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황금바위산의 드워프 (4)
라그나는 보았다.
‘함께 뛰어올랐다고?’
상대 역시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다.
그리고 깨달았다.
조금 전의 상황.
그건 기회가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천둥벼락을 사용하게 했다는 건가!’
입을 찢어 웃는 상대의 얼굴이 극적으로 가까워졌다.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천둥벼락의 파훼법.’
그것은 기술의 시전자가 지면에 도달하기 전, 그러니까 공중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 정면 승부를 거는 것.
‘그때가 바로 천둥벼락의 위력이 가장 약한 순간이다.’
물론 그 순간에도 천둥벼락은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자랑한다.
즉, 이건 초인적인 용력과 민첩성을 지닌 아틸라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이걸로 끝이다!”
짓누르듯 용아귀가 내리쳐졌다.
그것을 막기 위해 라그나는 도끼를 위로 뻗었다.
콰아아앙!
우레 같은 폭음이 하늘을 울렸다.
도끼째로 용아귀에 가격 당한 라그나의 몸이 벼락이 되어 바닥에 꽂혔다.
“크으으윽……!”
라그나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강렬한 충격이었지만 그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나는…… 아직…….”
라그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그 모습을 보며 보에몽이 내뱉었다.
“말도…… 안 돼…….”
라그나는 아버지인 크누트 스톤핸드를 제외한다면 누구도 당해내지 못하는 전사다.
심지어 아틸라는 라그나만을 상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네 명의 최상급 전사를 쓰러뜨렸다.
“혼자서…… 다섯 명을…….”
쓰러진 라그나를 내려 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거 갑옷 한 번 좋네.”
플레이트 아머는 용아귀의 공격으로부터 제 주인을 지켰다.
물론 원래의 형상을 잃고 다소 찌그러지긴 했지만.
“정말로……, 정말로 다섯 전사를 이겼다고……?”
보에몽은 얼빠진 얼굴로 아틸라를 쳐다봤다.
바토리가 그것 보라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내 말하지 않았더냐.”
* * *
라그나와 나머지 전사들은 패배를 인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빛은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자네와 크누트의 결투를 꼭 한 번 보고 싶군.”
“황금바위산 근처에 오거든 잊지 말고 들러주게. 내 최고의 맥주를 대접하지!”
“그 도끼는 대체 뭔가. 드워프의 솜씨가 아닌데도 그렇게나 강력한 무기라니. 인간들의 대장 기술도 많이 발전한 모양이군.”
“그러게나 말이야! 라그나의 플레이트 아머가 아주 걸레 조각이 됐어. 음핫핫핫핫하!”
드워프는 단순하다.
육체의 힘을 숭배하는 그들은 강한 전사를 존경하고, 대접한다.
‘그것에 종족의 차이 따위는 없지.’
일족끼리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엘프와 달리 드워프는 다른 일족과도 스스럼없이 지낸다.
“이봐 라그나. 갑옷 좀 벗어 보라고. 내 되는 대로 고쳐 볼 테니까.”
골든핑거는 수리 기술이 빼어나다.
라그나는 군말 없이 갑옷을 벗어 골든핑거에게 건넸다.
망치를 꺼낸 골든핑거가 땅땅, 망치질을 하며 갑옷의 파인 부분을 수선했다.
“호되게도 처맞았구먼. 이봐 라그나! 어디 뼈 부러진 데는 없나?”
“없으니까 그만 나불대고 갑옷이나 고쳐. 넌 주둥이로 망치질하냐.”
라그나가 킬킬대며 웃었다.
골든핑거도 웃었다.
나머지 드워프들도 큰 소리로 웃으며 각자의 무기 보수를 시작했다.
드워프 전사들 사이에선 익숙한 풍경.
“자, 그럼 샤를 아인하르트를 제거하러 가자! 우리 일곱 전사가 힘을 합친다면 녀석의 목을 따는 건 일도 아닐 거야!”
보에몽이 신나 소리치는 가운데 아틸라는 고민했다.
라그나를 포함한 다섯 드워프 전사는 아틸라와의 결투 전, 바위의 맹세를 했다.
자신이 질 경우 보에몽과 함께 샤를에 대항해 싸우겠노라고.
‘말려 봐야 먹히지도 않을 테지.’
바위의 맹세는 황금바위 드워프족에겐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갖는다.
크누트의 명령보다도 상위에 있다는 이야기.
역시나 드워프들은 왕의 명령 따윈 까맣게 잊은 채 전쟁 이야기에 한창이었다.
“샤를 아인하르트가 타리엘을 이겼다는 소문이 있던데.”
“뭣이? 그게 사실이냐 보에몽.”
“내가 분명 들었어. 술집의 인간족들이 떠들고 있더군.”
“호오. 이거 재밌군. 녀석과 꼭 한번 겨뤄 보고 싶은데.”
“나도.”
“나도 싸워 보고 싶군.”
“내가 먼저야.”
“아니 내가 먼저.”
‘곤란해졌군.’
자신이 먼저 샤를을 상대하겠다며 무기를 뽑아드는 드워프들을 보며 아틸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누가 뭐래도 저들은 전장으로 향할 거다.
게다가 라그나가 포함된 드워프 전사들의 전력은 상당하기 때문에 금세 유명세를 탈 테고.
그렇게 되면.
‘샤를이 직접 나설 테지.’
결과는 뻔하다.
‘전멸.’
지금의 샤를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타리엘을 이길 정도면 적어도 크누트와 동급은 된다는 거지.’
게다가 샤를은 아스투리아를 정복했다.
녀석의 상대가 될 만한 전사가 아스투리아 진영에 있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럼에도 착실히 쌓은 전투 경험은 샤를의 실력을 더욱 안정적으로 상승하게 만들었을 거다.
그리고.
‘샤를이 지닌 싸울수록 강해지는 특성.’
라그나 정도의 전사와 맞붙는다면 분명 그 능력이 개화할 거다.
‘이쯤에서 한 번 더 끊어 줘야 하나.’
아스투리아를 점령한 샤를의 다음 예상 행보는 다음 셋 중 하나였다.
첫 번째는 정복 전쟁을 중단하고 한동안 내정에 힘쓰는 것.
두 번째는 후마이야 왕국을 침공하는 것.
세 번째는 노르드 왕국을 침공하는 것.
‘물론 첫 번째는 거의 가능성 없는 경우의 수였지.’
그래서 아틸라는 내심 샤를이 후마이야 왕국을 침공하길 바랐다.
그런 이유로 후마이야를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만든 뒤 테헤누트의 손에 권력을 쥐여 준 것이니까.
전투 코끼리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진 그들은 샤를의 군대를 맞아 노르드보다 강력한 방어 체제를 구축할 것이다.
하지만.
샤를의 선택은 후마이야가 아닌 노르드였다.
‘뭐, 어쩔 수 없지.’
해결되지 않는 일에 심력을 쏟아 봐야 얻는 것은 없다.
아틸라는 고민을 끝냈다.
한결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래.’
피식 입가를 올렸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한 번 볼까. 샤를.’
* * *
노르드 왕국은 아인하르트의 군대를 맞아 동서로 이어지는 긴 전선을 펼치고 있었다.
그중 동부 전선을 맡은 책임자는 자비에 도베르뉴 공작이었다.
‘노르드 왕국 동부 전선 총사령관.’
어쩌면 누구에게는 왕국을 지키기 위한 강한 사명감에 전의를 불태울 수 있을지 모를 중책이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러하듯, 자비에는 총사령관 직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능구렁이 새끼들.’
평소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던 몇몇 귀족들.
그들은 자비에가 왕과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전선으로 내몰았다.
왕 또한 자비에를 구해 주지 않았다.
가깝지도 않은 친척 사이인 자비에를 구원해 귀족들의 원성을 사느니, 차라리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었으니까.
아울러 ‘왕의 핏줄이 최전방에서 전선을 지킨다’라는 것은 불안에 떨고 있는 백성들 사이에서 그럴듯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이 전장이 내 무덤이 될 모양이로군.’
자비에는 무관이 아니다.
제대로 된 전쟁은 한 번도 치러 본 적이 없다.
그런 그조차 ‘샤를 아인하르트’라는 사내의 무용담은 익히 들었다.
자비에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동부 전선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선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자비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샤를 아인하르트가 직접 이끄는 최정예 부대는 서부와 중부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
‘오오. 신께서 아직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실 생각은 아닌 것 같군!’
그러나 자비에의 안도는 길게 가지 못했다.
서부와 중부에 비해 약하다고 평가받는 동부 전선의 적들조차 자비에가 상대하기엔 너무나도 강력했던 것.
자비에는 동부 전선 총사령관직을 맡은 이래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는 연일 계속되는 패배에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초, 총사령관!”
그런 그의 앞으로 부관이 달려왔다.
내용을 듣기도 전에 자비에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저 빌어먹을 놈한테서는 단 한 번도 좋은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런 소식만을 전해야 하는 부관의 입장이 자비에보다 더욱 심란하기 그지없겠지만 자비에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후우…….”
자비에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물어보나 마나, 또 패배했다는 소식일 터.
“그래. 이번엔 또 얼마나 많은 아군이 전사했다는 건가.”
“그, 그게 아니라……!”
부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제대로 대답조차 못하고 있다.
자비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왕이라도 행차한 건가? 아니지. 그 겁쟁이가 직접 전선까지 올리는 만무하고. 그렇다면 뭔가. 설마 엄청난 수의 지원군이라도 보충된 건가?’
자비에는 이내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병력이 지원된다면 이곳보다는 서부와 중부 전선 쪽이다.
그래 봐야 제대로 된 병장기도 손에 들지 못한, 어제까지 농사나 짓던 농부들로 급조된 오합지졸이겠지만.
자비에는 물끄러미 부관을 바라봤다.
그가 알던 부관은 평소 감정이 있는 놈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표정이 많지 않은 인물이다.
자비에가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인가.”
부관의 대답은 자비에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스,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적의 군세를 처음으로 이겼습니다!”
“뭐, 뭐라고!”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자비에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이이이 이겼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군이 적장의 목을 치고 적병들을 몰아냈습니다! 지금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소식에 자비에는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신의 부대에서 쓸 만한 전력은 별로 남지 않았다.
지휘관 급 인물 중 절반이 넘는 이가 전사했고, 병력도 삼할 이상을 잃었다.
대륙 최고의 병법가가 나타난대도 전황을 뒤집긴 어려운 상황.
“저, 적들이 무슨 터무니없는 실수라도 저지른 건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꿀꺽 침을 삼키며 부관이 말했다.
“화, 황금바위산에서 내려온 6인의 드워프 용병이 지휘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적진을 기습했습니다.”
“뭐라고! 이런 상황에서 명령 불복종이란 말인가! 내 이놈들을 당장……!”
그러나 자비에가 궁금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비에는 애써 침착을 되찾았다.
“그건 나중에 듣도록 하지. 승리한 이유나 어서 말해 보게.”
“그게 바로 그겁니다!”
“당최 그게 무슨 말인가!”
“명령을 무시하고 달려든 드워프 용병들이 적진을 완전히 괴멸시켰습니다! 지휘관을 잃은 적들은 혼비백산하며 후퇴 중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잃었던 영토의 3할을 되찾았습니다 총사령관!”
“뭐라고오오오!”
이후 부관은 드워프 용병들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러던 중 부관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던졌다.
“……그런데 총사령관. 신기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 좀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보게!”
자비에의 재촉에 부관이 답했다.
“정체불명의 인간 전사 하나가 드워프들을 이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