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79화 (79/425)

079. 망국의 공주 (4)

‘불가한 일이다.’

멸망한 왕국의 신이시여.

당신의 도움이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신(主神)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바토리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오르피나와 바토리를 잇던 마력의 실타래가 진동을 시작했다.

점점 어두운 빛으로 바뀌었다.

‘핏빛의 마녀야.’

바토리의 오른손이 자신의 왼쪽 어깨를 짚었다.

‘멈추어라.’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벌어진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감당하겠나이다.

퍼어엉!

그녀의 오른손에서 발화의 마력이 펼쳐졌다.

새까맣게 타버린 왼팔이 잿개비가 되어 흩어졌다.

‘신들의 분노가 너를 향할 것이다.’

모쪼록 그리하도록 하십시오.

멸망한 왕국의 신이시여.

‘주신의 분노가 너희를 벌할 것이다.’

새로운 주신을 찾겠나이다.

고오오오오오.

마력의 실이 검붉은빛으로 변했다.

그것이 바토리의 절단된 왼쪽 어깨로 집약되기 시작했다.

휘리릭. 휘리리리릭.

실은 새로운 형상을 갖췄다.

가련한 여인의 팔.

나약한 인간의 팔.

아니.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핏빛의 마녀야.’

그렇게 말하는 오르피나의 왼팔은 보이지 않았다.

‘넌 돌이킬 수 없는 금기를 저질렀다.’

오르피나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머물렀다.

‘그러나 나 또한.’

‘이리 될 줄 알고 있었으니.’

오르피나의 몸이 검게 변했다.

흐물흐물 액체가 되어 녹아내렸다.

‘나는.’

액체가 말했다.

‘파멸의 신, 오르피나.’

그리고 지면 아래로 사라졌다.

* * *

퍼어어어엉!

신의 왼팔이 불꽃을 흩뿌렸다.

드래곤의 브레스가 그것을 막았다.

“죽음의 숨결!”

바토리의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타오르는 양손이 바닥을 짚었다.

복구됐던 지면이 다시금 흔들리고, 갈라졌다.

‘또다시 망령들을 불러낼 생각인가.’

아니었다.

무언갈 불러낸 것은 맞았지만.

그것은.

쿠쿠쿠쿠쿠쿵.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거인이 지면을 뚫고 몸을 일으켰다.

거인의 전신은 메마른 대지처럼 이곳저곳이 갈라져 있었고, 그 사이로 녹빛의 지옥불이 타올랐다.

아틸라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지옥불정령.”

까다로운 상대가 등장했다.

저것은 무려 고위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수다.

바토리의 의지가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력을 흡수하고, 발현한 것이다.

“히에에에엑!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저런 것도 할 줄 알았다고!”

도롱뇽이 기겁해 소리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앙!

어디선가 쏘아진 검은 마력의 화살이 아틸라에게 쇄도했다.

그것을 튕겨 내며 아틸라는 머리 위를 올려봤다.

허공을 뚫고 등장하는 날렵한 형체.

“일리시아 세이나자르.”

아틸라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바토리 하나만으로도 쉽지 않았는데, 지옥불정령에 이어 일리시아까지 등장했다.

그때 슈시아가 외쳤다.

“아틸라! 일리시아는 내가 맡겠다!”

그녀의 외침은 아틸라를 다소 놀라게 했다.

슈시아에게 일리시아는 벅찬 상대.

그러나 슈시아의 얼굴을 돌아본 아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슈시아의 눈동자는 이제까지 본 적 없던 강렬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지닌 특별한 힘.

아틸라는 그것에 걸어 볼 생각이었다.

‘원작에서도 슈시아는 일리시아의 정신 공격을 끝까지 버텨 내지.’

바실리스크의 석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로 미숙한 면이 존재하는 슈시아지만.

동족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그런 그녀가 엘프의 오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엘프의 종족 특성을 앗아간 파우스트.

파우스트를 조종하는 메피스토펠레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길고도 긴 세월을 홀로 대항 중인 일리시아.

슈시아는 알 수 있었다.

환술 속에서 더욱 강력해진 ‘직관’의 힘이 일리시아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았다.

그녀의 강인한 의지.

슬픔.

그리고 번뇌를.

“일리시아 세이나자르!”

슈시아의 양손에 단검이 쥐어졌다.

일리시아를 향해 달렸다.

끼아옹!

펀치가 슈시아의 뒤를 따랐다.

타앙! 일리시아가 쏘아 낸 화살이 슈시아에게 쇄도했다.

아틸라는 펀치의 스킬, 거대화를 시전했다.

우어어어!

펀치의 발톱이 화살을 튕겼다.

슈시아는 바람처럼 날렵하게 펀치의 등에 올라탔다.

“가자. 펀치!”

슈시아를 등에 태운 펀치가 쿵쿵대며 일리시아에게 달렸다.

그러는 사이 바토리의 머리 위엔 두 자루의 핏빛 칼날이 떠올랐다.

그걸 본 도롱뇽이 고슴도치처럼 비늘을 세웠다.

“마, 마멸의 칼날!”

도롱뇽은 저것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빌어처먹을. 저걸 또 보게 되다니.”

“브레스로 못 막냐?”

“예, 예전의 몸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무능한 새끼. 기대도 안 했다.”

폭풍처럼 마멸의 칼날이 짓쳐들었다.

소환이 마무리된 지옥불정령이 괴성을 토했다.

아틸라는 도롱뇽에게 의지를 전달해 브레스를 내뿜었다.

파드드드드드……!

역시나 완전하지 못한 브레스는 마멸의 칼날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상당량의 마력을 상쇄했다.

‘아무리 약해졌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라는 거군.’

바토리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전성기의 둘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몇 수는 위다.

하지만 지금의 둘에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의지의 주체.’

바토리의 몸은 환영이 아닌 실체.

실제의 육신에서 발하는 의지는 강력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분노의 대상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마저 눈앞에 나타난 상태.

‘반면 도롱뇽은.’

실제의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바토리와 같지만 결정적인 것이 다르다.

바토리와 달리, 도롱뇽은 아틸라의 의지를 전해 받아 움직인다.

‘게다가 저런 나약한 몸으로 전락해 버렸고.’

인간이 된 바토리도 상당한 마력을 잃었지만.

이곳에서는 의지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했다.

그에 반해 도롱뇽이 잃은 힘은.

‘바토리에 비할 바가 아니지.’

이런 이유로.

지금의 도롱뇽은 바토리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결국 내가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군.’

“도롱뇽. 네가 지옥불정령을 맡아라.”

“뭐?”

도롱뇽이 날개를 펼쳐 지옥불정령에게 비행했다.

물론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빌어먹을! 날개가 또 제멋대로!”

그 사이 마멸의 칼날은 아틸라의 코앞까지 근접했다.

그것을 향해 아틸라가 무휼을 뻗었다.

“그렇게 둘 줄 아느냐.”

마멸의 칼날이 뱀처럼 몸을 틀었다.

선회하는 물고기처럼 방향을 바꿔 무휼을 피한 두 자루 칼날이 좌우에서 아틸라를 습격했다.

아틸라의 눈이 빛났다.

‘지금이다.’

바토리가 칼날 제어에 모든 힘을 쏟고 있는 지금이 기회.

아틸라는 반지의 힘을 개방했다.

[ 이프리트의 반지 ]

[ 짧은 시간 이프리트를 소환해 함께 싸울 수 있습니다. ]

화르르르르륵……!

바토리의 등 뒤에서 거대한 불꽃이 솟아났다.

그것을 확인한 바토리가 비소를 내뱉었다.

“이프리트. 네놈 따위가.”

아틸라는 등 뒤로 몸을 날려 마멸의 칼날을 회피했다.

그러자 칼날이 미사일처럼 방향을 틀어 아틸라에게 쇄도했다.

“하아압!”

두 개의 방향에서 하나의 방향으로 바뀐 핏빛 칼날.

그것을 향해 재차 무휼을 뻗었다.

[ 대마법병기 ]

콰콰쾅! 벼락이 치는 듯한 소음을 내며 무휼이 칼날을 강타했다.

도롱뇽의 외침이 들렸다.

“마, 마침 잘 왔다 촛불! 어서 이놈을 상대해!”

“하, 하지만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님! 저도 고위악마의 환술 속에서는 제대로 된 힘을……!”

“시끄러! 이 미개한 촛불 찌끄래기 새끼! 어서 이몸을 돕지 못할까!”

아틸라에게서 멀어진 도롱뇽의 몸은 그새 형편없이 작아져 있었다.

그런 도롱뇽을 향해 지옥불정령이 주먹을 내질렀고, 도롱뇽은 혼비백산하며 이프리트의 뒤에 숨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 환수, 이프리트가 소멸했습니다. ]

‘빌어먹을. 빨리도 뒤지네.’

[ 환수, 이프리트가 자신의 성역으로 귀환합니다. ]

어차피 큰 기대는 안 했다.

성역을 떠난 것도 모자라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에 진입한 이프리트가 제 실력을 낼 리는 만무했으니까.

‘녀석은 단지 바토리의 집중력을 흩트리기 위한 미끼였을 뿐.’

아틸라는 무휼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멸의 칼날을 노려보며 강인한 의지를 불어넣었다.

아틸라의 몸 근육이 더욱 거대하게 부푸는가 싶더니 마멸의 칼날이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아압!”

요란한 소음을 내며 칼날이 튕겨났다.

두 방향으로 갈라진 칼날의 틈새로 바토리의 모습이 보였다.

검투 태세로 전환했다.

[ 돌진(突進) ]

파아아앙!

이번엔 성공이었다.

도롱뇽과 이프리트에게 시선이 분산된 바토리는 아틸라에게 돌진을 허용했다.

코앞으로 근접한 아틸라를 보며 바토리는 왼팔의 힘을 개방했다.

추가로 생성된 핏빛 칼날이 단두대처럼 아틸라에게 추락했고, 따돌렸던 두 자루 칼날도 후미를 노리며 쇄도했다.

아틸라는 다시금 태세를 전환했다.

[ 방어 태세에 돌입합니다. ]

[ 보조무기 숙련도가 20% 증가합니다. ]

이프리트의 숫돌을 무휼에 발랐다.

[ 절삭력이 상승합니다. ]

[ 공기 저항이 감소합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 축성의 인장이 발동합니다. ]

타리엘에게서 받은 무적자의 증표, 축성의 인장.

그것을 착용한 채 수많은 망령을 쓰러뜨린 아틸라의 몸엔 차곡차곡 성력이 쌓여 있었고.

리베르와 싸우며 한계에 다다랐다.

[ 축성의 인장 발동 효과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그것을 일거에 개방했다.

[ 모든 성력을 무휼의 형상 변환에 집중합니다. ]

무휼의 검신이 진동했다.

극한까지 쌓인 인장의 힘.

그것에 더해 강인한 의지까지 결합된 성력은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에서 더욱 강력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 성검, 무휼이 ‘성스러운 방패’로 형상을 변환합니다. ]

아틸라는 방패를 쥔 손을 위로 뻗었다.

단두대처럼 떨어지던 핏빛 칼날과 부딪친 그것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그그그그그그긋……!

척추가 끊어지는 듯한 진동을 견디며 아틸라는 오른손을 뻗었다.

바토리의 멱살을 쥐었다.

“어이. 관음쟁이.”

바토리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내려앉는 칼날의 힘이 더욱 거세어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촤르륵! 촤르르르륵!

마멸의 칼날 두 자루가 등 뒤를 습격했다.

아틸라는 재차 의지를 발현해 방패의 형상을 더욱 길게 늘였다.

그것이 후미의 칼날과 부닥치며 가공할 공명을 발했다.

“빌어먹을…… 할망구…….”

아틸라의 코와 입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렀다.

그 정도로 아틸라의 육체와 의지는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여긴 네가 머무를 곳이 아냐.”

그녀의 멱살을 잡아끌며 말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녀의 눈빛이 희미하게 변했다.

“내가 이뤄 주겠다.”

핏물이 괴어든 두 눈동자가 풀잎처럼 흔들렸다.

“무엇을…… 말이더냐…….”

“그토록 오랜 세월 네가 찾아 헤매던 것.”

그녀의 눈동자에 새로운 빛이 스몄다.

그 빛은 그녀의 시선을 멀고 먼 과거로 인도했다.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그 아래 드러난 검은 눈동자.

그것과 대비되는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사내.

‘바토리.’

과거를 더듬는 시간은 짧았다.

사내의 얼굴 위에 다른 이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초점을 회복해 가는 시선이 그것의 주인을 찾았다.

“야만……전사야…….”

“내가 이뤄 주겠다. 추가로 그 빌어먹을 신들의 오만한 면상 위에.”

피에 젖은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통쾌하게 한 방 날려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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