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늙지 않는 왕 (3)
하세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왕가의 기수가 코끼리의 발을 막아 낸 것까지는 보았다.
그 후 코끼리의 몸이 크게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자신의 몸은 더 이상 안장에 올라앉아 있지 않았다.
하세프는 깨달았다.
‘내가…… 낙상했어?’
그랬다.
자신은 경기장의 들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눈앞에 쓰러진 코끼리가 몸을 일으키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 말고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없었다.
자신과 코끼리를 제외한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춰 버린 듯이.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우와아아아아아!”
“저게 말이 돼?”
“인간이 코끼리와 힘겨루기를 하고, 오히려 이겨 버렸다고?”
“저 야만인 정체가 뭐야!”
관객들의 함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어느 가문이 새로운 왕가가 될지를 궁금하게 여기며 경기장을 찾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그들의 머릿속에 없었다.
‘엄청난 기수가 나타났다.’
‘인간의 몸으로 코끼리와 정면 승부를 벌이는 자라니.’
‘지금까지의 기상전에서 저런 전례는 없었다고!’
그들의 머릿속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저 야만인이 우승할지도 모른다.’
관객들의 함성이 폭발적으로 거세졌다.
불과 수 초만에 그들의 관심은 왕위를 노리는 일곱 가문이 아닌, 하토르 왕가의 이름 모를 야만인 기수에게 쏟아졌다.
그것을 보며 바토리가 미소했다.
흔들리는 항아리 뚜껑을 지그시 내리누르며 말했다.
“흐응. 요란하게도 먹어 대는구나.”
항아리에 입술을 가져가며 속삭였다.
“그간 굶은 것에 대한 보상이 되었느냐.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야.”
* * *
테헤누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더듬더듬 열렸다.
“하, 하디드. 저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사내는 결코 헛말을 지껄일 인물이 아니라고.”
테헤누트는 꿀꺽 침을 삼켰다.
조금 전 광경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코끼리와의 완력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와 대등하게 겨룬 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하디드가 허허 웃으며 답했다.
그러나 그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언가 대책이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코끼리와 힘겨루기를 할 줄이야.’
하디드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틸라의 행동은 그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저 아름다운 마법사에게 강화 주문이라도 받은 것인가.’
하디드는 불의 신전에서 바토리의 무시무시한 마법을 봤다.
그녀가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많지 않다.
부정 방지를 위해, 기상전에 참가하는 모든 기수와 코끼리는 특별 초청된 마법사에게 몸수색을 받는다.
게다가 그 마법사는 보통의 마법사가 아니다.
바로, 불의 힘을 연구하는 적색 마탑의 마법사였으니까.
‘적마탑(赤魔塔)의 마법사는 지금껏 왕국의 일에 중립을 지켜 왔다.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왕가의 편에 설 자들이 아니야.’
마법사는 의문을 표하는 여러 호족들을 향해, 왕가의 기수에게서 부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문을 가진 건 하디드뿐만이 아니었다.
테헤누트의 시선이 바토리와, 그녀 옆의 항아리를 향했다.
테헤누트의 눈이 실낱처럼 가늘어졌다.
‘설마 항아리에 채워 달라 말했던 것들을 이용해서? 하지만 어떻게.’
아틸라는 테헤누트에게 거대한 항아리 안에 뱀과의 동물을 가득 담아 달라 말했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독을 지닌 녀석 중 체구가 작은 놈만을 추려서.
‘궁리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군.’
테헤누트는 생각을 멈췄다.
그녀의 입술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어디 한 번 기적을 일으켜 보시지요. 야만전사 아틸라.’
* * *
핏발 선 아틸라의 눈이 다음 목표를 찾았다.
[ 돌진(突進) ]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신형이 다음 타깃에게 근접했다.
관객들이 소리쳤다.
“뭐, 뭐야 저게!”
“지금 움직이는 거 봤어?”
“보긴 뭘 봐!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좋아. 예상대로다.’
코끼리는 돌진에 저항하지 못했다.
[ 목표물이 1초간 기절 상태에 빠집니다. ]
[ 목표물의 방어력과 이동 속도가 20% 감소합니다. ]
“어어. 이게 뭐야!”
기절한 코끼리를 타고 있던 기수가 고삐를 당겼다.
그러나 코끼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방비한 코끼리의 앞다리를 얼싸안은 아틸라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쿠우웅!
두 번째 코끼리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까지 기수들은 연이어 발생한 믿지 못할 광경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건 아틸라가 세 번째 먹잇감을 쓰러뜨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틸라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코끼리에게 달렸다.
쿵! 하는 소음과 함께 녀석도 앞선 두 마리와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마리나……!”
“이, 이게 대체……!”
“세 번째다! 벌써 세 번째라고!”
관객들이 요란하게 소리쳤다.
기수 중 누군가 외쳤다.
“모두들 정신 차려! 얼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카멘.’
그 말에 기수들이 정신을 차렸다.
아틸라를 노려보는 그들의 눈이 냉정을 찾았다.
네 마리의 코끼리가 진을 이루기 시작했다.
“호오. 이제야 제대로 된 협공을 하시겠다.”
도롱뇽의 포식은 끝났다.
더 이상의 근력 상승은 없다.
그러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남은 네 마리 코끼리를 상대하기엔.
“쳐라!”
“녀석을 더 이상 인간이라 상정하지 마라!”
“녀석은 전투 코끼리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진을 펼쳐 단숨에 제압한다!”
기수들의 외침에 아틸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방을 에워싸며 접근하는 코끼리 중 하나를 골라잡았다.
‘아무리 나라도 네 마리를 동시에 상대할 순 없지.’
아틸라는 달렸다.
그리고 시전했다.
[ 포효(咆哮) ]
[ 포효의 대상이 공포에 질려 경직됩니다. ]
타깃이 되었던 코끼리의 몸이 경직됐다.
돌진에 저항하지 못했던 전투 코끼리는 포효에도 저항하지 못했다.
게다가 포효의 효과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 근거리 적에게 최대 3회 전염됩니다. ]
[ 전염된 스킬은 최초의 대상보다 한 단계 낮은 공포 효과를 가집니다. ]
“으어어어어어……!”
전염된 기수가 달아나려 했다.
그 순간 들어 올려진 코끼리와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상당한 고통이 느껴질 법도 하건만 그에 아랑곳없이 벌떡 일어선 기수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놈은 장외패로군.’
기상전에 참가한 기수는 승부가 끝날 때까지 경기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엄청난 주력을 자랑하며, 녀석은 관객석으로 넘어갔다.
“왜,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멈춰! 멈추라니까!”
그러는 동안 두 마리 코끼리가 추가로 전염됐다.
살아남은 네 코끼리 중 하나는 쓰러뜨렸고, 둘은 공포에 전염됐다.
제정신을 유지 중인 건 한 마리뿐.
‘일대 일이라면 지지 않는다.’
아틸라는 달렸다.
‘포효를 시전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쿨타임이 돌아온다 해도 다시 사용할 순 없겠지.’
[ 한 번 포효에 노출된 타깃은 포효에 대한 저항 확률이 크게 상승합니다. ]
‘일단 녀석부터 잡는다.’
아틸라는 제정신인 코끼리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고맙게도 녀석은 맞돌격을 해 왔다.
달려드는 힘을 역이용해 코끼리를 업어쳤다.
반 바퀴 몸을 회전한 코끼리가 바닥에 꽂혔다.
뿌으으으으으……!
충격이 심했는지 녀석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아틸라는 남은 두 타깃을 확인했다.
‘카멘. 네프티스.’
첫 번째로 쓰러뜨린 하세프와 함께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수라 평가받는 인물들.
당연히 그들이 탄 코끼리는 왕국 최고의 코끼리들이다.
그것을 증거하듯 두 코끼리는 거의 동시에 공포 효과를 이겨 냈다.
‘일단은 네프티스 먼저.’
카멘보다는 녀석이 조금 더 상대하기 쉬울 터다.
‘네프티스는 겁이 많은 편이지.’
때마침 돌진 쿨타임이 돌아왔다.
지체 없이 시전했다.
[ 돌진(突進) ]
“저, 저게 대체 뭐냐고!”
네프티스는 아틸라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왔다.
빛살처럼 쇄도하는 야만인의 사나운 얼굴이.
“흐이이이익!”
네프티스는 겁에 질렸고, 그의 코끼리는 돌진을 맞고 기절했으며, 잠시 후엔 쿵! 하는 소음을 울리며 바닥에 뻗었다.
“이제 한 마리.”
카멘.
원작에서는 테헤누트를 실각시키고 왕좌를 차지하는 자.
당연히 그의 실력은 하세프와 네프티스보다 위다.
“일대 일이다!”
“설마 카멘도 당하고 마는 건가!”
“아니야! 왕국 최고의 기수 카멘이 그리 쉽게 당할 리 없어!”
아틸라는 무작정 달렸다.
포식의 주인 지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이쪽이다.
“와라! 하토르의 기수!”
카멘도 아틸라에게 돌격했다.
파앙! 내리치는 코끼리의 발과 아틸라의 양팔이 격돌했다.
아틸라는 지금까지의 코끼리와 격이 다른 괴력을 감각했다.
‘빌어먹을 역시 다르군. 차기 왕의 코끼리는.’
힘 대결은 거의 호각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너무도 많은 힘을 소모한 탓에 체력이 급감했다.
코끼리들과의 전투는 그 정도로 과격했다.
‘더 이상 포식할 것도 없는데.’
저 거대한 항아리를 가득 채운 것부터가 왕의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걍 죽이는 거라면 차라리 쉬울 텐데.’
그러나 코끼리를 죽여선 안 된다.
부상을 입히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코끼리 한 마리 한 마리는 후마이야 왕국의 국력 그 자체다.
뿌우우우우우!
카멘의 코끼리가 여력을 발휘했다.
아틸라는 자신의 몸이 짓밟힐 것만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야수 사냥꾼의 외침을 해제했다.
[ 전사의 외침 ]
[ 근력과 체력이 10% 상승합니다. ]
“크으으윽……!”
밀리던 힘 싸움이 다시 호각으로 접어들었다.
잠시 후 돌진 쿨타임이 돌아왔고, 아틸라는 거리를 벌려 카멘을 공략하려 했다.
“놓칠 것 같은가!”
낌새를 눈치챈 카멘이 코끼리로 방해했다.
‘저 야만인에게 일정 거리와 시야를 확보하게 해선 위험하다.’
카멘은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아틸라는 내심 놀랐다.
‘과연 왕이 될 그릇은 다르다 이건가.’
다른 기수들은 아틸라의 괴력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카멘은 달랐다.
괴력 이상으로 두려운 것은 눈으로 봐도 믿어지지 않는 신기.
돌진과 포효였다.
‘마법과도 같은 기술을 쓰는 사내다. 주의에 주의를 거듭하지 않으면 쓰러지는 건 내 쪽이다.’
그러는 사이 아틸라의 체력은 점점 더 고갈돼 갔다.
“힘내거라 야만전사야! 네 곁엔 내가 있느니라!”
바토리는 아까부터 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틸라의 눈이 바토리를 향했다.
그리고 보았다.
‘저건?’
바토리와 멀지 않은 곳에 앉은 호족 가문.
그들의 대표가 데려온 거대한 애완동물을 본 아틸라가 입가를 찢었다.
도롱뇽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들은 도롱뇽이 투명화로 몸을 숨기고 호족의 애완동물에게 접근했다.
쩌억 입을 벌렸다.
[ 포식(捕食) ]
[ 환수, 도롱뇽이 왕도마뱀을 포식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