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80화 (80/425)

080. 바토리의 물음

바토리의 눈동자가 투명해졌다.

“그러니까 돌아와라.”

아틸라의 검은 눈이 바토리를 똑바로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향하고, 허공에 얽히고, 상대의 눈 속 어딘가에 닿았다.

“……야만전사야.”

광채를 잃었던 눈동자가 원래의 빛을 찾았다.

“왜.”

“한 번 더 이름으로 불러 주면 안 되겠느냐.”

“…….”

언제 그랬냐는 듯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바토리를 보며 아틸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헛소리 지껄이는 거 보니 돌아오긴 한 모양이군.”

“내 다 들었단다.”

“뭘.”

“내 두 볼을 이리 살포시 붙잡고, 아이 어르듯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 주던 것을 말이다.”

난 멱살을 잡았는데.

“아아……, 불현듯 현기증이 밀려오는구나. 그래. 내 아직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게야…….”

헛소리다.

주변의 풍경도, 도롱뇽을 이 잡듯 두들겨 패던 지옥불정령도, 슈시아에게 화살을 쏘아 대던 일리시아도, 모두 종적을 감췄다.

바토리가 쓰러지듯 아틸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머리가 아프구나. 아틸라.”

“머리털을 전부 뽑아 버리면 나을지도 모르지.”

“…….”

“비켜라.”

“참으로 야속한 말만 하는구나. 너는.”

바토리가 물러서지 않자 아틸라는 손으로 밀어냈다.

바토리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졌다.

“아틸라.”

어느새 둘의 곁엔 슈시아와 펀치가 다가와 있었다.

갇히기 싫다며 발악하는 도롱뇽을 꿀꺽 삼킨 펀치가 아틸라의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펀치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아틸라가 말했다.

“가자.”

성큼성큼 발을 움직였다.

환술 결계는 바토리에게 너무도 많은 마력을 소모한 탓인지 상당히 옅어져 있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래서 보였다.

저만치 기울어진 나무 기둥에 걸터앉은 일리시아의 모습이.

“대단하군.”

짧은 한 마디였지만 많은 것이 함축된 말이기도 했다.

무심한 얼굴로 아틸라가 답했다.

“더 해볼 텐가.”

“아니. 그러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군.”

환술에 지배당한 바토리 에르제베트마저 격파한 사내.

그런 자에게 이제 와 대항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너 같은 인간 전사가 있었다니.”

자조적인 미소를 짓던 일리시아가 고개를 들어 바토리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 더 이상 증오의 빛은 남아있지 않았다.

슈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슈시아 세이나자르.”

세이나자르.

오랜 엘프의 역사 속에서 오직 발키리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

“가까이 오너라.”

갑작스러운 말에 슈시아는 머뭇댔다.

바토리와 아틸라를 돌아봤다.

“가보려무나.”

바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제야 슈시아는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건…….”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뒤를 돌아봤다.

아틸라와 바토리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져 있었다.

‘당황하지 말거라.’

온후한 목소리가 슈시아를 인도했다.

직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일리시아의 음성.

‘내 손을 잡거라.’

희게 변한 허공 속에서 두 손이 내밀어졌다.

손을 뻗어 일리시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슈시아를 둘러싼 세계가 변했다.

‘우리는 전장의 발키리, 세이나자르.’

‘갈라진 일족의 굴레를 넘어선 위대한 엘프의 창.’

풍경으로, 그녀의 머릿속으로 발키리들의 형상과 음성이 차올랐다.

‘활을 들어라.’

‘화살을 매겨라.’

‘적을 향해 겨누어라.’

슈시아의 손에 새하얀 빛의 활이 들렸다.

‘새로운 발키리의 시조여.’

활에서 솟아나는 특별한 마력이 슈시아의 몸을 타고 흘렀다.

전신을 활보하며 맥동하던 그것이 심장에 집약됐다.

‘활을 들어라.’

슈시아는 활을 들었다.

‘화살을 매겨라.’

화살을 매겼다.

‘적을 향해 겨누어라.’

눈앞의 흐릿한 형체를 향해 겨눴다.

검은 안개처럼 보이던 그것이 눈부신 흰빛으로 변했다.

슈시아는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일리시아 세이나자르.’

‘먼 옛날, 파우스트를 물리쳤던 발키리들의 수장.’

부드러운 음성이 귀에 스몄다.

‘쏘아라.’

슈시아의 어깨가 떨렸다.

‘그래야만 넌 발키리의 힘을 새길 수 있다.’

슈시아는 할 수 없었다.

일리시아는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홀로 발키리의 힘을 지켜 왔다.

그녀가 얼마나 지옥과도 같은 삶을 이어 왔는지 슈시아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슬퍼하지 말거라.’

무형의 손길이 다가와 두 뺨의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인도했다.

‘슈시아 세이나자르.’

그것은 슈시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이것으로.’

화살을 매긴 오른손의 힘이 풀어졌다.

‘그대가 새로운 발키리의 시조다.’

소리 없이 날아간 빛의 화살이 일리시아의 심장을 뚫었다.

헤아릴 수 없는 빛의 가닥으로 화해 소멸하는 그녀의 마지막 얼굴에선 아무런 미련도 발견되지 않았다.

슈시아는 발키리의 힘을 얻었다.

* * *

달마저 모습을 감춘 깊은 밤.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아틸라와 바토리는 앉아 있었다.

펀치는 도롱뇽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아쉽지 않은 것이더냐.”

“뭐가.”

“슈시아 말이다.”

슈시아는 서리나무숲으로 돌아갔다.

“아쉽긴 개뿔.”

모닥불에 장작 하나를 던져 넣으며 아틸라가 말했다.

오늘 아침 보았던 슈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배웅에 감사한다. 아틸라. 바토리.’

그렇게 말하는 슈시아는 이전보다 당당하고, 고고해 보였다.

자신을 둘러싼 무형의 껍질 하나를 완전히 벗어 낸 듯한 모습.

그 모습에 아틸라는 만족했다.

원작에서와 달리 메피스토펠레스의 정신 공격을 받은 대상은 슈시아가 아닌 바토리였지만.

‘결과물은 다르지 않았다.’

원작에서 샤를의 업적은 슈시아에게 발키리의 힘을 계승시킨 것만이 아니다.

슈시아의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바로잡고, 아울러 그녀가 새로운 발키리의 시조로서 성장하기 위한 필수불가결 요소인.

‘고결한 영혼을 각인시킨 것.’

슈시아는 일족의 보물을 잃어버리고 서리나무숲에서 추방된 뒤 오랜 시간을 바깥세상에서 살아왔다.

그것은 슈시아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일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후회.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

그럼에도 그럴 수 없어 낯선 인간들 틈에서 자신을 숨긴 채 살아야 했던 시간.

‘그것은 슈시아를 인간도, 그렇다고 엘프도 아닌 양면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만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의 언어와 엘프의 언어를 뒤섞어 사용했던 것이 그 예.

슈시아는 미숙했다.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여타 엘프와 달리, 그녀는 자신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상대에게 표출했다.

‘마치 인간처럼.’

그랬다.

슈시아의 성정은 엘프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가까웠다.

물론 그것이 슈시아에게 부정적인 영향만을 끼친 건 아니다.

인간과 함께했던 시간은 그녀가 지닌 특별한 힘, ‘직관’을 더욱 강력한 것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추방된 엘프는 자신의 정체를 인간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서리나무 엘프의 규율.

그래서 슈시아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도록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인간의 표정과 말투,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또 대응해야 했다.

그것이 그녀의 직관을 더욱 정교하게 세공시킨 건 당연한 일.

한편 슈시아는 본래 지녔던 엘프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예를 들어 길잡이 숲 순찰대원들의 동선을 파악해 일족의 소식을 전해 듣던 일이 그것이다.

아틸라가 처음 슈시아를 만났을 때 그녀의 집에 두 명의 서리나무 순찰대원이 있었던 이유.

아무튼.

그런 미숙한 성정을 지니고 있던 슈시아가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을 겪은 뒤 변화했다.

원작과 달리 환술 경계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닌 바토리였음에도.

‘이유는 아마도.’

슈시아는 일리시아와 대적해 싸웠다.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일리시아에게 직관의 힘을 사용했을 테고.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에서 슈시아의 강인한 의지와 결합한 직관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 눈으로 보았겠지.’

일리시아의 기억.

그리고 의지를.

“동료로 삼으려던 것이 아니었더냐.”

바토리의 말에 아틸라는 무심히 답했다.

“글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슈시아가 서리나무숲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지 않았나.”

“역시 알고 있던 것이더냐.”

슈시아가 습득한 발키리의 힘은 이전 시대의 것과는 달랐다.

‘일리시아가 오랜 시간 스스로의 몸 안에서 발전시킨 힘.’

그것은 슈시아 주변의 엘프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엘프의 종족 특성 ‘발키리의 힘’이 새로운 형식으로 부활한다는 의미.

‘그러나 시간이 필요하겠지.’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거다.”

파우스트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파우스트는 발키리의 부활을 눈치챘을 게다.”

“그렇겠지.”

아틸라가 슈시아에게 발키리의 힘을 전승시킨 것은 파우스트 입장에서 마른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다.

이제 놈들은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서둘러 일을 진척시키려 할 거다.

어쩌면 벌써 서리나무숲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걱정하지 말거라. 슈시아라면 잘 해낼 것이다.”

“걱정은 무슨.”

“흐응.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구나, 너는.”

바토리의 눈이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아틸라가 따지듯 물었다.

“할망구. 너야말로 언제부터 슈시아를 알고 지냈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냐.”

“뭬야? 너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더냐. 일리시아의 환술 속에서 슈시아가 보여 줬던 능력을.”

그건 바토리의 말이 맞다.

슈시아는 일리시아를 상대로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펀치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그러나 환술 경계의 주인인 일리시아를 상대로 그 정도로 선전할 거라곤 아틸라도 예상치 못했다.

‘원작보다 강하게 성장할 건 분명하겠군.’

“야만전사야.”

아틸라는 생각을 멈추고 바토리를 돌아봤다.

부르는 목소리가 무언가 다르다.

“묻고 싶은 게 있느니라.”

“뭔데.”

바토리는 입술을 옴지락댈 뿐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손가락 역시 가만두지 못하고 깍지를 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이번만은 꼭 답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리해 줄 수 있겠느냐.”

“들어보고.”

“그러지 말고 약속해 주려무나. 꼭 사실대로 답해 주겠다고.”

“말 안 할 거면 잠이나 자라.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바토리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자그만 한숨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양팔이 무릎을 감쌌다.

그러자 자연스레 숙여진 얼굴이 모닥불과 가까워졌고, 한층 환해진 광원과 짙게 드리운 음영이 그녀의 조각처럼 섬세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불티처럼 흔들리는 바토리의 속눈썹은 길고 아름다웠다.

“……내가 그리 널 귀찮게 했더냐.”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이윽고 침묵을 깨며 바토리가 입술을 뗐다.

“넌 이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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