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카자르 용병단 (3)
머지않아 아틸라 일행은 네 번째 성의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성의 방어는 놀랍도록 단단했고, 아틸라와 드워프들은 지금까지처럼 손쉽게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유는 있었다.
적군의 지휘를 맡고 있던 것은 피핀이었다.
“오늘도 무식하게 강행돌파야?”
보에몽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 역시 대장군 피핀의 명성은 익히 들었다.
“아니. 놈들이 나올 거다.”
지난번, 성을 타격하기 전부터 상대 진영에 피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아틸라는 굳이 무리하지 않았다.
피핀은 지금까지와의 적과 다르다.
섣불리 움직인다면, 자신은 몰라도 드워프들은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혹여 피핀이 날 알아봐도 곤란하고.’
아틸라는 샤를과 조우하기 전에 최대한 아군의 사기를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난번엔 적당히 성을 공격하다 후퇴했다.
아틸라는 자신의 예감을 믿었다.
‘피핀은 방어로 만족하지 않는다.’
기울기 시작한 흐름을 되돌리고 공세로 전환하려면 힘으로 상대를 부숴야만 할 테니까.
“그래서 병력을 빌려온 거다.”
아틸라는 자비에에게서 빌려온 병력과 함께 야영지를 만들었다.
성의 관측이 가능하면서도 가급적 멀리 떨어진 곳으로.
아틸라는 이곳에서 적당히 진을 치고 상대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 보조 스킬, 전술 탐지가 활성화됩니다. ]
‘적당히 고민하고 들어와라. 피핀.’
피핀은 영웅의 면모를 개화했을 것이다.
원래부터 피핀은 샤를의 영향을 받아 영웅이 되는 등장인물.
지금의 샤를은 원작보다 빠르게 성장 중이기 때문에, 피핀 역시 영웅에 다다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영웅 등급에 들어선 등장인물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지.’
또한 아틸라는 확신했다.
제롬 역시 영웅의 반열에 올라섰을 것이라는걸.
‘샤를의 오른팔과 왼팔이 힘을 합쳐온다 이건가.’
아틸라는 바토리를 통해 피핀과 제롬이 함께 움직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틸라의 입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예상대로다.’
피핀 에드발.
그리고 제롬 아그리피나.
원작에서도 둘의 호흡은 상당했다.
샤를이 선두에 서고, 그를 보조하며 피핀과 제롬이 효율적으로 적들을 섬멸했다.
아울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수를 펼치는 초특급 살수 카스피까지.
‘그러고 보니 카스피 녀석은 뭘 하고 있는 거지.’
아틸라는 피핀과 제롬의 참전 소식을 들으며 바토리에게 물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언제부턴가 카스피는 반지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는다고 한다.
분명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겠지.
‘오토는 뭔 고생이냐.’
녀석의 성격상 저만 살겠다고 카스피를 떠날 리 없다.
분명 죽을 고생을 수없이 겪고 있을 터.
아틸라의 입가가 올라갔다.
‘제법 강해졌겠군.’
* * *
피핀의 기습은 한밤중에 벌어졌다.
“저, 적습이다!”
아틸라는 적들이 눈치챌 것을 우려해 자비에의 병사들에겐 적의 습격을 예고하지 않았다.
대비하고 있던 건 아틸라와 드워프들뿐.
“크헉……!”
“끄아아악……!”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 명의 병사를 아틸라는 도끼질 한 번으로 제압했다.
여섯 드워프도 각자의 자리에서 적들을 상대했다.
라그나가 말했다.
“적들의 기세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군.”
“피핀의 정예부대니까.”
핏물 가득한 투구 속에서 아틸라가 답했다.
그간 동부 전선에서 싸우며 아틸라는 눈동자만을 드러낸 투구를 쓰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지금까지는 알아보는 상대가 없었다.
하지만 피핀마저 속일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약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테지.’
“간다.”
아틸라의 지시에 여섯 드워프가 적병의 무리를 향해 달렸다.
도끼가 휘둘릴 때마다 피와 살점이 튀어 올랐다.
그들과 함께 적을 쓰러뜨리던 아틸라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 * *
피핀은 전장을 종횡무진하는 여섯 드워프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부관이 말했다.
“역시 황금바위 드워프족. 우리 병사 서넛이 힘을 합쳐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서넛이 아니라 열 명이 덤벼도 힘들 것 같군.”
부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들을 이끄는 인간 전사가 보이지 않는군.”
그렇게 말하는 피핀의 눈은 여섯 드워프의 전투를 끊임없이 좇고 있었다.
‘확실히 강하다.’
가장 덩치가 작은 녀석 하나는 그리 위협적인 모습이 아니었지만, 나머지 다섯은 달랐다.
피핀의 눈이 가늘어졌다.
‘특히 저 붉은 수염을 지닌 자.’
피핀은 그의 정체를 예상하고 있었다.
‘황금바위의 붉은 수염.’
크누트의 오른팔이자 황금바위 드워프족의 이인자.
라그나 크림슨비어드.
피핀의 입가가 위를 향했다.
“작전대로 진을 움직여 에워싼다.”
“드워프들을 상대할 기사들도 작전대로 배치하겠습니다.”
“붉은 수염은 제외해라.”
“그게 무슨…….”
놀란 얼굴의 부관에게 피핀이 답했다.
“녀석은 내가 잡는다.”
그러고는 말을 달리며 소리쳤다.
“전군! 날개 대형을 펼친다!”
역시 피핀의 정예 부대였다.
조금 전까지 눈앞의 상대에만 집중하던 그들이었지만.
두두두두두두.
명령이 닿자마자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상대하던 자비에의 병사들이 당황할 정도.
“뭐, 뭐야!”
“후퇴하는 건가?”
“아니야! 뭔가 심상치 않다!”
자비에의 병사들이 지휘관을 돌아봤다.
그러나 병사들을 이끌고 온 지휘관은 무능했고, 갑작스레 벌어진 돌발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겁먹을 거 없다! 그대로 돌격해!”
“하, 하지만!”
“네 이놈! 전장 한복판에서 명령 불복종인가!”
노한 지휘관이 검을 뽑아들었다.
“돌격해라! 도망치는 자는 내 즉시 목을 베리라!”
지휘관은 그동안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매번 운 좋게 도주에 성공해 목숨만은 건졌지만, 그 탓에 ‘도망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생겨난 상태.
‘이 내가, 가문의 수치가 되다니.’
그러던 중 천운이 찾아왔다.
불패의 명성을 이어 가는 카자르 용병단과 함께 전장에 나서게 된 것.
‘카자르와 함께 하는 전장이라니! 이번 전투는 이긴 것이나 진배없다!’
그는 흥분했다.
이제야 도망자라는 오명을 벗고 승리자의 옷으로 갈아입을 때가 온 것이다.
‘후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지휘관의 눈이 드워프들을 향했다.
그들의 무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고작 여섯 명일 뿐이지만 자신들의 수 배에 달하는 병력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는 모습.
아니 밀리지 않는 것뿐 아니라 서서히 압도하고 있었다.
‘저 드워프들이 있다면 상대가 무슨 계략을 꾸민대도 소용없다.’
드워프들의 무용은 그로 하여금 그런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간과하고 있었다.
저들을 상대하는 자가 다름 아닌 피핀 에드발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카자르는 어딜 간 거지.’
그 즈음의 그는 이런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잠시 후 피핀의 지휘 아래 자신들이 얼마나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될지 알지도 못한 채.
그리고 시작됐다.
“우측 날개를 접어라!”
적 진영이 먹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자비에의 병사들과 드워프들이 저항을 시작했다.
“밀리지 마! 몸으로 버텨라!”
“방패로 막고 검을 찔러 넣어!”
“창병대!”
“우와아아아아!”
자비에의 병사들은 창검을 들어 적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상대는 거대한 쇠방패를 들어 자신의 몸을 방어했고, 멈추지 않는 전차처럼 힘으로 밀고 들어왔다.
“좌측 날개는 북북서 방향으로!”
피핀이 다시금 외쳤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라, 라그나!”
점처럼 응집해 있던 여섯 드워프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들 사이로 쇠방패의 병사들이 창날처럼 밀려들었던 것.
“함정이다! 모두 피해!”
“함정인 건 나도 알아 노틀링! 너나 잘 피하라고!”
“이 와중에도 누가 옳다고 따질 셈이냐 골든핑거!”
“시시비비는 가려야지! 안 그래? 락포트!”
“미친놈들! 말싸움은 살아남은 뒤에나 하라고! 음핫핫핫하!”
드워프들은 넉살 좋게 그런 말이나 늘어놓고 있었지만 내심으론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뭔진 몰라도 위험하다.’
‘마치 사냥감을 몰듯 우릴 몰아가고 있다.’
드워프들은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피핀의 정예부대는 고도로 숙련된 진법을 펼치며 악착같이 버텨 냈다.
“빌어먹을. 이거 쉽지가 않은데!”
“이봐 라그나!”
“데인로! 락포트!”
“우라질! 들리지 않는 모양이군!”
드워프들은 점점 더 동료들과 떨어져 고립되기 시작했다.
우세를 느낀 피핀의 병사들이 소리쳤다.
“조금만 더 버텨!”
“고작 드워프 여섯의 힘일 뿐이다!”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
“우와아아아!”
결국 진법은 승리했다.
여섯 명의 드워프는 적병들의 진에 완전히 갇혔다.
잠시 후 피핀의 가장 뛰어난 부하 다섯이 각각의 드워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건.”
“결투라도 해볼 셈인가.”
다섯 개의 전장에서 다섯 명의 기사가 검을 뽑았다.
그들의 검이 각자의 타깃을 겨눴고, 바람처럼 쏘아졌다.
파캉!
그리고 라그나 앞에 등장한 자는.
“네 상대는 나다. 황금바위의 붉은 수염.”
대장군 피핀.
“자네가 이 오합지졸의 수장인가.”
라그나의 말에 피핀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글쎄. 누가 오합지졸인지는 곧 밝혀지겠지.”
“나를 상대할 수 있다 생각하는가.”
“물론.”
피핀의 검이 뱀처럼 날아들었다.
라그나의 도끼가 그것을 받아쳤다.
* * *
‘이, 이 녀석 뭐야!’
보에몽은 당황했다.
눈앞에 나타난 사내.
그는 지금까지의 적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어느새 무기를 내던진 녀석들은 양손으로 방패를 쥔 채 오직 버티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공격은 포기한 건가?’
그럴 리 없다.
일부러 적진까지 달려와 기습을 시도한 이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그러는 사이 아군은 점점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좌측 날개와 우측 날개가 한껏 펼쳐졌다가 접힐수록 더욱 군집됐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저, 저기!”
그 순간 자비에의 병사들은 마법에라도 취한 것처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저, 저건!”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붉은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빛은 더욱 커지며 엄청난 양의 증기를 사방으로 내뿜었다.
난생처음으로 보는 불가해한 광경이었지만 병사들은 저게 무엇인지 충분히 직감할 수 있었다.
“마법!”
“마법사다!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저자가 바로……!”
“전장의 사신! 제롬 아그리피나!”
퍼어어어엉!
언덕 위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쏘아졌다.
그것은 둥글게 군집한 병사의 무리 정중앙으로 하강을 시작했고, 그 가공할 광경에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으아아아아!”
“사, 살려줘!”
“비켜! 비키라고!”
“으히이이익!”
병사들은 날개의 진을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피핀의 방패병들이 그것을 막았다.
병사들이 울먹이며 외쳤다.
“빌어먹을……! 제롬 아그리피나가 나타나다니……!”
“우린 죽었어! 모두 죽은 목숨이라고!”
그러는 사이 불덩이는 머리 위까지 근접했다.
그렇게 병사들의 공포심이 극에 치달은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기를 감쌌다.
“스쿠트흠 데 이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