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아포스톨로스 (1)
천둥을 연상케 하는 굉음.
진동하는 지면 위로 흙먼지가 일었다.
압도적 공세에 직격당한 샤를의 몸이 유성처럼 꽂혔다.
“후우…….”
널브러진 샤를을 보며 아틸라는 긴 숨을 내뱉었다.
아슬아슬했다.
더 시간이 지체됐다면 샤를은 제압 불가능한 상대로 변모했을 것이다.
“폐, 폐하께서…….”
“패배……하셨다고……?”
기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댔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들었다.
“쳐라!”
성난 황소처럼 아틸라에게 달려들었다.
왕국 최강의 기사를 쓰러뜨린 전사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들 모두는 샤를의 충직한 부하이자 동료.
샤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반드시 폐하를 지켜야 한다!”
아틸라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용아귀의 시퍼런 날이 샤를의 목에 겨눠졌다.
“멈춰라.”
밀물처럼 밀려들던 기사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왕 모가지 잘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네, 네놈……!”
기사들의 부릅뜬 시선이 제롬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이곳에서 가장 멀쩡해 보이는 제롬에게 무언갈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제롬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틸……라.”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틸라는 샤를을 내려 봤다.
“샤를.”
“목적이 뭐냐……. 왜 나의 앞을 가로막는 거지…….”
“병력을 물러라. 국경 너머까지 퇴각한다면 이후의 일은 상관하지 않겠다.”
아틸라의 목적은 자비에에게서 황금잔을 받아 내는 것.
그걸 위한 조건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아인하르트 군대를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순간 계약은 완료된다.
‘샤를이 너무 날뛰는 걸 제한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목적은 달성했다.
아틸라는 황금잔을 받아 낼 것이고, 그걸 들고 황금바위산의 지배자 크누트 스톤핸드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모르는 샤를은 아틸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라고?”
“못 알아먹었냐. 병력을 무르라고.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노르드를 돕지 않겠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향후 다시 노르드를 꿀꺽하든 말든 그건 너 알아서 하고.”
* * *
샤를은 퇴각했다.
처음엔 완강히 거부했지만, 피핀과 제롬을 비롯한 부하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리겠다는 아틸라의 으름장에 마지못해 수락했던 것.
“드디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은 게로구나 야만전사야.”
아틸라는 황금잔을 받아 냈다.
황금잔을 넘겨주며 자비에는 어떻게든 아틸라를 자신의 영지에 정착시키려 노력했지만, 아틸라는 거절했다.
“이제 황금바위산으로 갈 셈이더냐.”
“중간에 볼일 좀 보고 나서.”
“드워프들은 왜 먼저 보낸 것이더냐.”
아틸라는 드워프 전사들과 헤어졌다.
이유는.
‘데비쉬의 살수들이 나타날 테니까.’
아틸라는 데비쉬의 마스터, 리오넬 뒤퐁을 죽였다.
사실관계를 파악한 데비쉬의 살수들이 머지않아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드워프 녀석들, 특히 라그나라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나를 도와 데비쉬와 싸울 테지.’
황금바위와 데비쉬 사이에 원한관계가 생기는 건 아틸라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흐응. 알겠느니라.”
“뭘.”
“네가 드워프들을 먼저 보낸 이유 말이다.”
“뭐가.”
바토리가 헤실헤실 웃으며 아틸라를 흘겨봤다.
“나와 단둘이 여행하고 싶어서가 아니더냐.”
이게 또 시작이군.
“아닌데.”
“흐응. 너도 참 부끄럼이 많은 사내로구나.”
아틸라가 으르렁댔다.
“헛소리 그만하고, 한 번만 더 개수작 부렸다간 진짜 머리털 다 뽑힐 줄 알아라.”
“뭐라? 수작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더냐.”
“몰라서 묻냐.”
아틸라가 눈짓으로 바토리의 옆구리를 가리켰다.
“제롬에게 당한 척 개수작 부린 거 말이다.”
바토리의 두 뺨이 달아올랐다.
“차, 참으로 야속하구나!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니니라!”
“하이고. 퍽이나.”
“정말이니라. 정말이란 말이다! 내 얼마나 옆구리가 아팠는지 알기나 하느냐!”
그러면서 바토리는 상의를 빼꼼 들어 올려 옆구리 화상을 보여 줬다.
군살 하나 없는 잘록한 허리를 쳐다보던 아틸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롬에게 맞은 건 반대쪽 같은데.”
“뭐, 뭐라?”
당황한 바토리는 아틸라에게 보이지 않게 반대쪽 옆구리를 살폈다.
그러면서 슬쩍 잡기술을 사용해 가짜 상흔을 남기는 것이었다.
아틸라는 그 모습을 번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걸로 되겠냐? 아예 걍 온몸을 불태워 버리지그래.”
“그, 그게 무슨!”
“잔말 말고 땔감이나 주워 와라. 오늘은 여기서 야영이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말한 것과 달리 아틸라는 바토리를 말에서 내려앉힌 뒤 스스로 땔감을 주워 왔다.
잠시 후엔 자그만 사슴 한 마리도 잡아 왔다.
바토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런 아틸라를 쳐다봤다.
“뭘 봐.”
“좋아서 보느니라.”
아틸라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네가 화염 마법으로 불 피우면 되는 거 아니었냐.”
“딱히 그러고 싶지 않구나.”
“왜.”
“이렇게 땔감을 줍고 손으로 불을 피운다는 것 말이다. 제법 낭만적이지 않느냐.”
“낭만은 개뿔.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는 주제에.”
“날 여기 앉힌 건 네가 아니더냐.”
치이익……! 불이 피어올랐다.
아틸라는 모닥불 위에 손질한 사슴을 올렸다.
그 모습을 얼마간 지켜보던 바토리가 입을 열었다.
“야만전사야.”
“왜.”
“묻고 싶은 게 있느니라.”
“또 뭘.”
“넌 샤를, 그 아이에게 왜 그리 친절한 것이더냐.”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부터 생각했느니라. 넌 샤를뿐 아니라 그 아이의 동료들에게까지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고 있더구나.”
“그런 적 없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아틸라는 사슴을 뒤집었다.
잘 익은 고기 냄새에 절로 입안에 침이 고인다.
“넌 왜 샤를을 해치지 않는 것이더냐.”
“내가 녀석을 죽여 버렸으면 좋겠냐.”
“그런 뜻이 아니니라. 다만 궁금하구나. 네가 샤를과 그 아이의 측근들을 왜 그리 신경 쓰는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바토리의 말뜻을 아틸라는 모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틸라는 수많은 살생을 저질렀다.
심지어 검은늑대 부족에 있던 시절엔 형제인 아이바르와 일레크의 목마저 서슴없이 잘라 낸 아틸라였다.
“내가 보기에 넌 샤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나. 네 형제들에게 느끼는 것보다 더욱.”
“그런 거 없다. 단지 녀석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지.”
“이용? 무슨 이용을 하고 있다는 말이더냐.”
아틸라는 바토리에게 사실을 말해도 될지 잠시 생각했다.
“요정섬.”
“요정섬?”
“그래. 난 요정섬을 찾을 거다.”
“요정들을 만나려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대답 없는 아틸라에게 바토리가 다시 물었다.
“일전에 내게 물었던, ‘다른 세계’로 이동할 방법에 관한 것이더냐.”
“그래.”
“요정들의 성역은 인간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하지만 샤를은 찾을 수 있지.”
바토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역시 너도 눈치채고 있었던 게로구나. 그 아이의 핏줄에 대해.”
아틸라는 장작 하나를 불 안에 집어넣었다.
화륵, 불티가 날아올랐다.
“그래서 샤를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더냐.”
“그래.”
“샤를을 노르드 국경 너머로 퇴각시킨 이유는 무엇이더냐.”
바토리의 궁금증은 타당한 것이었다.
“동부 전선의 퇴각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니었더냐.”
“물론 자비에는 그 정도 조건만으로도 나와의 계약을 수락했겠지.”
“그런데 왜.”
“샤를이 요정섬을 찾으려면 내 예정대로 움직여 줘야 하니까.”
바토리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치 넌 샤를, 그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훤히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구나.”
“알아. 대략적인 것은.”
아틸라는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샤를의 행보는 원작을 벗어났다.
그것을 상기하며 아틸라는 벌컥벌컥 술병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던 바토리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고, 아틸라는 술병을 넘겨주었다.
“하아…….”
두 손으로 병을 쥐고 몇 모금을 마신 바토리의 얼굴에 홍조가 맺혔다.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입술이 매력적인 미소를 그렸다.
“정말 그뿐이더냐.”
바람이 불었다.
“네가 샤를을 해치지 않는 이유가.”
장작에 불이 번졌다.
모닥불이 한들한들 춤을 추었다.
품으로 파고드는 펀치의 따스함을 느끼며 아틸라는 샤를을 처음 봤던 날을 떠올렸다.
오토와 세 기사를 데리고 금사자 용병단을 기습했을 때.
먼발치에서 바라봤을 뿐이지만, 그날 아틸라의 가슴은 터질 것처럼 뛰었었다.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며 새로운 세계로 융합하는 듯한 신비로운 감각.
‘지구에서 늘 꿈꿔왔던 것처럼.’
지구에 있던 시절의 아틸라는.
아니 김도현은.
현실을 살고 있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어린 시절의 그에겐 아버지가 있었다.
빛바랜 종이처럼 희미한 기억일 뿐이지만, 그때는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종적을 감췄고, 어머니는 병을 얻었다.
김도현은 가장이 되어야 했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힘겹게 번 돈과 각종 지원금을 더해도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순 없었다.
‘어머님의 병은 전례가 없는 희귀질환입니다.’
희망 없는 나날이 모래알처럼 흘렀다.
김도현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글 다운 글을 써 본 적이 없었건만 그는 소설의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샤를 아인하르트.’
그래.
‘주인공의 이름은 샤를 아인하르트다.’
마법처럼 떠오른 이름이었다.
이름을 떠올리자 샤를의 굴곡진 인생이 영화처럼 머릿속에 차올랐다.
가장 빼어난 마력을 지닌 종족, 요정.
한때는 신이었으나 주신의 울타리를 벗어나며 타락의 길을 걷게 된 악마.
샤를은.
요정과 악마의 피를 함께 지니고 태어났다.
‘샤를의 몸엔 두 가지 상반된 피가 흐르고 있다.’
김도현은 샤를에게 자신을 투영했다.
샤를의 아버지는 샤를이 태어나자마자 그를 버려 두고 떠났다.
샤를의 어머니는 자신이 가졌던 힘을 모두 강탈당한 채 샤를과 함께 인간 세계로 추방됐다.
‘인간 세계로 떨어진 샤를의 어머니는 머지않아 병을 얻었다.’
그리고 너무나 무력하게도.
‘한낱 인간의 창칼에 목숨을 잃었다.’
샤를은 어린 나이에 전쟁고아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검을 들었다.
생존의 욕구를 뛰어넘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로 했다.
그에겐 꿈이 있었다.
‘나는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샤를은 패왕의 길을 택했다.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럼에도 샤를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검을 들고, 동료를 모으고, 세상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위대한 일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나는 보다 강한 힘을 갈구한다.’
온 세상을 내 발아래 무릎 꿇릴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죄악이라도 달게 받아들일 것이다.
파지지짓!
휘두른 검에서 금빛 신력이 방출됐다.
밤하늘의 별을 지워 낼 만큼 강렬한 광채.
샤를은 왕궁의 연무장에 서 있었다.
그의 몸은 흘러내린 땀으로 범벅이었다.
달은 점차 아래로 기울었다.
‘나는 패했다.’
샤를은 검을 휘둘렀다.
‘또다시. 아틸라에게.’
검을 휘둘렀다.
오직 검을 휘두르는 소리만이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 샤를의 눈빛이 변했다.
어둠을 향해 검을 뻗었다.
카앙! 날붙이 부딪는 소음이 허공을 울렸다.
“누구냐.”
상대의 모습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검은 마기가 샤를의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마치 시커먼 안개가 인간의 형체로 변하고 있는 듯했다.
마기는 점점 더 형상을 갖췄다.
그 안에서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샤를을 향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