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늙지 않는 왕 (4)
[ 포식의 주인 ]
도롱뇽이 왕도마뱀을 포식하자마자 포식의 주인이 발동했다.
왕도마뱀 하나로 그리 큰 근력 상승을 기대할 순 없다.
그러나 그 정도면 되었다.
가까스로 평행을 유지 중인 양팔 저울을 기울이는 데는 자그만 무게추 하나면 충분하다.
뿌아아아아앙!
힘에서 밀린 카멘의 코끼리가 비명을 질렀다.
녀석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쿵! 하며 지면에 엎어졌다.
그 순간 다섯 명의 기수가 아틸라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카멘의 싸움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혹여 코끼리의 밟에 짓밟히지 않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낙상한 카멘도 무기를 들고 합류했다.
아틸라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래그래. 들어와.”
아틸라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그의 몸이 흐릿하게 변했다.
기수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깨닫지 못한 채 차례로 바닥에 누웠다.
그렇게 기상전이 끝났다.
* * *
테헤누트는 만족했다.
아틸라는 일곱 가문의 기수들을 쓰러뜨렸고, 이제 그녀는 왕가를 포함한 여덟 가문의 전투 코끼리와 기수를 보유한 왕이 되었다.
‘물론 그들의 충성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
그러나 그 정도면 되었다.
머지않아 아스투리아는 멸망할 것이고, 이곳은 전장이 된다.
각 가문의 기수들은 왕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가문과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아인하르트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테헤누트는 후마이야가 아인하르트에게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전투 코끼리 부대가 편성된 이후의 왕국은 외세의 침략에 굴한 적이 없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하면 호족들의 반발도 누그러질 터.
어찌 됐든 왕국의 평화를 지켜 낸 왕을 감히 끌어내릴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수 년을 더 인내하면.’
그토록 염원하던 불로불사의 육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내는 왜 라히샤를 만나려는 것일까.’
아틸라가 원했던 보상.
‘연금술사 라히샤 에스테르를 만나게 해 주시오.’
테헤누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히샤가 이곳에 은둔하고 있다는 걸 아는 것도 의아했지만.
힘들게 싸워 이겨 놓고, 원하는 보상이 고작 형편없는 실력의 연금술사를 만나는 것이라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현자의 돌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라히샤가 했던 말을 떠올린 테헤누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게나 신경을 써 줬는데.
연구에 필요하다면 뭐든지 구해다 줬고, 건강 관리를 위한 양질의 음식까지 풍족히 제공해 주었는데.
‘배은망덕한 계집.’
심지어 언젠가부터 라히샤는 왕실에서 보내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시답잖은 풀뿌리나 캐먹고 사는 건가? 제 천한 출신을 감추지 못하고서.’
“전하. 우승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시녀의 목소리를 들은 테헤누트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후 아틸라와 바토리가 알현실로 들어왔다.
“실수하지 말고 잘 해라. 할망구.”
“흐응. 걱정 말거라 야만전사야.”
테헤누트는 미소 띤 얼굴로 둘을 반겼다.
“기상전의 영웅께서 오셨군요.”
“공치사는 됐소. 어서 보수를 받고 싶군.”
“물론 그리해야지요.”
테헤누트는 두 사람을 연구실로 안내했다.
뒤따르는 호위병은 없었다.
“외진 곳이군.”
아틸라의 말대로 연구실은 왕성에서 상당히 외딴곳에 있었다.
“이목이 집중되어 좋을 게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답하며 테헤누트는 걸었다.
무성히 자라난 잡초가 다리를 스쳐 가려움을 유발했다.
‘아침 일찍 정리를 해 두라 말했거늘.’
테헤누트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꿈틀댔다.
한동안 걷자니 들풀이 말끔히 정리된 구역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건물을 지키던 경비병이 테헤누트의 눈짓에 자리를 비켰다.
두툼한 철문을 열자 짧은 복도가 보였다.
그곳에 있던 시녀가 왕을 보곤 놀란 눈으로 무릎을 꿇었다.
테헤누트가 시녀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머뭇대던 시녀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여……, 연금술사께선…… 오늘도 식사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테헤누트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드리운 어둠 속에 일말의 사나움이 엿보였다.
“물러가거라.”
시녀와 경비병을 모두 물린 테헤누트는 연구실의 잠금장치를 열었다.
끼이익……, 음산한 소음을 울리며 문이 열렸다.
문 안쪽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게으른 계집 같으니. 연구는 하지 않고 잠이나 자고 있는 모양이군.’
테헤누트는 복도에 있던 횃불을 손에 들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틸라와 바토리가 뒤를 따랐다.
“원래 이렇게 계단이 많소?”
아틸라의 물음에 테헤누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던가?’
나선형 계단은 끝도 없이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연금술을 연구하다 보면 악취라든지, 폭발이라든지, 이런저런 일이 많은 법이지요. 그래서 연구실을 지하로 옮겼습니다.”
“그럼 이전엔 연구실이 다른 곳에 있었던 거요?”
테헤누트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에 있었지?’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연 안개가 머릿속을 장악한 기분.
‘내가, 왜 이러지?’
테헤누트는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아틸라도 더는 묻지 않았다.
흔들리는 횃불 아래 세 사람의 발소리만이 공기를 자극했다.
그리고 도착했다.
기묘한 기운을 풍기는 검은 문.
테헤누트는 문을 밀어 열었다.
누가 보아도 연구실이라 느껴질 법한 널찍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테헤누트 하토르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알록달록한 조명 속에서 라히샤가 무릎을 꿇었다.
테헤누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처음 보는 풍경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익숙하다.
“연구실을 옮겨 주신 이후로 제법 성과가 있었습니다.”
라히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라히샤의 웃음에 테헤누트도 입가를 올렸다.
왕으로서 짓는 억지웃음이 아닌, 자매처럼 가까웠던 이를 향한 꾸밈없는 미소.
“그래. 어디 한번 보자꾸나.”
테헤누트는 라히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라히샤의 어깨가 차가웠다.
뿐만 아니라 매우 갸냘프고, 돌처럼 단단하기까지 했다.
“너…….”
“왜 그러십니까 국왕 전하.”
라히샤는 여전히 테헤누트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며 테헤누트는 점점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왜. 그러십. 니까. 국왕 전. 하.”
라히샤는 분명.
“국왕. 전하게서 날. 이렇게 만들……지 않. 으셨……습니까…….”
라히샤의 눈과 코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렀다.
아귀처럼 벌어진 입에서 폭포수처럼 피가 쏟아졌다.
놀란 테헤누트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 테헤누트의 손목을 라히샤가 붙잡았다.
“테헤. 누트. 테헤……누…….”
테헤누트는 비명을 지르며 라히샤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갈고리처럼 손목을 파고든 라히샤의 손가락은 쉬이 테헤누트를 놓아주지 않았다.
푸스스……, 퓨슈스스슷…….
라히샤의 손이 풍화됐다.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썩어 문드러지며 까맣게 변색된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서야 테헤누트를 잡은 라히샤의 손이 풀어졌다.
두 손으로 라히샤를 밀쳐낸 테헤누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먼지 쌓인 방.
거대한 둥근 제단이 보였다.
그 위에 사지가 묶인 채 드러누운 백골이 보였다.
“이제야 네가 한 짓을 깨달았느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테헤누트는 고개를 돌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을 뜬 바토리가 거기 있었다.
“불로불사의 길을 찾는다 하였더냐.”
“당신은…….”
“불사는 축복이 아닌 저주이니라.”
테헤누트의 눈이 커졌다.
먼 옛날, ‘문’을 열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테헤누트의 앞을 가로막았던 낯선 후드의 여자.
‘불사는 축복이 아닌 저주이니라.’
“다, 당신은……!”
“이제서야 깨달았느냐.”
바토리의 손짓이 허공을 저었다.
방 안의 풍경이 또다시 바뀌었다.
낯익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울렸다.
“테헤……누트…….”
테헤누트는 뒤를 돌았다.
사지가 묶인 라히샤가 제단 위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 깊숙이 꽂힌 단검.
그것을 중심으로 새빨간 핏물이 쿨럭쿨럭 솟아났다.
“왜…… 나를…….”
테헤누트는 자신의 손을 내려 봤다.
흥건하게 젖은 양손은 라히샤의 가슴에 박힌 단도를 움켜쥐고 있었다.
“라히샤.”
테헤누트의 입술이 열렸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넌 불로불사의 비밀을 깨달았으면서도 내게 사실을 고하지 않았지.”
“아니……야. 불로불사의 연금술은…… 현자의 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
“닥쳐라 요망한 것! 늙지 않는 네년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넌 현자의 돌을 독차지하기 위해 날 속이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아. 정신을 차려 테헤누트……. 난…… 늙었어……. 몸도…… 정신도…….”
테헤누트의 눈동자가 파문처럼 흔들렸다.
라히샤의 말대로였다.
라히샤는 주름진 노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테헤누트는 비명을 질렀다.
피로 물든 제단이 불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악!”
라히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함지박처럼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 절규하는 인간 형상의 기체가 솟아났다.
허공을 떠돌던 그것이 테헤누트의 입을 비집고 들어왔다.
“으읍……! 으으으읍……!”
그걸로 끝이었다.
오래된 나무처럼 비쩍 마른 라히샤의 시체가 움직임을 멈췄다.
테헤누트는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온 라히샤의 영혼을 느꼈다.
테헤누트가 중얼거렸다.
“내가…… 라히샤의 영혼을…… 삼켰다고……?”
“그것만이 아니란다.”
바토리의 손짓에 방 안의 풍경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보거라. 네가 저지른 죄악의 깊이를.”
굳어진 피로 가득한 제단.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소녀들의 시신.
끼이익……, 문을 여는 소리에 테헤누트는 뒤를 돌았다.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양손이 묶인 소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등에 단검을 겨누며 뒤따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방 안 가득한 시체를 보며 발광하는 소녀의 뒤통수를 칼자루로 후려친다.
반쯤 기절한 소녀를 제단에 눕히고 사지를 묶는다.
재갈을 풀자마자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소녀의 입을 틀어막는다.
가슴에 단검을 꽂는다.
푸슉. 푸슈슈슉…….
넘치는 핏물이 다시 제단을 덮는다.
불길한 광채를 뿜는 제단이 소녀의 생기를 뽑아낸다.
그것을 받아먹는다.
그렇게 젊음을 유지한다.
“아니야! 내가 한 짓이 아니야!”
테헤누트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문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아틸라가 막아섰다.
“비켜어어어어!”
테헤누트의 외침을 무시하며 아틸라는 그녀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울컥, 토사물이 쏟아졌다.
“테헤누트 하토르.”
아틸라의 손이 테헤누트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넌 죄악감에서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의 기억을 변조했다.”
핏발 선 테헤누트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짐승처럼 이빨이 날카로워지고, 손톱은 갈퀴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아틸라의 눈이 꿈틀댔다.
이건 원작에서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