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황금바위산의 드워프 (2)
황금바위 드워프족.
패영전에 존재하는 드워프족 중 가장 먼저 샤를과 조우하는 부족이며.
이들의 영역인 황금바위산은 노르드 왕국 북동쪽 국경에 위치해 있다.
때문에 황금바위 드워프족은 노르드 왕국과 오랜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고.
그런 연유로.
“아인하르트와의 전쟁에 황금바위의 전사들이 참전했고, 전사했다고?”
아틸라의 물음에 보에몽이 분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
“전장에 나선 전사가 용맹하게 싸우다 죽는 건 너희 드워프들에겐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그야 물론이지. 그 전쟁이 온전히 전사들만의 전쟁이었다면 말이야.”
아틸라는 납득했다.
현재 샤를 진영엔 전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녀석이 있지.’
불세출의 마법사, 제롬 아그리피나.
그의 존재가 드워프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드워프는 육체 능력이 한계까지 도달한 자들.’
그들은 마법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직접 땀 흘려 일궈 낸 육체 능력이 아닌, 비겁한 술수를 사용하는 자들이라 생각하기 때문.
하지만.
‘마법사들의 능력은 비겁한 술수가 아니다.’
그들은 전사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욱 힘겨운 고행을 반복하며 위대한 마법사들의 마법 세계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들 중 ‘진리(眞理)’의 경지에 이른 이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마법 세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최강의 관조자 바토리 에르제베트처럼.
그리고 제롬처럼.
‘하지만 드워프들은 그런 쪽으로 말이 통할 녀석들이 아니지.’
드워프의 쇠심줄 같은 고집은 노움을 능가한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드워프는 마법사뿐만 아니라, 마력을 종족 특성으로 지닌 엘프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평범한 인간이나 노움과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그렇지만.
드워프는 웬만한 마법사의 마법 정도는 완력으로 무시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종족이기도 하다.
그런데 보에몽이 저렇게나 열을 올린다는 것은.
‘제롬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거군.’
“네 아버지, 크누트 스톤핸드가 순순히 보내 줬을 리 없는데.”
“아버지를 알아?”
“아주 잘 알지.”
그는 날 모르지만.
“……도망쳐 나왔어.”
그럴 줄 알았다.
크누트는 상남자 중의 상남자 캐릭터.
그러나 자식인 보에몽만은 끔찍이 아낀다.
“네 아버지가 추격대를 보냈겠군.”
보에몽이 사라진 걸 알면 크누트가 가만있을 리 없다.
“그래서 최대한 멀리 남하한 후에 추격대와 조우할 생각이야. 그래야 그들도 내 제안을 생각해 볼 여지가 생길 테니까.”
“제안?”
“그래. 난 추격대와 힘을 합쳐 샤를 아인하르트를 제거할 거다.”
‘호오.’
아틸라는 내심 놀랐다.
처음 보에몽이 샤를을 죽이겠다는 말을 했을 땐, 그저 복수심에 물들어 사리분별 못하는 꼬마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보에몽은 많은 고민을 했고, 지금의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패를 꺼낸 것이다.
‘정식으로 참전 의사를 밝혀 봐야 크누트가 허할 리 없으니까.’
그래서 보에몽은 계산했다.
이렇게 자신이 영역을 떠나면 아버지가 추격대를 보낼 것이라는 걸.
‘그것도 정예 중의 정예 전사들만을 추려서.’
보에몽의 계산대로.
드워프 전사, 그것도 최상급의 전사 몇이 모인다면 유격전 정도는 거뜬히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생각이다.”
“뭐라고?”
아틸라는 보에몽을 무심히 내려 봤다.
제아무리 뛰어난 전사들이 온다 해도.
‘샤를을 이길 순 없다.’
그러면서 아틸라는 상상했다.
‘혹시 크누트가 온다면 재밌어지겠군.’
크누트 스톤핸드.
타리엘 페살라스가 끝끝내 승부를 내지 못했던 전사.
‘사실 더욱 강한 건 크누트 쪽이다.’
원작자인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타리엘과 겨룰 당시 크누트는 완전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크누트가 직접 나타날 확률은 희박하지.’
무릇 왕이란 존재는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 없는 위치에 있으니까.
* * *
드넓은 초지 위로 바람이 흘러갔다.
들풀 위를 걷던 금빛 털의 산양이 메에, 울며 걸음을 멈췄다.
“뭐야 비켄. 벌써 지친 거야?”
보에몽이 산양의 등에서 내려왔다.
산양의 복슬복슬한 털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래. 잠시 쉬었다 가자, 비켄.”
비켄이라는 이름의 산양은 인간이 목축하는 양과는 많이 달랐다.
웬만한 성인 남자 한 명쯤은 거뜬히 태울 수 있을 만한 크기.
황금바위 드워프족은 이 산양을 황금바위 산양이라 불렀다.
그리고 비켄은 황금바위 산양 중에서도 빼어난 혈통을 지닌 녀석이다.
“……그런데.”
비켄의 털을 매만지던 보에몽이 휙 고개를 돌렸다.
“왜 따라오는 거지?”
“가는 길이 같을 뿐이다.”
말을 멈춰 세우며 아틸라가 답했다.
보에몽이 말했다.
“난 쉬었다 갈 테니, 그럼 먼저 가던가.”
“마침 나도 쉬려던 참이다.”
아틸라는 말에서 내렸다.
바토리도 따라 내렸고, 두 마리 말은 근처 냇가로 가 목을 축였다.
그 뒤를 비켄이 슬그머니 따랐다.
“언제까지 쉬다 갈 건데.”
“글쎄.”
“정말 날 따라오는 게 아니라고?”
보에몽의 짐작대로.
아틸라는 보에몽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녀석에게 벌어질 최악의 상황을 막아야 하니까.’
보에몽이 추격대와 함께 전쟁에 참여한다면, 분명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건 머지않아 샤를의 귀에 들어갈 거고.
‘샤를에게 죽임 당하겠지.’
그래선 곤란하다.
아틸라에겐 보에몽을 산 채로 크누트에게 데려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오르피나의 성물을 찾으려면 크누트의 협력이 필요하니까.’
아까도 말했듯 크누트는 심각한 아들바보다.
보에몽이 전선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눈이 뒤집혀 샤를을 향해 전면전을 벌일 터.
물론 아틸라에게 협력할 마음의 여유 따윈 흔적도 없이 날아갈 테고.
그렇게 전쟁이 발발한다면 종래엔.
‘크누트 역시 샤를에게 패하고, 죽임 당하겠지.’
막아야 한다.
크누트는 훗날 샤를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는 자.
‘직접 맞붙는 것만은 피하게 해야 해.’
그래서 아틸라는 보에몽의 뒤를 쫓았다.
크누트가 보낸 전사들이 녀석을 갈무리해 황금바위산으로 데려갈 때까지.
“……어이. 그럼 말야.”
보에몽이 쭈뼛대며 말했다.
“나와 틈틈이 대련을 해보지 않겠나.”
건방지긴 해도 역시 크누트의 핏줄이었다.
아틸라가 강자라는 걸 깨닫고 가르침을 청하는 것.
물론 말투만은 여전히 건방졌지만.
“뭐, 심심풀이 정도는 되겠군.”
“심심풀이라니!”
“싫으면 말든가.”
“……싫다고는 안 했다.”
그렇게 아틸라와 보에몽은 틈나는 대로 대련을 하며 남하를 계속했다.
그 모습을 바토리와 펀치가 즐거운 듯이 바라봤다.
* * *
추격대는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보에몽.”
누런 후드를 눌러쓴 다섯 명의 전사.
눈빛만 봐도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좋아. 녀석이 왔군.’
추격대의 대장은 ‘황금바위의 붉은 수염’이라 불리는 강자, 라그나 크림슨비어드.
그라면 보에몽의 제안을 무시하고 녀석을 황금바위산으로 데려갈 수 있을 거다.
만족의 미소를 머금으며 아틸라가 말했다.
“이만 헤어지는 것이 좋겠군.”
아틸라는 슬쩍 몸을 뺐다.
황금바위산을 향하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예상대로 보에몽은 순순히 그들을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이, 이거 놔! 너희는 샤를 아인하르트와 놈의 사악한 마법사에게 죽임 당한 동료들의 원수를 갚지 않을 셈인가! 자, 잠깐! 날 데려가려면 이자를 먼저 쓰러뜨려야 할걸!”
추격대는 보에몽의 외침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어진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 이자는 내 호위 전사인 아틸라! 다들 들어는 봤지? 무적자, 타리엘 페살라스를 쓰러뜨린 인간 전사 말이야!”
처음 주먹을 나눴을 때부터 보에몽은 아틸라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래서 지난 며칠 동안 아틸라와 바토리의 대화를 유심히 엿들었고, 그러던 중 아틸라의 이름을 알게 된 것.
그리고 그 이름은 황금바위의 드워프들에겐 너무도 잘 알려진 것이었다.
“아틸라?”
“타리엘 페살라스를 쓰러뜨렸다던 그 새로운 무적자 말인가.”
“그자가 어찌하여 이곳에서 보에몽을 돕고 있단 말인가.”
전사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틸라는 불길한 기운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젠장, 설마.’
드워프는 빚을 잊지 않는다.
타리엘은 드워프의 왕인 크누트와 호각을 다퉜던 사내.
즉, 황금바위의 모든 드워프가 인정한 전사였다.
‘아무리 드워프들이 엘프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타리엘만은 예외였다.
그들의 왕인 크누트가 유일하게 쓰러뜨리지 못한 전사였기 때문.
그런 위대한 전사에게 승리한 자가 눈앞에 있다.
게다가 그는 왕의 눈을 피해 도주를 이어 가는 보에몽을 돕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황금바위의 전사들이 도끼를 꺼내들었다.
“무적자 아틸라.”
“무슨 이유로 보에몽의 도주를 돕는 것인지는 모르나 여기까지다.”
“난 도운 적 없는데.”
아틸라의 항변은 묵살당했다.
드워프는 한 번 뽑아든 도끼는 결코 그냥 갈무리하지 않는다.
“내가 먼저 하지.”
“아니. 내가 먼저.”
“그렇다면 다음은 나다.”
“아니. 나야.”
“너희 차례는 없을걸. 내 도끼질 한 방에 녀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 조각이 날 테니까.”
“뭣이?”
“그럼 내가 먼저 한다.”
“아니, 내가 먼저.”
전사들이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수염이 뽑히고, 머리가 산발이 되고, 옷이 찢어지기도 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
이윽고 순번을 정했는지 바위처럼 단단 체격의 전사 하나가 아틸라 앞에 마주 섰다.
“무적자 아틸라. 내가 너의 첫 상대로군.”
드워프 전사는 언제든 뛰어난 전사에게 결투를 청할 수 있고, 상대 또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드워프의 방식.’
우직하고 계산에 밝지 않은 그들은 그 규칙이 다른 종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거라 여겼다.
아틸라는 눈앞의 전사를 마주 봤다.
다른 드워프들보다 더욱 단단해 보이는 체구.
더욱 커다란 도끼.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
‘라그나 크림슨비어드.’
라그나가 말했다.
“내가 이긴다면 황금바위산까지 함께 가 줘야겠다.”
어차피 갈 생각이야.
하지만 결투에서 이긴 뒤 제 발로 찾아가는 것과, 패배해 끌려가는 건 모양새가 많이 다르다.
“바, 반대로 아틸라가 이긴다면 너희도 나와 함께 동료들의 원수를 갚는 거야!”
기다렸다는 듯 보에몽이 외쳤다.
“어때 라그나! 전사답게 ‘바위의 맹세’를 하고 시작하는 게!”
“좋다. 패배한 뒤 딴소리하지 말도록.”
그들은 아틸라의 의견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아틸라도 피할 마음을 집어치웠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실력을 보일 생각.
‘라그나를 쓰러뜨린다면 단숨에 황금바위족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크누트가 인정한 타리엘의 명성을 넘어서려면 그 이상이 필요하다.
아틸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조건이 있다. 라그나 크림슨비어드.”
자신의 풀네임을 부르는 아틸라에게 사뭇 놀라며 라그나가 답했다.
“말해봐라. 인간 전사 아틸라.”
“깝치지 말고 한꺼번에 덤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