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패왕의 반격 (1)
지금은 아인하르트로 국명을 바꾼 아스투리아 왕국.
그곳엔 ‘삼검(三劍)’이라 불리는 최강의 세 기사가 있었다.
‘아스투리아의 삼검은 대륙 제일이다!’
‘그중에서도 최강자는 누가 뭐래도!’
일검.
흑곰 기사단의 단장.
기욤 마르텡!
‘아니지! 흑곰 기사단장보다 뛰어난 이가 있잖아!’
‘맞아! 직위는 아래지만 진정한 최강자는 바로!’
이검.
흑곰 기사단의 돌격대장.
얀 베르나르!
‘무슨 소리! 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실전 경험을 지닌 최강자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둘의 그늘에 가려 있지만 실질적인 왕국 최강자는 따로 있다!’
삼검.
최근 기사 작위를 수여받아 귀족이 된 들개 용병단의 단장.
리오넬 뒤퐁!
‘삼검이 힘을 합치면 두려울 상대가 없다!’
‘삼검이 힘을 합친다고?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일검과 이검은 몰라도 삼검까지?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기욤 마르텡.
얀 베르나르.
리오넬 뒤퐁.
세 전사가 왕국을 침략한 거대한 적을 상대로 힘을 합쳤다.
침략자의 이름은.
‘아스투리아 왕국을 지켜라!’
‘검을 들어라! 저 천인공노할 침략의 군대를 물리쳐라!’
불패의 패왕.
샤를 아인하르트!
‘저렇게도 강한 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무적자 타리엘 페살라스를 쓰러뜨렸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등을 보이지 마라! 목숨을 바쳐 왕국을 수호하라!’
삼검은 온 힘을 다해 샤를에 맞섰다.
그러나 샤를의 무력과 지휘력은 압도적인 것이었고.
‘우, 우리 군세가 완전히 밀리고 있습니다!’
‘아인하르트의 병사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피핀과 제롬의 협공은 이들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피핀 에드발이라고? 저 정도의 검술을 사용하는 자가 샤를 아인하르트 말고 또 있었다니!’
‘저 마법사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네놈들이 아스투리아의 삼검인가.’
삼검을 쓰러뜨린 샤를이 검을 겨누며 말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아인하르트의 깃발 아래 이전과 같은 권세를 누리게 해 주겠다.’
삼검은 샤를에게 무릎 꿇었다.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샤를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했다.
‘새로운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삼검은 샤를의 세 자루 검이 되었다.
그리고 노르드 왕국을 침공하는 데 앞장서며 엄청난 공적을 세웠다.
그러던 중.
“도살자?”
“들어본 적 있습니다. 분명 발루아 왕국 출신의 용병이라고…….”
삼검은 샤를의 명에 의해 동부 전선으로 급히 이동 중이었다.
임무는 샤를이 당도하기 전까지 카자르의 군대를 막아 내는 것.
“도살자라면 같은 용병 출신인 내가 잘 알고 있소.”
기욤과 얀의 대화에 리오넬이 끼어들었다.
출신과 직위는 달랐지만, 샤를에게 편입되며 삼검은 동등한 부장군이 되었다.
“호오. 리오넬 부장군께서 그자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군.”
“설명을 부탁하지.”
그러나 왕국 기사단 출신인 기욤과 얀은 은연중에 리오넬을 무시했다.
그것은 조금 전의 어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고, 리오넬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도살자는 발루아 왕국 가스코뉴 공작령의 오동나무 용병단 출신이오. 직책은 돌격대장. 그곳의 단장인 철혈귀검 또한 대단한 실력자로 알려져 있지.”
“철혈귀검이라. 그 이름은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군.”
“저 역시 그렇습니다.”
“두 부장군께선 트롤 학살자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소?”
리오넬의 물음에 기욤과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워낙 유명한 이야기지.”
“그 트롤 학살자가 도살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정보가 있소.”
기욤과 얀의 표정이 변했다.
“뭐? 도살자가 트롤 학살자와 동일인이라고?”
“트롤 학살자에 대한 소문은 다소 부풀려진 것으로 알고 있네만…….”
“그뿐만이 아니오.”
리오넬의 눈이 빛났다.
“그가 무적자 타리엘 페살라스마저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있소. 믿을 만한 정보통을 통한 내용이니 틀림없을 거요.”
기욤과 얀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무적자 타리엘 페살라스를?”
“그게 사실이란 말이오?”
리오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욤과 얀은 자신들이 동부 전선으로 향하는 이유를 다시금 상기했다.
‘대장군 피핀 에드발이 카자르에게 당했다.’
‘카자르의 정체는 도살자.’
기욤과 얀은 피핀과 직접적으로 검을 맞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심 피핀을 무시하고 있었고, 그가 카자르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별달리 긴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자르가 타리엘을 쓰러뜨린 게 사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트롤을 쓰러뜨린 것 또한 과장이 아닐지도.’
기욤과 얀은 눈빛을 교환했다.
카자르를 만나면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장.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분명 그랬었는데.
“크허어억……!”
마침내 전선에 도착해 흙먼지 가득한 전장 위를 달리던 기욤은 자신의 잘린 오른팔을 내려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쏟아지는 핏물.
여전히 몸의 일부인 것처럼 꿈틀대는 다섯 손가락.
힘없이 놓아 버린 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선 우람한 덩치의 사내.
그가 입을 열었다.
“기욤 마르텡.”
“네놈…… 설마 이반을 쓰러뜨렸던……!”
기욤은 아틸라를 알아봤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날 것 같다는 예감은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결코 원치 않는 방향으로.
“그래. 그게 나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는 샤를이 왜 삼검을 먼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죽이라는 거군.’
삼검은 샤를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그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샤를의 밑에 오래 있을 자들이 아니다.
‘그걸 간파했다는 건가. 지금의 샤를은.’
다시금 아틸라는 현재의 샤를이 원작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감각했다.
그러나 샤를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래.’
그의 눈이 바닥에 주저앉은 얀과 리오넬을 차례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 한 곳에 고정됐다.
‘녀석에 대해 샤를은 모르고 있지.’
왼손으로 검을 뽑아든 기욤이 아틸라에게 달려들었다.
때맞춰 몸을 일으킨 얀이 반대편에서 공격했다.
수년간 흑곰 기사단에서 합을 맞춰 온 두 기사의 그림 같은 협공!
“이번엔 막을 수 없을 거다! 카자르!”
“지랄은.”
아틸라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몸을 회전하며 풍차처럼 용아귀를 휘둘렀다.
근육과 뼈가 찢기는 사실적인 감각과 함께 얀의 가슴이 갑옷째 절단됐다.
“푸르…… 푸르르러럭……!”
인간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기괴한 신음을 뱉으며 얀의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절단면에서 시뻘건 내장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기욤이 부릅뜬 눈으로 올려봤다.
말 그대로 그는 올려 보고 있었다.
얀보다 한발 앞서 절단된 그의 머리는 진즉부터 바닥을 뒹굴고 있었으니까.
“얀…….”
대답은 없었다.
힘없는 목소리가 몇 차례 더 얀을 불렀지만 길지 않았다.
아틸라는 리오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틸라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나.”
고개도 돌리지 않고 용아귀를 뻗었다.
측면으로 쇄도하던 리오넬의 검이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막혔다.
“음흉한 새끼. 약한 척하기는.”
아틸라는 눈동자만을 굴려 리오넬을 바라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길게 입을 찢어 웃는 리오넬.
녀석의 얼굴이 흐릿해지며 모습을 감췄다.
그건 보통의 전사들이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과연, 하싸씬의 마스터 출신답군.”
리오넬이 사용한 기술은 소멸.
지난날 사바흐가 카스피에게 전수해 줬던, 하싸씬의 1급 살수 이상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급 기술.
“호오. 내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건가.”
“물론. 네놈이 ‘데비쉬’에서 제법 요직을 맡고 있다는 것 역시도.”
데비쉬(Dervish).
대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암살교단 중에서 하싸씬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
그들은 하싸씬을 뛰어넘기 위해 많은 수단을 강구했다.
그중 하나가 하싸씬의 마스터를 자신의 교단으로 끌어들이는 것.
리오넬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네놈, 정체가 뭔가.”
“나에 대한 건 알만큼 알고 있을 텐데.”
리오넬은 표면적으론 용병 일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데비쉬의 정보 관리자다.
그리고 데비쉬의 정보력은 하싸씬에 밀리지 않는다.
둘의 무기가 다시 한번 맞부딪쳤다.
“샤를에게 접근해 무얼 할 생각이었나.”
“너야말로 알만큼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카자르.”
물론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리오넬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아니지. 대족장 문주크의 아들, 검은늑대의 아틸라.”
휘리리릭!
리오넬의 몸이 질풍처럼 회전했다.
그가 입고 있던 갑옷이 증발하며 검붉은 살수복이 드러났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정체를 드러내도 되는 거냐?”
용아귀의 옆면이 방패처럼 세워졌다.
회전하는 리오넬의 몸에서 암기가 쏟아졌기 때문이었고,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아틸라는 빠짐없이 그것들을 튕겨 냈다.
“어차피 근처의 부하들은 네놈과 드워프들이 전멸시키지 않았나.”
리오넬이 이죽대며 답했다.
그의 말대로 두 전사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저 멀리 병장기 부딪는 소음만 아련하게 들려올 뿐.
“네놈의 부하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삼검이 이끌고 온 병사 중 상당수는 데비쉬의 살수들이었다.
일반 병사인 기욤과 얀의 부하들은 라그나를 위시한 드워프들이 맡았다.
자연스레 이곳은 리오넬의 부하인 데비쉬 살수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이 모든 것은 라그나에게 귀띔을 해 둔 아틸라의 계획이었다.
“너 스스로가 노린 일이 아니던가. 검은늑대의 아틸라.”
리오넬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내는 서로의 속을 들여다보며 둘만이 남게 될 순간을 기다렸고, 그것이 이뤄졌다.
“네놈이 샤를 아인하르트를 꺾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덤비는 거냐.”
“문제라도 있나.”
“샤를이 어느 정도의 강자인지는 잘 알고 있을 텐데.”
혀끝을 날름대며 리오넬이 답했다.
“물론 샤를 아인하르트는 강하다. 나 정도의 살수조차 그를 쓰러뜨리지 못할 만큼. 그러나.”
“그러나?”
“그때의 샤를과 지금의 샤를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재미있군.”
“지금 네가 그와 다시 맞붙는다면, 지난번과 같은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란 말이지.”
아틸라는 송곳니를 내보이며 웃었다.
공기 중으로 녹아든 리오넬의 몸이 후면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
물론 리오넬은 아틸라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이것으로 끝이다. 검은늑대의 아틸라.’
리오넬은 자신했다.
하싸씬의 절기, 소멸을 응용해 만든 자신만의 기술.
‘지금껏 이 기술을 피해 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간과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기술을 만들어 낸 건 자신이 아니었다.
바로.
“패영전 원작자인 내가 만든 거다.”
혼신의 힘을 다해 뻗은 검이 허공을 찌르는 것을 감각하며 리오넬은 현실을 부정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금 전까지 등을 내보이며 서있던 아틸라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 어디로! 어디로 사라진 건가!’
“위다.”
나직이 깔려 드는 목소리에 리오넬은 고개를 들었다.
내리쳐지는 도끼날이 정수리를 지나 두 다리 사이를 통과했고, 반으로 조각 난 그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무너졌다.
사흘 뒤 샤를의 부대가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