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81화 (81/425)

081. 다시 후마이야 왕국으로 (1)

“이곳?”

아틸라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잠시 후, 바토리가 말하는 ‘이곳’이 지금 앉아 있는 장소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바토리가 다시 물었다.

“넌 어디서 온 것이더냐.”

“그게 하고 싶다던 질문인가?”

“그건 아니니라.”

바토리의 시선이 머리 위를 향했다.

영겁의 세월이 흘렀다 생각했거늘, 저 밤하늘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 하나 없었다.

멸망을 앞둔 왕국의 철부지 공주였던 시절과. 조금도.

바토리는 고개를 돌려 아틸라와 눈을 맞췄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아틸라를 바라봤다.

검고 긴 머리카락.

그 속에서 빛나는 검은 눈.

하얀 송곳니.

그녀의 질문이 좁혀졌다.

“넌 이전에도 날 만난 적이 있지 않았더냐.”

아틸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의 질문은 아틸라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전에도 그녀를 만난 적이 있느냐고?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구상한 머릿속 세상에서의 만남도 만남이라 할 수 있다면 대답은 긍정일 것이다.

“꼭 답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바토리의 눈빛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길과 함께 춤을 추었다.

아틸라는 문득 그녀의 얼굴이 지금까지 봐 왔던 모습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변한 건 아니다.

다만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무언가가, 말로는 정확히 표현하지 못할 무언가가 달라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아틸라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적 없다.”

“……진심이더냐.”

“그래.”

“그렇구나. 그러한 것이로구나.”

그녀의 얼굴에 실망이 번졌다.

“알겠느니라.”

바토리는 자리에 누웠고, 금세 잠이 들었다.

* * *

“빌어먹을 할망구. 그러게 폭주는 왜 해가지고.”

“그건 내 의지와 무관한 것이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 아니더냐.”

“다행은 개뿔. 파울루 녀석이 종적을 감춰 버렸으니 이제 어떡할 거냐.”

아틸라는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아틸라가 슈시아를 서리나무숲까지 배웅한 이유는 파우스트의 습격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에서 바토리는 필요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결국 현자의 돌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곳저곳 금이 간 현자의 돌을 내려 보며 아틸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네가 만티코어와 그렇게나 눈에 띄는 싸움을 한 탓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니.”

상황은 이랬다.

지난번, 아틸라와 싸우다 도롱뇽의 포식에 당해 상공으로 도망쳤던 만티코어.

녀석을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

그리고 결국 군대가 동원돼 키다리 산을 이잡듯 뒤졌던 것.

‘그런 소란을 노움이 견딜 리 없지.’

연금술사 파울루는 자신의 거처를 옮겼다.

다시 말해 아틸라는 파울루를 통해 현자의 돌을 수리할 수 없게 되었다.

“뭐 상관없지 않느냐. 네가 날 지켜 주면 될 터이니.”

바토리가 은근슬쩍 아틸라에게 몸을 기대려 했지만 아틸라는 빠른 걸음으로 피했다.

입술을 비죽 내밀며 바토리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더냐.”

원래는 파울루에게 현자의 돌을 수리받은 뒤 다음 목표를 향하려 했다.

그 목표란.

‘리베르의 구속을 해제할 오르피나의 성물 찾기.’

그러나 그것보다 현자의 돌 보수가 더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파우스트와의 결전이 가까워지고 있는 이때, 바토리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은 위험하다.

‘바토리를 향한 파우스트의 관조 또한 더욱 용이해졌을 테고.’

즉, 녀석들이 아틸라와 바토리를 습격할 확률과 빈도가 더욱 증가할 거라는 의미.

‘귀찮아졌군.’

놈들은 100퍼센트 소환율의 만티코어로도 아틸라를 제거하지 못했다.

다음에 찾아올 녀석은 분명 그보다 월등한 녀석일 터.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도롱뇽의 포식이 없었다면, 난 만티코어를 제압하지 못했다.’

처음 등장했던 60퍼센트 소환율의 만티코어라면 몰라도.

100퍼센트 소환율은 무리다.

그렇다면 다음번에 등장할 파우스트의 자객은 혼자 힘으로 막지 못할 공산이 크다.

‘그것에 대응하려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현자의 돌을 수리해야 한다.

그러나 파울루는 알 수 없는 곳으로 종적을 감췄다.

‘물론 이 세계에 노움 연금술사가 파울루 하나만 있는 건 아니지만.’

당연한 이야기다.

노움은 대륙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고, 그중 파울루와 비견될 만한 실력을 지닌 노움은 여럿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먼 곳에 있다.

그곳까지 찾아가는 길에 무슨 위협이 발생할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는.’

아틸라와 바토리가 부재중인 상황에 파우스트와 서리나무 엘프들 간에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아틸라는 당분간 서리나무숲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선 안 되었다.

‘후마이야 왕국 너머, 노르드 왕국 정도가 한계겠지.’

그리고 그 정도 범위 안엔 뛰어난 노움 연금술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틸라는 차선책을 쓰기로 했다.

‘임시방편이긴 할 테지만, 어쩔 수 없나.’

파울루만큼은 아니지만, 인간 연금술사 중에서 상당한 실력을 가진 자가 있다.

그자라면 현자의 돌을 완벽하게 수리하진 못해도, 어느 정도 사용 가능한 수준으로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틸라는 바토리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후마이야 왕국으로 간다.”

* * *

후마이야 왕국으로 되돌아가 인간 연금술사의 도움을 받으려던 아틸라의 계획은 생각지도 않은 난관에 부딪쳤다.

“너희들. 후마이야 왕국으로 넘어갈 수 없다.”

국경을 넘으려는 아틸라와 바토리를 열 명의 무장 경비가 가로막았던 것.

“뭐라고?”

“관문은 폐쇄됐다.”

아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슈시아 배웅을 위해 이곳을 지나올 때까지만 해도 관문은 폐쇄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이냐.”

경비병 뒤로 군마를 탄 기사가 다가왔다.

아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복장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스투리아 왕실 직속 친위대.

흑곰 기사단.

‘왕의 군대가 이곳에 주둔한 것인가.’

흑곰의 기사가 말했다.

“아인하르트의 군세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에 따라 왕께서 칙령을 내리셨다. 금일부로 후마이야 왕국으로 통하는 관문은 폐쇄되었다.”

아틸라의 예상대로.

이곳 필리쁘 변경백령엔 왕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샤를의 폭풍 같은 진격이 아스투리아 왕마저 후방으로 피신하게 만든 것.

‘필리쁘 변경백은 왕과 사촌 지간이니 전열을 재정비하긴 안성맞춤이겠지.’

또한 필리쁘 변경백령은 후마이야 왕국으로 지원을 요청하기도 알맞은 장소.

분명 왕의 사절단이 이미 후마이야 왕국으로 떠났을 것이다.

‘아울러 병사로 활용할 만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관문을 폐쇄했다.’

기사의 눈이 아틸라의 탄탄한 몸과, 무기를 훑었다.

“용병인가.”

“그렇게 보이나.”

“용병이라면 무기를 들고 싸워라. 저 간악하고 비열한 아인하르트의 군세를 물리치고 나면 왕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이다.”

‘역시.’

지금의 아스투리아는 병력 하나가 아쉬운 상황.

때마침 등장한, 더욱이 누가 봐도 뛰어난 실력을 지녔을 법한 기운을 마구 뿜어대는 전사를 순순히 국경 너머로 보내 줄 리 없다.

“국경은 막혔고, 머지않아 이곳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된다. 제 한 몸 간수하려 도망치는 것보다 우리 왕실 직속 기사단과 힘을 합쳐 싸우는 편이 조금이라도 생존율을 높일 수 있을 터.”

기사의 눈이 슬쩍 바토리를 향했다.

“저쪽의 여자도 용병인가.”

아틸라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기사의 눈이 다시 아틸라를 바라봤다.

“덩치와 무기를 보아하니 이름깨나 날리는 용병인 것 같은데, 어떤가. 네가 아스투리아의 용병으로 전쟁에 참여한다면 여자 쪽은 책임지고 보호해 주겠다.”

“흐응? 어떻게 보호해 주겠단 말이더냐.”

갑자기 끼어든 바토리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예스러운 말투에 기사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는 크게 인상을 구겼다.

“제 나라의 수도 하나 지키지 못해 이곳까지 도망친 신세가 아니더냐. 그런데 날 보호하겠다고?”

“네 이노오옴!”

분노한 기사가 검을 뽑았다.

열 명의 경비병도 저마다 창검을 들어 겨눴다.

아틸라는 무심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빌어먹을 할망구. 왜 도발을 하고 지랄이야.’

눈앞의 기사와 경비병을 쓰러뜨리고 후마이야 왕국으로 건너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샤를은 벌써 아스투리아의 영토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이건 아틸라조차 예상치 못한 급전개다.

브뤼노 백작령에서 마귀들에게 발목이 잡혔던 일을 만회라도 하려는 것처럼, 샤를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적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

물론 샤를이 어서 빨리 남부 왕국을 통일하고 요정섬을 방문하는 것은 아틸라가 누구보다 바라는 일이다.

그러나 샤를의 패도는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처럼 급박한 전개는 위험하다.

‘그것이 샤를의 숨겨진 힘을 일깨울 수 있으니까.’

샤를은 두 개의 상반된 힘을 몸 안에 지니고 태어났다.

그중 하나는 샤를이 남부의 패왕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긍정적 촉매가 되지만.

나머지 하나는.

‘절대로 각성하게 둬선 안 된다.’

그 힘이 개화한다면 대륙, 아니 패영전 세계 전체에 엄청난 혼돈이 야기될 것이다.

패영전 스토리의 근간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는 이야기.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샤를은 예정대로 움직여야 하고, 반드시 요정섬을 찾아야 한다.

아틸라는 바토리를 돌아봤다.

생글생글 미소하는 그녀의 얼굴.

‘설마 바토리도 그것을 느끼고.’

“무릎 꿇고 사죄해라! 넌 지금 흑곰 기사단과 왕실을 모욕했다!”

“허언을 내뱉은 건 네놈이 아니더냐. 난 조금도 사과하고 싶지 않구나.”

“뭐라고오오!”

기사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느냐! 어서 놈들을 무릎 꿇려 내 앞으로 끌고 와라!”

병사들이 아틸라에게 달려들었다.

선두의 두 병사가 커다란 방패를 들이밀었다.

아틸라는 주먹을 쥐고, 방패를 향해 뻗었다.

퍼엉!

방패병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두 번째 주먹은 또 다른 방패병을 방패째 바닥에 꽂았다.

그 순간 세 자루 창이 날아들었다.

한 자루는 겨드랑이에 끼어 부러뜨리고, 나머지 두 자루는 양손에 쥐고 휘둘러 창병을 날렸다.

부러진 창자루를 보며 어이없어하던 첫 번째 창병이 아틸라의 발길질에 나동그라졌다.

“뭐, 뭐야!”

기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병사가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

더욱 놀라운 건 상대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해냈다는 것.

‘보, 보통의 용병이 아니다.’

그러는 사이 두 명의 병사가 추가로 바닥에 엎어졌다.

남은 병사는 셋.

아틸라와 기사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우와아아아!”

“으힉! 으히이이익!”

“비, 빌어먹을……!”

이미 기세에서 진 싸움이었다.

아틸라는 앞선 일곱 병사보다 더욱 손쉽게 그들을 제압했다.

그렇게 싸움이 끝났다.

맨손을 탁탁 털며 선 용병.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병사들.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기사는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사의 머릿속이 환기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 우락부락한 덩치의 전사와 싸움을 이어 가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 어디까지 가십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