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87화 (87/425)

087. 황금바위산의 드워프 (1)

“악귀로 진화하는 거냐.”

악귀(惡鬼).

사악한 염원, 혹은 그런 힘에 물들어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 자.

그것을 증거하듯 테헤누트의 목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아틸라의 목을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아틸라는 팔을 휘둘러 테헤누트를 날려 버렸다.

그녀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난 아니야아아아아!”

테헤누트가 괴성을 지르며 아틸라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닥치며 고꾸라졌다.

“왜 끼어들어 할망구.”

“저 아이를 죽일 생각이 없지 않느냐.”

바토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테헤누트는 아직 죽어선 안 된다.

“끄흐으으으……!”

몸을 일으키려는 테헤누트를 아틸라의 손이 짓눌렀다.

테헤누트는 발버둥 쳤지만 아틸라의 힘을 당해 낼 순 없었다.

오래지 않아 테헤누트의 이와 손톱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늦지 않았구나. 완전한 악귀로 변하기 전에 되돌렸으니.”

테헤누트가 중얼거렸다.

“차라리…… 날…… 죽여…….”

아틸라는 테헤누트를 틀어쥔 손에 힘을 풀었다.

부들부들 다리를 떨며 몸을 일으키는 테헤누트를 향해 아틸라가 말했다.

“널 죽이는 건 내가 아냐.”

“그게…… 무슨…….”

“넌 아인하르트의 군대를 맞아 싸운다. 그리고 샤를의 손에 죽는다. 이후 카멘이 새로운 왕이 된다.”

“카멘……이…….”

“지금의 카멘은 전투 경험이 부족하다. 샤를의 패도를 적절히 방해하려면 네 지휘력이 필요하다.”

아틸라의 눈이 바토리를 향했다.

“시작해라 할망구. 실수하지 말고.”

“걱정 말라니까 아까부터 계속 그 소리구나.”

바토리가 툴툴대며 테헤누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바토리의 손에서 검붉은 광채가 퍼져 나왔다.

“흐응. 메피스토펠레스의 마술도 제법 써먹을 만하구나.”

테헤누트의 의식이 내면으로 침잠했다.

테헤누트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생전의 부왕을 봤다.

왕국 최고의 코끼리를 타고 기상전을 치르는 모습을 봤다.

패배한 호족들을 무릎 꿇렸다.

왕좌에 앉았다.

라히샤를 만났다.

‘거기 있었느냐.’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목소리.

‘이쪽으로 오너라.’

테헤누트는 그 말을 따랐다.

목소리를 향해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새처럼 날아갈 수 있었다.

‘라히샤 에스테르.’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이름을 불렀다.

이상했다.

내 이름은 테헤누트 하토르.

그런데 지금은.

라히샤 에스테르가 내 이름인 것만 같다.

‘라히샤…… 에스테르.’

그게 누구였을까.

테헤누트는 날개를 잃고 심연으로 침잠하는 자신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빛을 향해 비상하는 또 다른 자신을 보았다.

‘그래.’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신의 내면에 갇힌 또 하나의 영혼.

‘라히샤 에스테르.’

그녀의 뒷모습을 느끼며 테헤누트는 의식을 잃었다.

* * *

“제대로 수리된 거 아니니 또 폭주하지 마라.”

수도를 떠난 아틸라와 바토리는 북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

“또 망가지면 고칠 데도 없다. 라히샤의 영혼은 소멸했으니까.”

바토리가 불러낸 라히샤의 영혼은 테헤누트의 몸을 빌려 현자의 돌을 수리했다.

다소 불완전하게.

“알겠구나. 내 알았다고 몇 번을 이야기하느냐.”

“기억은 확실히 지워 놨겠지.”

“확실히 처리해 놨느니라.”

의식을 잃은 테헤누트는 그녀의 침소로 옮겼다.

환술에서 깨어난 이후의 테헤누트는 ‘문’ 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뭐 하러 들고 왔냐.”

바토리의 손에 들린 책을 보며 아틸라가 물었다.

테헤누트가 ‘문’ 안에서 처음 발견했던 물건.

어느 강력한 악마가 유흥 삼아 인간 세계에 남겨 둔 부산물.

“재미있지 않느냐.”

“재미있기는.”

“조금 살펴본 뒤 파기할 셈이니 염려 말거라. 그리고 이게 사라져야 테헤누트가 기억을 되찾지 못할 게 아니겠느냐.”

고개를 끄덕이던 아틸라가 말을 멈춰 세웠다.

“손님이 찾아왔군.”

저만치 앞에 붉은 후드를 눌러쓴 자가 보였다.

시합 전 아틸라와 다른 기수들의 몸을 확인했던 적마탑의 마법사.

“전사 아틸라.”

“미안하지만 난 네 이름을 모르는데.”

“너의 정체가 뭐냐.”

후드의 그늘 속에서 마법사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적마탑에선 줄곧 의심하고 있었다. 테헤누트 하토르가 금기의 마법에 손을 댄 것이 아닌가 하는. 그래서 기상전을 빌미로 그것을 알아보려 했지.”

“그런데?”

“난 테헤누트 하토르보다 더욱 위험해 보이는 사내를 발견했다.”

“호오.”

“다시 묻겠다. 너의 정체가 뭐냐.”

마법사의 손이 붉은 기운을 머금었다.

적마탑의 마법사답게 강렬한 화기(火氣).

“대답하지 않으면 네 몸을 향해 불덩이가 쏘아질 것이다.”

“그전에 네 머리에 도끼가 박힐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틸라는 가급적 저 마법사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마탑과 척을 지는 건 귀찮은 일이지.’

마탑엔 국경이란 것이 없다.

국가라는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는 여러 마탑은 중앙 마탑이라는 심장을 중심으로 각국에 퍼져 있다.

적마탑의 적으로 규정되는 순간, 아틸라는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마탑의 추격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처리하겠다, 야만전사야.”

바토리가 앞으로 나섰다.

“죽이지 마라.”

“당연한 소릴.”

바토리의 손이 붉게 물들었다.

마법사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대는 적마탑의 마법사인가.”

“아니니라.”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마법을.”

화속성 마법은 적마탑 마법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바토리가 뿜어내는 순도 높은 화기는 적마탑 마법사가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군. 파문 당한 자인가.”

마법사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위를 향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주문을 읊었다.

마법사의 손에서 불의 구체가 쏘아졌다.

“흐응. 아주 초심자는 아니로구나.”

바토리도 주문을 읊었다.

그녀는 왼팔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법사가 쏘아 낸 것과 동일한 화염구를 오른손으로 쏘아 냈다.

물론 바토리의 것이 더욱 크고, 강했다.

퍼어어엉!

바토리의 화염구가 상대의 화염구를 분쇄했다.

그것을 넘어 마법사를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당황한 마법사는 방어 주문을 영창하려 했다.

하지만 바토리의 화염구가 더욱 빨랐다.

화륵.

바토리의 손짓 한 번에 화염구가 연기를 내며 사라졌다.

마법사의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지나겠느니라.”

자신의 앞을 지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마법사는 돌아보지 않았다.

* * *

후마이야 왕국의 국경을 벗어나 어느 자그만 마을에 도착한 아틸라와 바토리는 예정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바로, 샤를 아인하르트가 아스투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

뿐만 아니라 기세를 몰아 이곳 ‘노르드 왕국’까지 침공을 시작했다고 한다.

‘역시 후마이야보단 노르드가 먼저인가.’

“남쪽 전선이 심상치 않다던데.”

“머지않아 우리도 전장으로 끌려가겠군.”

사내들이 술잔을 부딪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듣던 바토리가 아틸라에게 속삭였다.

“대단한 아이로구나.”

“뭐, 그렇지.”

“너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만약 아틸라의 등장이 없었다면 바토리는 샤를을 관조했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그랬고, 샤를의 잠재 능력은 아틸라와 비교해도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 아이는 너와는 다르단다.’

겉으로는 한없이 차갑고 무심해 보이는 아틸라.

하지만 속마음마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바토리는 알고 있었다.

반면 샤를은 달랐다.

부드럽고 섬세한 외모 속에 감춰진 얼음처럼 차가운 성정.

‘만약 그 아이가 두 번째 운명의 끈을 쥐기로 결정한다면.’

바토리는 물끄러미 아틸라를 바라봤다.

술병을 들이키며 으적으적 고기를 씹는 그의 모습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요란한 소음이 여관을 강타했다.

“크허억……!”

거구의 사내가 벽을 부수며 난입했다.

무언가에 세차게 얻어맞은 듯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던 사내가 아틸라의 탁자를 덮쳤다.

“뭐, 뭐야!”

“싸움이라도 난 건가!”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콰쾅! 쾅! 식당 벽을 부수며 또 다른 사내들이 날아왔다.

이번엔 한두 명이 아니었다.

“크헉!”

“꾸에에엑……!”

아틸라는 쇄도하는 사내의 머리통을 붙잡고 바닥에 내팽개친 뒤 성큼성큼 걸었다.

벌컥, 여관 문을 열자 바닥에 나동그라진 십여 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 가운데 있었다.

등 뒤에 커다란 도끼를 맨 다부진 체격의 꼬마 하나가 씩씩대는 모습이.

‘드워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꼬마는 꼬마였지만, 저 체형은 분명 드워프다.

“넌 또 뭐야.”

아틸라를 발견한 소년이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아틸라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녀석이라면 그리 중요한 캐릭터는 아닐 테고.’

“넌 뭔데.”

아틸라의 물음에 소년이 헛웃음을 지었다.

“질문은 내가 먼저 했다. 아니면 뭐야. 너도 이 녀석들처럼 흠씬 두들겨맞고 싶은 건가?”

“할 수 있으면 해봐.”

그 말에 소년이 껄껄 대소했다.

어른 드워프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부자연스러운 웃음.

“보아하니 덩치 믿고 까부는 용병 나부랭이쯤 되는 모양인데. 좋아. 원한다면 본때를 보여 주도록 하지.”

“원래 목소리로 해라 꼬마. 아직 변성기도 안 지난 거 같은데.”

“뭐? 꼬, 꼬마라고?”

소년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녀석이 스무 명에 달하는 사내를 두들겨 팬 이유.

그건 바로 그들이 소년을 꼬마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넌 오늘 뒤졌어!”

소년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도끼를 꺼내지 않는 걸 보니 맨손으로도 자신이 있는 모양.

가만. 맨손이라고?

“황금바위산의 보에몽 님을 얕잡아본 걸 평생 후회하게 해 주겠다!”

‘역시 그랬군.’

황금바위산의 보에몽.

녀석의 풀네임은.

‘보에몽 스톤핸드.’

황금바위 일족 최강의 전사이자 패영전의 영웅, ‘크누트 스톤핸드’의 아들이다.

원작에서는 크누트의 독백 속에서나 가끔 등장하는 비중 없는 녀석.

그런 녀석이 왜 여기에 있지?

파앙!

보에몽의 주먹을 아틸라는 가뿐하게 잡아냈다.

스톤핸드 집안의 핏줄답게 묵직한 공격이었지만.

“뭐, 뭐야! 내 바위주먹을 막았다고?”

당연히 아틸라에게 먹힐 정도는 아니었다.

“바위주먹은 무슨. 솜방망이가 따로 없구만.”

“뭐! 솜방망이!”

공중에서 빙글 몸을 돌려 착지한 보에몽이 재차 주먹을 뻗었다.

두어 번 더 공격을 막아 내던 아틸라는 문득 귀찮음을 느꼈다.

그래서 내뻗어진 주먹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쳤다.

* * *

보에몽은 금세 기절에서 깨어났다.

그러고는 자신을 내려 보는 아틸라와 바토리를 발견하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네놈들! 날 납치해서 어쩔 셈인가!”

“납치는 개뿔. 깨어났으면 얘기나 해 봐라.”

“무엇을 말이냐!”

“스톤핸드의 후계자인 네가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거지?”

“그, 그걸 어떻게!’

놀란 보에몽이 주먹을 내뻗었지만 아틸라에게 제압됐다.

“놔라! 비겁한 녀석!”

보에몽은 몇 번 더 꿈틀거렸지만 오래지 않아 포기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틸라와 바토리를 놀라게 했다.

“샤를 아인하르트를 죽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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