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늙지 않는 왕 (2)
“카멘! 이번에야말로 우리 가문이 왕족이 될 때다!”
“긴장할 것 없다 하세프! 네가 바로 후마이야 왕국 제일의 기수니까!”
“가라 네프티스! 네 실력을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 줘라!”
호족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가문의 기수들을 응원했다.
나머지 관객들도 자신이 섬기는 가문의 기수를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상석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테헤누트가 말했다.
“저 사내가 정말 우승할 수 있단 말입니까.”
테헤누트는 눈동자만을 굴려 옆자리의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의 주름진 눈가가 웃음을 머금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란히 앉아 경기를 관람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실상 두 사람은 동갑내기 친구였다.
노인, 하디드 살만이 답했다.
“어차피 왕실의 다른 기수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왕이시여.”
“그렇다고 저런 검증되지 않은 자를 기수로 내보내자니요.”
테헤누트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의 청이 아니었다면 결코 저자의 제안을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디드를 왕실로 보내 이야기를 하도록 사주한 건 아틸라였다.
테헤누트가 말한 대로, 하디드와 왕 사이의 오랜 친분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틸라를 만나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 아틸라라는 사내는 결코 헛말을 지껄일 인물이 아닙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와 함께 불의 신전을 찾았던 일을.”
테헤누트는 하디드의 말을 기억했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후마이야 왕국을 흐르는 불의 힘의 주인.
그 위대한 초월자와 아틸라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 테헤누트는 들었다.
“그야 물론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것과 기상전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 걱정이 되신다면 거절하지 그러셨습니까.”
“그건…….”
하디드의 웃는 눈이 테헤누트를 바라봤다.
“왕께서도 기대하고 계신 게 아닙니까. 저 사내가 벌일지 모를 가슴 뛰는 기적을.”
테헤누트는 즉답하지 못했다.
어차피 호족들은 머지않아 왕실에 기상전을 제의할 터.
왕실을 향한 그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있다는 것을 테헤누트는 모르지 않았다.
‘성급한 자들. 조금만, 앞으로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을.’
불로불사의 연구는 거의 막바지다.
앞으로 10년, 아니 5년 안에 현자의 돌을 완성시킬 수 있으리라고 테헤누트는 확신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호족들이 기다려 줄 리는 만무하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시일이 흐를수록 호족의 단결력은 더욱 공고해질 테니까.
‘그리고.’
테헤누트의 눈이 경기장의 기수들을 훑었다.
‘카멘. 하세프. 네프티스.’
나머지 네 가문에 비해 월등한 기량을 갖춘 세 기수.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수로서의 역량이 완전에 다다르지 않은 지금, 밟아 두는 편이 좋다.
테헤누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하디드. 지켜볼 수밖에요.”
전투 코끼리 여덟 마리가 활개를 치며 다닐 수 있을 만큼 경기장은 넓었다.
아틸라를 제외한 일곱 기수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기도하는 자.
관객을 둘러보며 함성을 터뜨리는 자.
자신의 코끼리와의 교감을 확인하는 자.
그 모습을 보며 테헤누트는 옛 추억을 떠올렸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거늘.’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돌아갈 수 있다.’
불로불사의 연구만 마무리된다면.
테헤누트는 심판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허가를 확인한 심판이 크게 소리쳤다.
“시합 개시!”
여덟 마리의 코끼리가 한꺼번에 승부를 겨루는 기상전 초반은 으레 눈치 싸움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일곱 마리의 전투 코끼리가 일제히 아틸라에게 몰려들었다.
‘왕가의 기수를 먼저 쓰러뜨린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은 왕을 바꾸는 것.’
‘다음 시대의 왕이 누가 되느냐는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한 뒤 결정해도 늦지 않다.’
그랬다.
아틸라를 제외한 일곱 가문의 기수들은 담합했다.
왕가, 하토르의 기수를 먼저 쓰러뜨리기로.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전투 코끼리들을 보며 아틸라는 생각했다.
‘계속 시도하다 보면 스킬 레벨이 오르며 가능하게 될까 싶었더니.’
그간 아틸라는 전투 코끼리를 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 유목민의 승마술 ]
[ 시스템 오류 ]
[ 코끼리를 대상으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
동방 민족의 스킬, 유목민의 승마술은 코끼리를 대상으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건 덤.’
애초의 계획으로 돌아가면 될 뿐이다.
뿌우우우우!
그 와중에도 왕가의 코끼리는 아틸라를 떨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코끼리는 주인을 가린다.
충분한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대는 등에 태우려 하지 않는다.
‘빌어먹을 코끼리 새끼.’
기상전이 시작되려면 시합에 참가하는 모든 기수가 코끼리에 탑승하고 있어야 한다.
시합은 시작됐다.
아틸라는 미련 없이 코끼리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뭐, 뭐야!”
“설마 기권할 셈인가!”
“왕의 기수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권한다고?”
관객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물론 코끼리 등에서 내려온다고 패배가 확정되는 건 아니다.
다만 한 번 낙상(落象)한 기수는 다시 코끼리의 몸에 올라탈 수 없다.
다시 말해 기권 처리되는 건 기수가 아닌, 기수가 타고 있던 코끼리.
쿠쿵!
두 마리의 전투 코끼리가 아틸라의 코끼리를 밀어 넘어뜨렸다.
전투 코끼리는 거대한 덩치 탓에 한 번 넘어지면 쉽게는 일어서지 못한다.
기권 처리된 코끼리는 저렇게 넘어뜨려 두는 것이 기상전의 관례.
아울러 낙상한 기수는 부상 방지 차원에서 백기를 흔들어 기권 의사를 밝혔다.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의 힘으로 코끼리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후…….”
테헤누트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디드의 말을 믿고 일말의 기대감이라도 가졌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연구를 더 빠르게 진행해야겠어.’
새로운 왕이 결정된다 해도 그 즉시 왕좌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최소 1년, 길게는 2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조급해 하실 것 없습니다 왕이시여. 그의 눈빛은 아직 투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디드의 목소리.
이마를 짚은 손동작 그대로 테헤누트는 눈동자를 굴렸다.
창살처럼 늘어선 손가락 사이로 아틸라의 모습이 보였다.
테헤누트의 눈이 커졌다.
‘포기하지 않았다고?’
아틸라는 백기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선두의 코끼리를 향해 대항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인간의 힘으로 코끼리를 막아 보겠다고?’
기상전의 승리와 패배를 결정짓는 요인은 코끼리가 아닌 기수.
즉 기수가 죽거나, 전투 불능이 되거나, 항복할 때까지는 시합에서 진 것이 아니다.
아틸라는 지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 * *
기수 하세프는 자신의 코끼리를 향해 결사의 의지를 드러내는 야만인을 보며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제정신이 아니군. 보잘것없는 인간의 힘으로 코끼리를 상대하겠다고?’
하세프는 코끼리의 괴력을 잘 알고 있었다.
수십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힘을 합쳐 운반해야 하는 장비를 코끼리는 장난감처럼 들어 옮긴다.
‘적당히 위협하면 기권하겠지.’
하세프는 불필요한 희생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성왕이 되길 원했다.
왕좌를 얻기 위해 피를 묻히고 싶진 않다.
“기권해라 야만인! 그러지 않겠다면 이대로 밟고 지나가겠다!”
하세프의 위협에도 야만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를 더욱 넓게 벌리고 무릎을 구부려 자세를 낮췄다.
‘뭐, 뭐야. 정말로 막아설 생각인가? 진심으로?’
코끼리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다.
상대를 위협하기에 이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지금 저 야만인은.
하늘을 가릴 듯한 거대한 바위가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기분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녀석에게선 기권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한 번 속도를 붙인 코끼리는 쉽게 방향을 바꾸거나 멈춰 설 수 없다.
“빌어먹을……!”
야만인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하세프는 질끈 눈을 감았다.
퍼어억!
강렬한 충격이 하세프의 몸을 울렸다.
하세프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충격이, 느껴졌다고?’
인간이 벌레 한 마리를 밟는다고 충격을 느끼진 않는다.
그런데 방금, 하세프는 자신의 몸을 흔들 정도의 충격을 감각했다.
하세프에게 이런 감각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설마 다른 코끼리가?’
아니었다.
그그그그그그그그……!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아니, 땅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하세프를 태운 코끼리의 몸이 진동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관객들의 목소리가 하세프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하세프는 안장을 앞으로 당겼다.
흔들리는 눈으로 발밑을 내려 봤다.
그리고 보았다.
“저, 저게 무슨……!”
투트트트트트트틋……!
아틸라의 어금니가 악다물어졌다.
“크흐으으읍……!”
잇새로 뜨거운 숨이 휘몰아졌다.
근육이 내지르는 절규가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각오는 했었다.
그러나 직접 몸으로 마주한 코끼리의 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거 까딱 잘못하면……!’
아무리 아틸라가 가공할 용력을 지니고 있어도 인간의 근육량엔 한계가 있다.
결코 코끼리의 힘과 대등해질 수 없다.
그래서 아틸라는 비밀스러운 준비를 해 두었고, 하세프의 코끼리로 첫 타깃을 특정한 순간 전음으로 외쳤다.
‘처먹어라. 도롱뇽.’
어둠 속에 도사리던 도롱뇽이 쩌억 입을 벌렸다.
아틸라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 포식(捕食) ]
이어 헤아릴 수 없는 메시지가 빌딩처럼 치솟았다.
[ 환수, 도롱뇽이 뿔뱀(x3)을 포식했습니다. ]
[ 환수, 도롱뇽이 붉은 비늘 코브라(x2)를 포식했습니다. ]
[ 환수, 도롱뇽이 사막 도마뱀(x7)을 포식했습니다. ]
[ 환수, 도롱뇽이 방울뱀(x4)을 포식했습니다. ]
[ 환수, 도롱뇽이 흰 비늘 도마뱀(x3)을 포식했습니다. ]
[ 환수, 도롱뇽이…… ]
그와 함께 발동되는 스킬.
[ 포식의 주인 ]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아틸라의 몸에 넘칠 듯한 활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근력이 3% 상승합니다. ]
[ 근력이 2% 상승합니다. ]
[ 근력이 7% 상승합니다. ]
[ 근력이 4% 상승합니다. ]
[ 근력이 3% 상승합니다. ]
[ 근력이…… ]
그뿐만이 아니었다.
[ 야수 사냥꾼의 외침 ]
아틸라는 전사의 외침 대신 야수 사냥꾼의 외침을 선택했다.
[ 야수(野獸)를 상대로 관통력이 10% 증가합니다. ]
뿌드드득.
강철처럼 단단해진 아틸라의 손끝이 코끼리의 발바닥을 파고들었다.
양팔에 힘을 주었다.
전신에 힘줄이 돋아났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에서 핏물이 터졌다.
아틸라는 멈추지 않았다.
그를 압박하던 코끼리의 발이 들어 올려졌다.
“크아아아아아아!”
쿠웅!
떠오른 코끼리의 몸이 지면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