관의 힘을 지닌 슈시아였기에 알아볼 수 있는 일이었다.

‘한데 너도 알아봤단 말이더냐. 적마탑의 애송이.’

바토리는 확신했다.

입으로는 마기가 아니라 말하고 있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라일의 눈빛은 슈시아와 같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바토리의 눈동자에 희미한 살기가 맺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일은 스스럼없이 말을 이었다.

“적마탑은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적마탑의 손길이 닿는 많은 곳에서 악귀들이 출몰하고 있고, 우리들은 놈들의 소탕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더냐.”

“그렇다. 처음엔 파문된 동문이라 생각했지만, 아니더라도 꼭 도움을 받고 싶군.”

“거절한다면?”

“존중하겠다. 그러나 웬만한 일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중앙 마탑이 움직임을 보일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다. 가급적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더는 못 들어주겠군.”

아틸라가 끼어들었다.

“우리에겐 다른 목적이 있다. 마귀 소탕은 네놈들끼리 해결해라. 그걸 위해 그동안 각국에서 지원금을 받아 왔던 게 아닌가.”

아틸라의 말대로.

이단이라 불리는 녹마탑을 제외한 나머지 마탑들은 인접 국가들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을 받고 있다.

“애초에 네 말의 진위 여부도 확인할 수 없고 말이야.”

퍼걱, 용아귀를 바닥에 꽂으며 아틸라가 으르렁댔다.

“헛소리를 들어주는 건 여기까지다. 계속 입을 놀릴 작정이라면 지금부턴 이 도끼와 대화를 해야 할 거야.”

* * *

해가 뜨자마자 라일은 서쪽으로 사라졌다.

그는 몰래 바토리와 한 번 더 접촉을 시도했지만 아틸라의 사나운 눈빛을 보고는 움찔 놀라 몸을 돌렸다.

아틸라와 바토리, 그리고 펀치는 리옹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어이, 야만 미물.”

펀치의 입안에서 도롱뇽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라일이라는 녀석. 잘 쫓아냈다.”

“뭐가.”

“그놈, 아무래도 날 알아본 거 같거든.”

도롱뇽은 지난밤 펀치의 곁에 앉아 있었다.

물론 투명화를 한 채로.

“이몸의 투명화를 간파할 정도면 평범한 놈은 아니다.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아.”

아틸라가 비웃듯 말했다.

“뭐야. 지난번에 샤를도 널 알아봤다면서. 그냥 개나 소나 다 알아보는 잡기술 아니냐 그거.”

“무, 무슨 그런 망발을! 위대하고 지고하신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님의 투명화다! 이몸이 아무리 힘을 잃었어도 아무나 알아보는 허접한 기술은 아니라고!”

도롱뇽의 말대로였다.

녀석의 투명화는 상당한 고급 기술이다.

샤를 정도 되는 실력자이기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녀석조차도 완벽히 꿰뚫어보진 못했을 테지.’

바토리가 나섰다.

“도롱뇽아. 그건 네가 펀치의 식사를 빼앗아먹었기 때문이 아니더냐.”

“뭐라고?”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알겠더구나. 그렇게 고기 조각이 둥둥 떠다니며 네 입모양대로 줄어드는 모습을 본다면 말이다.”

끼아옹! 펀치가 맞장구쳤다.

그러고는 어제의 일이 생각난다는 듯 도롱뇽을 뱉어 낸 뒤 따귀를 날렸다.

“이 빌어먹을 이 곰탱이가!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니…… 꾸에에엑!”

펀치와 도롱뇽이 투닥대는 모습을 내려보며 아틸라는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데비쉬와 한 번 더 마주칠지도 모르겠군.’

살수들은 추적술이 뛰어나다.

말을 타고 거리를 벌리지 않는다면 조만간 조우할 확률이 높다.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던 아틸라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몰라. 오면 걍 죽여 버리지 뭐.’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데비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으슥한 숲길을 지날 무렵, 한 무리의 도적떼가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봐. 가진 거 다 내놓고 가면 목숨은 살려 주지.”

“거기 곰새끼도 두고 가라고. 간만에 곰고기로 포식 좀 하겠군. 으하하하!”

“잠깐. 여자도 있는데?”

바토리의 얼굴을 살펴본 도적들이 히죽 입가를 올렸다.

“여자도 놓고 가라.”

“곰도, 여자도, 다 안 되겠는데.”

아틸라가 우둑우둑, 목뼈를 풀었다.

그리고 말했다.

“말 두 마리를 가져온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도적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저놈이 지금 도적한테 도적질을 하겠다는 건가?”

“이봐! 말 두 마리 있으면 좀 가져오라고!”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있다 해도 진즉 다 잡아먹었지!”

킬킬대는 도적들의 모습을 아틸라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놈들의 복장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전쟁 경험이 있는 놈들이로군.’

그들에게선 전장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피 냄새가 지독한 것을 보니 아인하르트와의 전쟁에 참여했던 자들로 보였다.

‘나라를 위해 싸운 탓에 가세가 기울어 도적이 된 것인가.’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간다.

전쟁 뒤의 궁핍은 귀족보다는 백성들의 몫이다.

“죽여 버려!”

도적들이 달려들었다.

아틸라는 굳이 무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달려드는 녀석의 칼질을 피한 뒤 주먹으로 목을 후려쳤다.

“키헥……!”

녀석의 목뼈가 부러졌다.

부러진 목을 붙잡고 둔기처럼 휘둘렀다.

주위에 있던 도적 두 명이 그것을 맞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뭐, 뭐야 저거!”

“한꺼번에 공격해!”

그때였다.

“자, 잠깐만!”

도적들의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엉성하게 바지춤을 붙잡은 모양새를 보니 용변을 보고 뒤늦게 합류한 도적인 듯했다.

그의 손가락이 아틸라를 가리켰다.

“카, 카자르……!”

“뭐? 카자르?”

“그 카자르 용병단의 카자르?”

사내가 소리쳤다.

“그, 그래! 난 본 적이 있어! 저자가 바로 불패의 용병 카자르다!”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이곳 노르드 동부에서 카자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더구나 도적들은 전쟁에 참여했던 자들이었다.

“이, 이런 시발! 잘못 본 거 아냐?”

“마, 맞아! 카자르는 드워프들을 이끌고 다닌다 들었는데!”

“여자를 데리고 다닌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하나씩 의문점이 드러나며 도적들의 기운은 흉흉한 것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아틸라를 가리키는 사내만은 달랐다.

그는 카자르의 얼굴을 코앞에서 본 적이 있었다.

“으, 으힉! 나, 난 도망갈 거야! 너희들도 목숨 아까운 줄 안다면 도망치는 게 나을걸!”

그러나 사내는 도망치지 못했다.

도적단의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그의 다리를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끄아아아악!”

“어리석은 놈. 저자가 정말로 카자르라면 우린 이미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카자르가 아니라면.”

두목의 눈이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우린 저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지.”

두목의 말에 도적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들 모두는 금품보다는 바토리에게 주목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그래. 저놈이 진짜 카자르라면 우린 여기서 도망치지도 못할 거야.”

“그러느니 두목 말대로 놈을 공격하는 게 나아.”

도적들이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슬금슬금 아틸라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틸라는 무료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아틸라가 아직까지 도적들을 처치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어이 두목. 정말 말 가진 거 없어?”

“없다.”

“그럼 죽어.”

아틸라의 손에 용아귀가 쥐어졌다.

사방을 둘러쌌던 도적들이 아틸라를 습격했다.

아틸라는 그냥 전방으로 뛰어들었다.

수평 방향으로 용아귀를 휘둘렀다.

그 한 번의 공격에 네 명에 달하는 도적의 허리가 절단됐다.

“퓨륵……!”

“푸르뤄러러럭……!”

가공할 공격에 나머지 도적들의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바람처럼 몸을 돌린 아틸라는 포위망을 좁혀오던 도적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도적단의 두목은 할 말을 잃었다.

“저, 저게 무슨……!”

“그것 봐……. 내가…… 카자르라고 했잖아…….”

다리를 다친 도적이 키들대며 말했다.

“이런 병신 같은 새끼를…… 두목이라고 믿고 따른 내가…… 바보지…….”

“다, 닥쳐라!”

발끈한 두목은 도적의 목을 베어 버리려 했다.

그런데 할 수 없었다.

콰드득!

두목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입에서 울컥 핏덩이가 쏟아졌다.

“뭐……, 뭐야 이건…….”

털썩, 두목이 쓰러졌다.

그 위엔 다리를 다쳐 꼼짝도 못 하던 도적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흡사 짐승처럼 기묘하게 허리를 구부린 채로.

투툭. 툭.

고개 든 도적의 눈동자에서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핏물을 머금은 손톱은 송곳처럼 길었다.

그 사이로 조금 전 쓰러진 두목의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치고 있었다.

“병신…… 새끼……. 내가 카자르라고……, 카자르라고 했는데……! 내 말을 귓구멍으로도 안 들어처먹더니 꼴좋구나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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