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83화 (83/425)

083. 늙지 않는 왕 (1)

테헤누트 하토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급작스러운 사고로 부왕을 잃고 왕위에 오른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일곱이었다.

‘테헤누트 하토르 국왕 전하 만세.’

지역의 호족들은 불만 없이 테헤누트를 왕으로 받들었다.

선대왕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던 성왕(聖王)이었고, 그의 핏줄을 이어받은 테헤누트 역시 왕국의 번영과 평화를 무탈히 이어 갈 거라 믿었다.

그러나 모든 호족들이 그런 생각을 가진 건 아니었다.

‘테헤누트가 왕이라고? 그 어린 것이?’

그들 중 일부는 호시탐탐 왕위를 노렸고, 선대왕의 승하 소식을 듣자마자 때가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전통은 지켜져야 하오!’

후마이야 왕국의 오랜 전통, ‘기상전(騎象戰)’.

그것은 왕위 계승권을 지닌 각 호족 가문의 대표 중 누가 가장 뛰어난 코끼리 기수인지를 겨뤄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 제도였다.

‘기상전을 제의하는 바요!’

후마이야 왕국에서 코끼리가 갖는 상징성.

그것을 이해하려면 크리엘도라 대륙의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길고 긴 전란의 시대를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춘 대륙의 왕국들.

그 틈에서 후마이야는 상대적인 평화를 누려 왔다.

드넓은 영토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인구를 지닌 후마이야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농경지로 활용 가능한 대지가 적어 정복에 대한 대가가 극도로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무시무시한 괴력을 지닌 전투 코끼리와, 그것을 부리는 코끼리 기수의 존재에 있었다.

‘후마이야 왕국의 전투 코끼리는 고도로 훈련받은 마상 기사 열 명을 능히 제압한다.’

실제로 후마이야의 어느 전설적인 왕은 스무 명이 넘는 마상 기사를 한꺼번에 상대해 쓰러뜨린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강력한 전투 코끼리였기에.

가장 뛰어난 코끼리 기수가 왕위를 차지하는 건 당시의 시대상으론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긴 세월은 때로 전통마저 흐려지게 만드는 법.

‘사막이 늘어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선가 후마이야 왕국을 흐르는 불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각 도시의 대표들은 수로를 잇고 척박한 대지를 개간하는 등, 점점 더 강성해지는 불의 힘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왕의 핏줄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생겨났고.

기상전의 전통은 찰나의 유흥거리로 변질되어 갔다.

그래서 왕위를 노리는 호족들에게 테헤누트는 말했다.

‘기상전의 전통은 사라진 지 오래요.’

그러나 호족들은 끈질겼다.

그들은 테헤누트의 왕위 계승에 집요하게 불만을 표했고, 결국 왕의 자리를 내건 기상전의 전통이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결과는.

‘이, 이럴 수가……!’

테헤누트의 압승(壓勝)!

‘어떻게 이런 일이!’

겉보기엔 그저 아름답고 연약한 소녀에 불과했던 테헤누트 하토르.

그러나 그녀는 선대의 의지를 이어받은 성왕의 재목이자 왕국 제일의 코끼리 기수였다.

호족들은 테헤누트에게 무릎 꿇었다.

‘테헤누트 하토르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렇게 혼란을 잠재운 테헤누트는 왕국의 평화를 지켜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선 테헤누트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늙어 가고 있어.’

언제나 젊음을 유지할 것 같던 아름다운 얼굴.

탄력 넘치던 육체.

그것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 해 테헤누트의 나이 서른셋.

제삼자의 눈에 비친 그녀의 외모는 이십 대 중반쯤으로 여겨질 정도의 꽃다운 젊음을 유지 중이었지만.

테헤누트의 마음은 달랐다.

‘이게 누구지?’

‘왜 내가 아닌 주름진 할망구 하나가 거울 속에 있는 거지?’

‘맙소사! 눈동자를 제외하면 이전의 내 모습을 찾아볼 수조차 없잖아!’

테헤누트는 불안해졌다.

‘이렇게 늙고, 쇠하고, 병들고, 그러다 어느 날 급사하게 되는 걸까? 나도? 아버지처럼?’

그럴 수는 없다.

자신은 왕국을 수호해야 한다.

왕위를 찬탈하려 기회를 엿보는 호족들로부터 왕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 생각은 수 년 뒤, 그녀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후 급격하게 가속했다.

‘내가 죽으면 왕의 피가 사라져.’

테헤누트는 왕실의 서적을 뒤졌다.

그렇게 왕국의 지나간 지식을 구하고, 타국의 학자를 초청해 그들의 머릿속을 엿보았다.

그러던 중 그녀는 연금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현자의 돌.’

연금술사들의 오랜 꿈.

그것을 손에 넣으면 불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테헤누트는 연금술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는 노움.’

그러나 신비의 종족 노움은 평범한 인간이 일평생 한 명을 만나 보기 어려울 정도로 희소한 존재.

길고 긴 수소문에도 테헤누트는 노움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인간 연금술사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찾아냈다.

‘라히샤 에스테르.’

어린 시절, 우연히 발견한 어느 고서를 통해 연금술을 익혔다는 그녀.

라히샤를 왕실로 불러들인 테헤누트는 연구실을 마련하고 아낌없는 지원을 퍼부었다.

그러나.

라히샤는 현자의 돌을 만들지 못했다.

‘현자의 돌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라히샤의 직언을 테헤누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테헤누트는 라히샤를 감금했다.

연금술사마저 포기한 연구를 지속하라 명했다.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현자의 돌은 제작되어야 한다.

자신의 변치 않는 젊음을 위해.

영생(永生)을 위해.

왕국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이제 멍하니 라히샤의 결과만을 기다릴 순 없다.’

테헤누트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다는 것을.

‘부왕께서 절대로 열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던 문(門).’

왕국의 존망이 걸릴 정도의 위기가 아니라면 절대로 손을 대선 안 된다는 후마이야 왕실의 오랜 비밀.

‘지금이 바로 그때다.’

테헤누트는 문을 열었다.

끼이익…….

음습한 소음을 내며 열린 문 안엔 끝도 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어둠 속을 내려 보던 테헤누트는 문 앞에서 만났던 낯선 후드의 여자를 떠올렸다.

‘불사는 축복이 아닌 저주이니라.’

그렇게 말한 여자는 문을 열지 말라는 말을 남긴 채 연기처럼 종적을 감췄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감각을 테헤누트는 애써 떨쳐 냈다.

자그만 횃불 하나에 의지하며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보았다.

‘이것은.’

둥근 제단 위에 놓인 책 한 권.

그것을 손에 들었다.

겉장의 먼지를 후, 불어 냈다.

“그대가 하디드 살만을 이겼다는 성전 기사로군요.”

테헤누트의 목소리가 아틸라의 상념을 깨웠다.

그녀의 과거를 돌아보던 아틸라의 머릿속이 현재로 돌아왔다.

“그렇소.”

“저를 찾으신 이유는?”

“왕께서 날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테헤누트의 얼굴이 기울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틸라 공.”

테헤누트는 하디드와 정기적으로 만나 성전을 두는 사이.

그래서 얼마 전, 하디드를 통해 아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스투리아 왕국에서 사절단이 다녀갔을 거요. 왕께서도 짐작하고 계시겠지. 머지않아 아스투리아가 멸망할 것이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듣고 싶군요.”

“당신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으니까.”

무례한 언사에 호위병들이 소리쳤다.

“네 이놈! 이곳이 어느 안전이라고!”

테헤누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호위에게 손짓해 물러나게 만들었다.

아틸라가 말을 이었다.

“아스투리아가 멸망하면 다음 차례는 노르드 왕국, 또는 후마이야 왕국이 될 거요. 그리고 현재 후마이야 왕국은 호족들과의 불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

“호오.”

“제아무리 후마이야 왕국에 전투 코끼리가 있다고는 하나, 아인하르트의 기세를 꺾긴 어려울 거요. 호족들이 단결하지 않는다면.”

“그래서요?”

“내가 해결해 주겠소.”

“어떤 방법으로?”

“호족들의 힘을 통합시킨 뒤 당신의 손에 넘겨주지.”

“홀로 전쟁이라도 치를 셈입니까 아틸라 공. 진짜 전쟁은 성전과는 다른 것입니다.”

“나에 관해 하디드 살만에게 전해 들은 건 성전 실력뿐이었소?”

그 말에 테헤누트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필요한 게 있습니까.”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전투 코끼리 한 마리와, 왕실에서 가장 커다란 항아리 하나.”

“항아리엔 뭘 담아 드리오리까.”

아틸라의 대답에 테헤누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진한 흥미가 담겼다.

“보수는?”

“라히샤 에스테르.”

아틸라의 눈이 테헤누트를 똑바로 향했다.

“연금술사 라히샤 에스테르를 만나게 해 주시오.”

* * *

“이게 무엇이더냐.”

숙소로 운반된 거대한 항아리를 보며 바토리가 물었다.

“전투 코끼리를 쓰러뜨리기 위한 특별 아이템.”

“뭐라?”

아틸라가 테헤누트에게 제안한 건 기상전이었다.

또한 그것은 테헤누트가 머릿속 계획으로만 남겨 둔 채 실현하지 못하던 일이기도 했다.

‘테헤누트는 더 이상 왕국 최고의 기수가 아니다.’

기수로서의 자질은 퇴화했다.

흘러간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 왕실엔 뛰어난 기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염원에 정신이 팔린 테헤누트는 기수 양성에 소홀했다.

반대로 호족들은 왕실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기수 양성에 힘썼다.

웬만한 몬스터나 마귀와 상대해도 밀리지 않는 괴력을 지닌 전투 코끼리의 존재는 가문의 전투력을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유의미한 척도였으니까.

‘일단은 왕의 권력을 되살린다.’

테헤누트가 왕위에 올라 일부 호족의 반발을 잠재웠을 때만 해도 후마이야는 아스투리아처럼 왕권이 강한 나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호족들은 언제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왕실에 불만을 품고 있다.

‘테헤누트는 각 도시에서 어린 소녀들을 차출하고 있다.’

명목은 왕실의 시녀를 선발하고 교육한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호족들 역시 왕에게서 무언가의 낌새를 느꼈다.

무엇보다 늙지 않는 왕의 외모가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젊어지고 있지.’

그런 불안정한 왕국의 정세를 이용해 아틸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채울 생각이다.

첫째는 연금술로 현자의 돌을 보수하는 것이고.

둘째는 후마이야를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되돌려 샤를의 패도를 지연시키는 것.

‘지금의 샤를이 전투 코끼리마저 손에 넣는다면.’

질주하는 사자의 등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 될 테니까.

“펀치.”

아틸라의 의도를 눈치챈 펀치가 퉤, 도롱뇽을 뱉었다.

“뭐, 뭐야. 또 무슨 이상한 걸 시키려고…….”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도롱뇽을 보며 아틸라는 웃었다.

* * *

거대한 원형 경기장.

오랜만의 기상전 소식에 들뜬 관객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들었다.

“뭐야. 자네도 왔나? 공사 일은 어쩌고.”

“지금 일이 중요한가! 왕국의 주인이 바뀔 시합인데!”

그랬다.

이번 기상전은 왕위를 결정짓는 시합.

아울러 하토르 왕가가 이길 경우 각 가문의 모든 코끼리 기수를 왕실로 보낸다는 조건이 끼어 있었다.

아인하르트와의 전쟁을 대비한다는 명목이었기에 호족들은 그 조건을 거부하지 못했다.

‘교활한 왕 같으니.’

각지의 호족들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관객석으로 들어섰다.

경기장 안에서는 코끼리 등에 올라탄 기수들이 시합 개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 아틸라도 있었다.

호족들은 생각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어디서 출신 모를 야만인 하나를 데려다 기수를 맡기다니. 정녕 테헤누트는 미쳐 버린 것인가.’

‘기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코끼리와 함께 생활하며 교감을 나눠야만 가능한 일.’

‘교감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지. 유능한 코끼리 기수는 하늘이 점지해 준다는 말은 허투루 나온 게 아니니까.’

호족들이 아틸라를 보며 비소했다.

그러나 그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펼쳐지게 될 아틸라의 마법을.

그리고.

“시합 개시!”

개전의 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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