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망국의 공주 (2)
리베르의 몸에 둘러진 검은 휘장.
그것의 중앙엔 비상하는 까마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까마귀 기사단이라.”
아틸라가 비소했다.
“전생에 이루지 못한 꿈을 환상 속에서나마 이루려는 거냐.”
사르데니야 왕국의 애송이 견습기사, 리베르 파테르.
그가 정식 기사 서임을 앞둔 어느 날.
평화로웠던 왕국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마주한다.
‘드, 드래곤이다!’
‘저 칠흑의 비늘은 분명……!’
‘죽음의 숨결!’
바로,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왕국을 침공한 것.
키랴랴랴랴랴랴!
광룡의 입에서 뿌려진 브레스는 온 하늘과 수도를 뒤덮었고.
왕국의 자랑이자 ‘불패의 검은 창’이라 불리던 까마귀 기사단을 처참히 몰살시켰다.
‘끄아아아아……!’
‘사, 살려 줘……!’
리베르는 공주를 향해 달렸다.
아직 견습기사였던 그는 정식으로 입단하지 못한 덕에 살육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공주 전하! 바토리 공주 전하!’
‘이게 무슨 소란이더냐 리베르.’
공주의 방은 마법 수련을 위한 강한 결계가 쳐져 있었기에 밖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드래곤입니다!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왕성을 침공했습니다!’
‘뭐라……? 아, 아바마마는! 어마마마는!’
‘즉시 왕성을 떠나셔야 합니다! 이쪽으로……!’
그러나 바토리는 리베르의 말을 듣지 않았다.
‘놓아라 리베르!’
‘공주 전하!’
‘나는 사르데니야 왕국의 적법한 후계자 바토리 에르제베트! 결코 백성들을 두고 도망치지 않을 것이야!’
바토리의 눈에 강한 의지가 서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백성들만은 지켜야 한다. 그래야 작금의 난(亂)을 견뎌 낸 뒤 훗날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고대 왕국 사르데니야.
고대의 마법 왕국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마법사들은 패영전의 오랜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바토리는 그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잠재력을 지녔다.
그러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주 전하!’
마력을 머금은 리베르의 주먹이 바토리의 복부를 강타했다.
‘흐윽……!’
신음성을 뱉으며 주저앉는 그녀를 등에 업었다.
리베르는 바토리를 죽음의 길로 인도할 수 없었다.
‘리베르……! 네가……!’
바토리는 심장의 마력을 순환해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그녀의 심장 주변을 실타래처럼 둘러쌌던 마력은 리베르의 마력 공격에 강한 타격을 입었다.
바토리만큼은 아니었지만, 리베르 역시 놀라운 자질을 지닌 예비 기사였다.
‘놓아라! 이 손 놓지 못하겠느냐! 난 사르데니야 왕성을……!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바토리가 힘겹게 소리쳤다.
하지만 리베르는 알고 있었다.
왕과 왕비는 이미 목숨을 잃었다.
바토리가 그토록 구하고자 했던 수많은 백성들 역시도.
실내를 벗어나 성벽 위를 달렸다.
바토리의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성이……! 백성들이……!’
칠흑으로 불타는 세상.
살아남은 것은 없었다.
아니,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놓아라 리베르……! 어서 놓아…… 리베…… 흐흑……! 흐흐흑……!’
분노로 가득했던 그녀의 외침은 구슬픈 신음으로 변했다.
리베르는 이를 악물며 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토리만은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런 리베르를 기다렸다는 듯 맞이한 것은.
크르르르르르…….
첨탑을 움켜쥐고 도사린 광룡의 살기 어린 눈동자였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리베르는 검을 뽑았다.
‘도망치십시오 공주 전하!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선 아니 된다……!’
‘공주 전하!’
바토리는 억지로 심장의 마력을 일깨웠다.
그녀의 입에서 주르르 핏물이 흘러내렸다.
‘너를 두고 혼자 가지 않을 것이야……!’
‘바토리!’
리베르의 손이 바토리를 밀어 넘어뜨렸다.
바토리의 얼굴에 후드득, 핏물이 튀었다.
‘리베……르……?’
부릅뜬 눈의 리베르.
멍한 얼굴로 리베르를 올려보는 바토리.
둘 사이를 가로막은 광룡의 발톱.
투툭.
바토리의 눈앞으로 무언가 떨어졌다.
검을 쥔 모습 그대로 절단된 리베르의 오른팔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리베르의 음성이 아틸라의 상념을 깨웠다.
찰나간 머릿속에 스쳐간 리베르의 생애.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에게 절단된 오른팔.
그것이 마지막까지 움켜쥐었던 검.
그 검이 아틸라에게 겨눠졌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체를 밝혀라. 이 안은 공주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곳이다.”
흔들림 없는 검 끝을 바라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공주를 만나러 왔다.”
“이유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공주 전하를 수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나, 리베르 파테르다.”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다.”
아틸라는 용아귀를 뽑았다.
그 순간 표정을 바꾼 리베르가 검을 찔러왔다.
파캉! 두 자루 날붙이가 부닥치며 불꽃을 뿜었다.
생각지도 못한 리베르의 검격에 아틸라는 흠칫했다.
‘그렇군. 여긴 현실이 아니었지.’
이곳은 메피스토펠레스와 일리시아의 합작품인 환술 결계의 중심부.
‘그러나 모든 게 허상인 건 아니다.’
아틸라 일행은 실제의 능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망령들을 제압한 뒤 이곳에 도달했다.
그러나 환술 속에서 진정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강인한 의지.’
리베르는 전생에서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바토리를 보호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런 그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에게 심장을 뜯기며 최후의 순간에 떠올렸던 게 무엇일지를 짐작한다면.
지금 리베르가 보이고 있는 불가상성의 강함을 납득할 수 있다.
“절대로 네놈들이 공주 전하께 다가가지 못하게 하겠다.”
“이번에야말로 지키고 싶다 이건가.”
아틸라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리베르의 눈이 차갑게 빛나는가 싶더니 그의 등 뒤로 까마귀 기사단의 망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사르데니야 왕국의 검은 창.”
“왕국을 지켜라.”
“국왕 폐하를 지켜라. 왕비 전하를 지켜라.”
“바토리 공주 전하를 지켜라.”
망자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리베르의 외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앳된 소년의 육체가 건장한 성인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흩날리는 휘장 속에 떠오른 세 마리의 까마귀 문양.
기사단장의 징표였다.
“정식 기사를 넘어, 아예 단장까지 간 거냐.”
그래. 만약 광룡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언젠가 그리될 운명이었겠지.
아틸라는 피식 웃었다.
리베르가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에야말로 처단해 주겠다.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아깐 흑마술사 취급이더니 이번엔 드래곤이군.
순간의 독백과 검격의 부딪음은 동시였다.
파캉!
연이어 날아드는 검을 용아귀가 막았다.
다음은 아틸라가 반격했고 리베르는 능숙하게 막아 냈다.
두 사내가 검을 주고받는 동안 펀치와 슈시아는 나머지 망령들을 상대했다.
‘도롱뇽을 감춰 두길 잘했군.’
도롱뇽은 펀치의 인벤토리에 숨겨 두었다.
리베르의 망령이 도롱뇽을 마주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제법이구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리베르는 용아귀를 광룡의 발톱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몸을 절단하고, 갈가리 찢고, 마침내 무참히 심장을 뽑아냈던 저주의 흉수(凶手).
“으아아아아아!”
리베르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인간을 넘어 다른 무언가의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고 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향한 지독한 복수심.
그것은 바토리를 수호하겠다는 본연의 의지마저 퇴색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아틸라가 원하는 바였다.
‘녀석은 진짜 리베르가 아니다.’
눈앞의 리베르는 바토리의 기억과, 일리시아의 환술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마기가 빚어낸 환영.
그러나 고위악마의 힘은 결코 시답잖은 것이 아니다.
진짜 리베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가짜도 아니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혼돈에 빠져들게 만들어야 한다.’
녀석이 이성을 잃고, 의지가 탈색되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때가 바로 카운터를 날릴 순간.
아틸라는 저 진짜도 가짜도 아닌 리베르를 소멸시킬 방법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냥 힘으로 제압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지만.’
그것엔 위험이 뒤따랐다.
‘최우선 목표는 한시라도 빨리 바토리와 조우하는 것.’
바토리의 앞에 도달했을 때 어떤 방해물이 나타날지 모른다.
체력을 비축해 둘 필요가 있다.
프드득. 프드드드득…….
리베르의 어깻죽지에서 길고 시커먼 것이 돋아났다.
까마귀의 날개.
“과연 까마귀 군주로군. 이제는 완전히 까마귀와 동화한 거냐.”
“까마귀…… 군주……?”
날개를 펄럭이며 리베르가 몸을 띄웠다.
그 순간 아틸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 짧은 순간 리베르의 몸은 집채처럼 커다래져 있었다.
리베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녀석이 소리쳤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으으!”
쇄도하는 날개 공격을 무휼로 막았다.
그대로 깃털을 움켜쥐고 곡예하듯 뛰어올랐다.
드넓은 날개 위를 질주했다.
“또다시 나를 방해할 셈이냐!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아틸라의 눈앞이 검은 안개로 덮였다.
아니, 그건 안개가 아니었다.
리베르의 날개에서 솟아오른 수많은 깃털.
그것이 중력을 잃은 모래알처럼 떠오르며 아틸라의 시야를 가렸다.
차앙! 창!
날카로운 소음을 발하며 깃털이 창날처럼 뾰족해졌다.
아틸라를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파팡! 파파파파팡!
용아귀와 무휼을 이용해 그것들을 막았다.
그러나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고, 잠시 후 아틸라의 몸엔 수십 개의 상처가 생겨나 있었다.
그럼에도 아틸라는 달렸다.
쇄도하는 깃털의 비를 튕겨 내며 무휼과 용아귀를 녀석의 몸통에 꽂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부리를 힘껏 잡아 벌렸다.
“이거 먹고 떨어져라! 까마귀 새끼야!”
벌어진 부리 사이로 아틸라의 주먹이 꽂혔다.
그의 손엔 구슬이 쥐여 있었다.
‘진짜’ 리베르의 마력이 고스란히 담긴, 관조자의 검은 구슬이.
“이것……은……?”
구슬에서 폭발적으로 마력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이내 검은 깃털로 형상을 바꿨고, 리베르의 몸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요란하게 내질러지던 비명이 잦아들었다.
잠시 후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미라처럼 굳어진 리베르의 몸이 기울어지고, 추락했다.
망령들도 자취를 감췄다.
“뭐, 뭐야.”
슈시아가 멍한 얼굴로 아틸라를 돌아봤다.
아틸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쓰러진 미라 속에 손을 넣었다.
“……어이. 야만전사.”
검은 미라의 손이 아틸라의 팔목을 붙잡았다.
아틸라는 굳이 놀라지 않았다.
“호오. 환술 속에선 너도 깨어날 수 있는 모양이지?”
“반드시 공주 전하를 구해라. 그러지 않으면 지옥까지 쫓아가 네놈에게 복수할 테니까.”
깃털 속에서 반쯤 드러난 ‘진짜’ 리베르의 눈동자를 아틸라는 물끄러미 내려 봤다.
그의 손이 검은 구슬을 찾아 뽑아냈다.
그러자 서릿발 같던 리베르의 눈빛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습을 감췄다.
몸을 일으킨 아틸라가 아치문을 밀어 열며 답했다.
“당연한 소리 마라. 까마귀 새끼.”
육중한 소음을 내며 열리던 철문이 거품으로 변해 사라졌다.
그 안에 있었다.
망국의 공주,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리베르는 어찌 되었느냐.”
그리고 그건 아틸라 일행이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죽었다.”
무미건조한 대꾸에 바토리의 손끝이 떨렸다.
“……그래. 죽었단 말이지.”
“어이 관음쟁이.”
“새장처럼 갑갑한 왕성 안에서, 그는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할망구.”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내 소원을 이뤄 줄 거라 말했었지.”
바토리의 어깨가 흔들렸다.
아틸라를 향해 구르는 눈동자가 고장 난 시계추처럼 진동했다.
“그런데……, 그런 내 하나뿐인 친우 리베르 파테르를…….”
그녀의 흰자위가 핏물로 번졌다.
“네놈이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