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아포스톨로스 (2)
“샤를 아인하르트.”
검은 마기가 말했다.
기괴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인간적인 목소리에 샤를은 조금 놀랐다.
마기는 완연한 인간의 형상을 갖췄다.
‘……소년?’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자그만 소년이었다.
눈높이는 샤를과 같았다.
소년의 발이 공중에 떠올라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오. 군신 아레스의 신력이라.”
소년의 차림새는 기괴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특한 복식이었다.
“아아. 신기하죠? 나도 그리 익숙지 않아요, 이런 복장.”
마음을 읽은 것처럼 소년이 말했다.
“다만 지금의 모습엔 이게 어울릴 거 같아서요. 뭐, 특별한 추억이 있는 의복이기도 하고.”
샤를은 말없이 상대를 노려봤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신력을 발하는 자신의 검신.
그것을 소년은 맨손으로 잡아내고 있었다.
“누구냐. 넌.”
“아포스톨로스(Apostolos).”
“그것이 너의 이름인가.”
“아뇨. 그렇진 않아요.”
소년의 입이 생글생글 미소했다.
“아포스톨로스란 나와 같은 존재들, 다시 말해 ‘우리’를 통칭하는 말이라 생각하면 되겠죠.”
샤를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고대의 인간들은 날 이런 이름으로 부르곤 했죠.”
소년의 붉은 눈이 더욱 진한 빛을 머금었다.
“붉은 눈의 귀공자.”
샤를이 비소했다.
“귀공자라. 제법 품위 있는 이름이 아닌가.”
소년도 웃었다.
눈동자를 굴려 샤를의 검신을 바라봤다.
“이제 그만 치워 주지 않을래요? 아레스의 힘을 맨손으로 받아 내는 건 나로서도 부담되는 일이거든요.”
소년을 노려보던 샤를이 검을 거뒀다.
황금빛 신력도 종적을 감췄다.
후우, 한숨을 뱉으며 소년이 자신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검게 타들었던 손바닥이 원래의 빛으로 돌아갔다.
“당신은 예정보다 더욱 강해졌군요. 샤를 아인하르트.”
“예정?”
“물론 그 역시도 이런 결과를 의도한 건 아니었겠죠. 하지만 결국 그 자신이 모든 걸 바꿔 버리고 말았고요.”
“그라면 누구를 말하는 건가.”
“검은늑대의 아틸라.”
샤를의 표정이 지워졌다.
소년의 눈이 초승달처럼 굽어졌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며 샤를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뱀 같은 꼬마 녀석이로군.
“아아, 그땐 정말 놀랐어요. 설마 당신이 내가 소환한 마귀의 진을 뚫고 아스투리아를 점령할 줄은 몰랐거든요.”
샤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스투리아의 브뤼노 백작령 앞을 가로막았던 수많은 마귀들.
놈들을 소환한 것이 자신이었다고, 소년은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신은 벌써 두 번이나 패했더군요. 검은늑대의 아틸라에게.”
“놀리기라도 할 셈인가.”
소년이 과장스럽게 눈동자를 키웠다.
“천만에요. 당신은 결코 그보다 약하지 않으니까요.”
“뭐라고?”
“샤를 아인하르트. 당신은 검은늑대의 아틸라를 쓰러뜨릴 수 있어요. 당신이 그러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로군.”
“당신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겠죠.”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짐승처럼 번들댔다.
“또한 당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것도.”
“불필요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군.”
샤를이 소년에게 검을 겨눴다.
“말해라. 내가 아틸라를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만약 허튼소리로 여겨진다면.”
샤를의 눈에 강한 살기가 서렸다.
“그 나불대는 주둥이부터 잘라내 주지.”
“무모하군요. 샤를 아인하르트.”
미소 띤 소년의 얼굴이 무생물처럼 굳었다.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어.”
소년의 등 뒤에서 마기가 방출됐다.
샤를은 반사적으로 검을 뻗었다.
그의 검에 신력이 어린 것과 소년의 마기가 샤를을 습격한 것은 동시였다.
콰쾅!
샤를의 몸이 주르르 밀려났다.
그 한 번의 공격으로 샤를은 직감했다.
‘아틸라보다 강하다.’
소년 역시 멀쩡하진 않았다.
샤를만큼은 아니었지만, 소년의 몸도 수 걸음 정도는 뒤로 물러나 있었다.
“……호오. 조금 전까진 제대로 힘을 낸 것이 아니었군요.”
소년이 혀를 날름댔다.
붉은 동공이 뱀처럼 좁혀지며 등 뒤의 마기가 길쭉한 촉수의 형상을 갖췄다.
샤를은 강렬한 위험 신호를 느꼈다.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콰쾅!
가공할 충격이 샤를을 강타했다.
온몸의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검으로 방어하지 않았으면 치명상을 입었을 공격.
“과연 요정들의 신기로 벼려 낸 검, ‘듀란달’이로군요.”
“……듀란달?”
소년의 등에서 뻗어 나온 마기의 촉수가 흐릿한 잔상을 그렸다.
그것이 변칙적으로 샤를을 습격했다.
샤를 역시 놀라운 검세를 발하며 촉수를 막았다.
“모르고 있던 건가요. 그건 당신의 어머니가 전해 준 물건일 텐데.”
소년의 말대로다.
샤를의 어머니는 죽기 전 샤를에게 이 검을 맡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몸에서 떼어 놓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이 검이…… 네 핏줄을 증명할 것이란다. 샤를.’
“그 검이 놀라운 마력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었을 텐데요.”
샤를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어머니에게 듀란달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것은 작은 단검 크기에 불과했다.
듀란달은 샤를과 함께 성장하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당신은 목숨을 걸고 그 검을 지켜왔겠죠.”
검이 지닌 특별한 외형 탓에 듀란달을 노린 자들은 많았다.
샤를은 어머니의 유언을 지켰다.
검을 노렸던 이들은 모두 샤를의 손에 죽었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로 당신이 검을 지켜왔던 걸까요?”
소년이 웃었다.
자신의 생각을 읽어 내는 것 같은 소년의 말에 샤를은 얼굴을 구겼다.
아틸라와 겨룰 때 느껴졌던 감각과 비슷하지만, 더욱 어둡고 진득한 느낌.
그러면서 샤를은 인정했다.
‘그래. 어쩌면 그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검의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요.”
소년의 마기가 여러 갈래의 채찍으로 모습을 바꿨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채찍이 쇄도했다.
샤를은 검을 뻗었다.
채찍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시커먼 마기가 불티처럼 튀었다.
“당신은 자신의 몸 안에 얼마나 거대한 힘이 잠자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채찍의 형상이 이번엔 검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소년은 샤를의 코앞에 서 있었다.
“그걸 알지 못하는 건 당신 혼자만이 아니지만 말이죠.”
그렇게 말한 소년의 눈동자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쓸데없는 소릴 내뱉었군요. 방금 한 말은 잊어 주시길.”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있던 소년의 양손이 아래로 풀어졌다.
자그만 두 손에서 짙은 마기가 일렁거렸다.
“지금의 당신이 이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까요.”
소년과 샤를 사이의 공기가 변했다.
위험을 느낀 샤를의 감각이 첨예하게 곤두섰다.
‘선택해야 한다.’
소년의 짐작과 달리, 샤를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흐르는 상반된 두 힘에 대해.
아울러 지금껏 숨겨 왔던 나머지 하나의 힘을 개방할 방법까지도.
“그래. 네놈이 말한 아틸라를 쓰러뜨릴 수 있는 힘이란.”
샤를이 피식 입가를 올렸다.
“이걸 말하는 것이었나.”
샤를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검에서 금빛 신력이 갈무리됐다.
이어 뱀처럼 꿈틀대는 칠흑의 기운이 검날을 뒤덮었다.
소년의 몸이 일순 굳어졌다.
그의 눈이 처음으로 놀라움을 드러냈다.
“당신은……!”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샤를의 손에서 다시금 신력이 방출됐다.
그것은 검신을 뒤덮었던 칠흑의 기운을 순식간에 밀어내며 찬란한 금빛을 발했다.
소년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날 상대로 시간을 끌어선 안 되었다. 꼬마.”
샤를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어둠에 잠식됐던 그의 눈이 눈부시게 푸른 광채를 뿜었다.
당황한 소년은 서둘러 마기를 사출하려 했다.
그 순간 샤를이 검을 내리그었다.
“끄아아아악!”
소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잘린 팔 하나가 털썩, 바닥에 떨어졌다.
거리를 벌린 소년이 샤를을 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절단된 소년의 팔이 연기로 변해 흩어지며 본체로 귀환했다.
“더 해볼 텐가. 꼬마.”
샤를이 검을 겨눴다.
소년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자신을 겨눈 검 끝을 지나, 상대의 오른팔을 노려보던 소년의 입가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당신의 그 팔.”
이내 환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죠. 기대했던 방향과는 다르지만 목적은 이룬 것 같으니.”
소년의 몸이 검은 연기로 화해 흩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엔 기괴한 형상의 새가 되어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재미있게 되었네요 검은늑대의 아틸라. 아니.”
새빨간 눈동자가 쾌락의 감정을 그렸다.
“김도현 씨.”
* * *
하싸씬을 견제할 수 있는 대륙 유일의 암살교단 데비쉬.
그 데비쉬의 마스터 중 하나인 리오넬 뒤퐁의 사망 소식은 데비쉬 교단 수뇌부를 뒤흔들기 충분했다.
“리오넬이 죽었다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대는 사내는 데비쉬의 또 다른 마스터이자 리오넬과는 오랜 견원지간의 실력자, 우마르 알 갈라.
그는 자신의 정보망을 통해 리오넬의 죽음에 관한 단서를 잡았다.
녀석이 ‘삼검’이란 웃기지도 않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노르드와의 전쟁에 참여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샤를 아인하르트. 이번 기회에 만나 볼 수 있겠군.’
리오넬 정도의 살수를 처리할 수 있는 자.
당연하게도 우마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표면적으로나마 리오넬의 주군이 된 샤를 아인하르트였다.
하지만 진실에 근접할수록 우마르는 리오넬을 처리한 자가 샤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샤를 아인하르트가 아니라고?’
녀석이 사주한 것일 수는 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리오넬의 목숨을 취한 건 놈이 아니다.
머지않아 우마르는 카자르라는 정체불명의 용병에 대한 정보를 획득했다.
‘카자르? 처음 듣는 이름이군. 게다가 황금바위 드워프족을 이끌고 다닌다니.’
그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게 없었다.
‘빌어먹을 리오넬.’
우마르는 리오넬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보 수집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카자르라는 전사에 대해 리오넬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카자르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수집해야 한다.’
카자르, 아니 아틸라에 대한 정보가 데비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
그것은 그간 아틸라가 활동해 온 지역이 하싸씬의 힘이 강력하게 미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마르는 자신의 정보력을 총동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카자르가 여자 하나를 일행 삼아 북동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걸 알아냈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자명했다.
‘황금바위산으로 가려는 거군.’
최고의 부하들을 선별한 우마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동했다.
드워프들이 끼어들면 일이 복잡해진다.
‘녀석이 황금바위산에 도달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수일이 지난 후.
우마르와 부하들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의 그림자에 동화되어 있었다.
‘한가로이 사슴 고기나 뜯고 있군. 카자르.’
살수라 불리는 자들.
그들은 은신과 기습에 특화된 전투법을 지니고 있다.
기척을 드러내지 않고, 표적에게 다가가 숨통을 끊은 뒤, 연기처럼 증발.
그것이야말로 살수의 기본자세.
그런데 이상했다.
‘뭐, 뭐지……?’
우마르는 저만치 모닥불 앞의 표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왠지 녀석도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