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망국의 공주 (1)
새까만 안개 속.
아틸라는 환영을 보고 있었다.
‘역시.’
환상의 내용은 아틸라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원작자인 자신이 창조해낸 이야기였으니까.
‘어린 시절의 일리시아.’
일리시아는 발키리가 되기 위한 고된 수행을 견디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샤를이 보고 있어야 할 풍경.
아틸라는 일리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사이 환상 속 세계는 수 년의 시간이 흘렀는지, 어린아이였던 그녀는 꽤나 자란 모습이었다.
‘이런 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러나 활자의 나열에 불과했던 이야기가 실제의 영상이 되어 펼쳐지는 광경은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똑같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움직였다.
그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바토리와 슈시아를 찾아야 한다.
‘바토리는 몰라도, 슈시아는 빨리 찾지 않으면 위험할지도.’
이곳은 환술로 만들어진 결계.
그 속에서 일행은 망령으로 변한 일리시아의 본체에 삼켜졌다.
즉, 결계 안에서도 가장 힘이 강한 구역이라는 것.
‘환술은 상대의 머릿속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하지.’
슈시아가 새로운 발키리의 시조가 되려면 ‘고결한 영혼’의 존재는 필수.
오랜 시간 방치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문제는.
‘끝없는 환술의 공간 속에서 슈시아를 찾아야 한다는 건데.’
이는 드넓은 백사장에서 바늘 하나를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그래서 아틸라는 표식을 남겨 두었다.
일리시아의 얼굴에 삼켜지기 직전, 슈시아에게 도롱뇽을 붙여 놓았던 것.
‘도롱뇽 녀석. 잘 붙어있겠지.’
도롱뇽은 보통의 드래곤이 아니다.
‘다른 드래곤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도롱뇽, 아니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환술 속에서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뿔뿔이 흩어진 동료들 사이에서 슈시아의 옆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도롱뇽을 찾으면 된다.’
녀석의 곁에 슈시아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전에.’
아틸라는 보다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기척을 포착했다.
아틸라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각.
기척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쉴 새 없이 변하는 풍경 속에서 아틸라는 목표를 찾았다.
끼아옹!
주인을 발견한 펀치가 방방대며 달려왔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아틸라의 어깨에 뛰어올라 마구마구 뺨을 핥았다.
“바토리를 먼저 만날까 봐 무서웠냐.”
펀치의 이마를 쓰다듬은 아틸라는 이동 방향을 바꿨다.
이제는 정말로 슈시아를 찾을 시간.
그런데 결계는 그리 간단히 아틸라를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뭐야. 샤를일 땐 이런 거 없었잖아.”
키에에……. 키에에에에…….
발키리의 망령들이 나타났다.
온몸이 그림자로 덮인 듯 새까맣다는 것과, 불길하게 뿜어지는 검은 연기만 제외한다면 과거의 영광스러웠던 발키리 그대로의 모습.
“고생이 많군. 너희들도.”
용아귀를 뽑았다.
발키리들도 활을 들어 아틸라를 겨눴다.
“네놈. 파우스트의 사악한 흑마술사.”
“발키리는 너희의 악행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얼씨구. 내가 언제 사악한 흑마술사가 된 거지.
발키리들의 활에서 마력의 화살비가 쏘아졌다.
그것은 원래의 모습과 달리 먹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틸라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사악한 힘에 지배되고 있는 건 너희 쪽이잖아.”
용아귀를 방패처럼 들어 화살비를 막았다.
사각으로 날아드는 것은 무휼로 쳐냈다.
그러면서 사거리를 확인했다.
“가자. 펀치.”
무리의 중심에 선 녀석에게 돌진을 시전했다.
전열을 깨부수며 아틸라의 몸이 짓쳐들자 발키리들이 소리쳤다.
“비열한 흑마술사!”
“어찌 이리도 사악한 마술을 사용한단 말인가!”
뭐가 비열하고 사악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아압!”
아틸라의 몸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그 여파로 망령 셋의 몸이 찢어졌고, 놈들은 핏물 대신 먹빛의 연기를 흩뿌리며 허공에 녹아들었다.
끼아옹! 그사이 펀치도 하나의 망령을 제압했다.
“이 사악한 괴수!”
“흑마술사가 지옥의 수문장 케르베로스를 소환했다!”
“참으로 사악하도다! 케르베로스라니!”
이놈들은 정말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케르베로스는 개다. 곰이 아니고.
게다가.
“케르베로스의 머리는 세 개다!”
용아귀가 핏빛의 검무를 추었다.
* * *
도롱뇽은 슈시아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었다.
“어이 엘프 미물. 이거 보여?”
도롱뇽은 슈시아의 눈앞에 앞발을 흔들었다.
그러나 슈시아는 그저 멍한 표정이었다.
“이거 완전히 맛이 갔네. 갔어.”
도롱뇽은 주위를 둘러봤다.
드넓은 호수.
그 파란 호수 한가운데 돋아난 자그만 섬 위에, 슈시아와 도롱뇽은 앉아 있었다.
도롱뇽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데.”
호수 저만치에서 거품이 일고 있었다.
거품은 방향을 지닌 물살을 발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이 엘프 미물! 얼른 일어나 봐!”
짜악! 따귀도 날려 봤건만 슈시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냥 두고 도망칠까 하던 도롱뇽의 머릿속에 아틸라의 전음(傳音)이 떠올랐다.
‘슈시아 옆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어라.’
‘말 안 들으면.’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하게 만들어 주마.’
도롱뇽은 파르르 비늘을 떨었다.
“빌어먹을! 야만 미물이 두려워서가 아냐! 나약한 엘프 미물을 두고 가기엔 이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님의 자존감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도롱뇽은 슈시아의 머리 위에서 한껏 비늘을 부풀렸다.
다가오는 물살을 노려봤다.
“뭐, 뭐야. 하나가 아니잖아!”
그 말대로였다.
사방 곳곳에서 물살이 접근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런 데서 죽을 순 없는데.”
이윽고 십여 개의 물살 위로 길쭉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도롱뇽의 입가가 헤벌쭉 벌어졌다.
“뭐야. 바실리스크잖아!”
바실리스크는 용족의 하위종.
도롱뇽이 포식할 수 있는 대상이다.
“엘프 미물이 왜 정신을 못 차리나 했더니, 바실리스크의 ‘석화’에 걸려 있었군.”
도롱뇽은 가장 앞서 다가오는 바실리스크를 향해 쫘악 아가리를 벌렸다.
그제야 상대를 확인한 바실리스크들이 기겁했다.
- 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 도망쳐! 모두 도망쳐라!
바실리스크가 내뿜는 정신의 언어를 음미하며 도롱뇽은 포식을 시전했다.
그런데 되지 않았다.
“응? 뭐지?”
다시 시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거야! 그전엔 잘 됐잖아!”
이전의 포식을 아틸라가 시전한 것이었다는 걸 도롱뇽은 알지 못했다.
도롱뇽과 거의 같은 타이밍에 아틸라가 포식을 시전했기에, 당연히 자신이 시전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빌어먹을! 이거 대체 왜 이러냐고!”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바실리스크들이 도주를 멈췄다.
거리를 두고 물속에서 눈알만을 내민 채 도롱뇽을 주시했다.
- 이상한데.
-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힘을 안 쓰고 있다.
-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 아냐?
- 그러고 보니 터무니없이 작아졌는데.
녀석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 자, 잠깐! 석화가 먹히지 않는다!
- 그럼 힘을 잃은 게 아닐지도!
- 유인하는 건가!
- 조심. 또 조심! 저 미치광이 드래곤이 우릴 갖고 노는 것일지도 몰라!
과거의 화려했던 전적 덕에 바실리스크들은 섣불리 도롱뇽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될 순 없었다.
-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 우릴 갖고 놀 심산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오래 참는다고? 저 미치광이 드래곤이?
- 혹시 정말로 힘을 잃은 거 아냐?
- 들은 적 있어. 핏빛의 마녀에게 된통 당했다고.
바실리스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점점 빠르게 헤엄쳐 왔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바실리스크가 육지에 발을 내디뎠을 때, 도롱뇽의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입 벌려. 도롱뇽 새끼야.’
도롱뇽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그 순간 후방의 바실리스크 한 마리가 반 토막이 난 채 호수 위로 튀어 올랐고.
- 뭐, 뭐야 저건!
- 동료 하나가 죽었다!
그러는 사이 두 번째, 세 번째 바실리스크의 절단된 몸뚱이가 공중으로 솟았다.
뒤를 돌아본 바실리스크들이 경악했다.
- 누, 누가! 어떻게!
- 인간! 인간이다!
그런 바실리스크들을 향해 도롱뇽이 아가리를 벌렸다.
[ 포식(捕食) ]
콰르르르륵!
도롱뇽에게 가장 근접해 있던 바실리스크가 순식간에 입안으로 빨려 들었다.
[ 환수, 도롱뇽이 바실리스크를 포식했습니다. ]
‘그대로 한 바퀴 돌아.’
아틸라의 전음대로 도롱뇽은 섬을 포위한 바실리스크들을 향해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 포식의 권능이 지속됩니다. ]
콰르륵! 콰륵! 콰르르르르륵!
[ 환수, 도롱뇽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
[ 환수, 도롱뇽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
십여 마리 바실리스크가 도롱뇽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 * *
포식이 완료되자 슈시아의 석화도 풀렸다.
정신을 차린 슈시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도롱뇽의 따귀를 올려붙인 것이었다.
“뭐, 뭐야! 왜 때려!”
“아까의 복수다.”
석화에 빠지면 몸은 움직여지지 않지만 의식은 멀쩡하다.
슈시아는 도롱뇽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석화에 당해 있었다고?”
아틸라의 목소리에 슈시아가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지?”
“일리시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나.”
“안 보였는데.”
아틸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 일리시아의 본체 속으로 침잠한 슈시아는 샤를이 도착하기 전까지 첨예한 정신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정신 공격의 주체는 물론 일리시아.
고위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새로운 발키리의 시조가 될 슈시아를 공격한다.
그것으로부터 슈시아를 구하는 것이 샤를.
그 후 슈시아는 샤를과 함께 일리시아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성공하고, 발키리의 힘을 계승한다.
‘이번의 일리시아는 슈시아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서둘러라.”
아틸라는 급히 발을 움직였다.
바실리스크가 사라지자 호수도 모습을 감췄다.
거대한 동공(洞空)으로 몸을 바꾼 배경 위를 거침없이 달렸다.
“환술은 정말 두려운 마력이군.”
끊임없이 제 모습을 바꾸는 풍경을 보며 슈시아는 혀를 내둘렀다.
동굴은 진즉 사라졌다.
일행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푸른 들풀 위를 질주했고, 태양빛이 쏟아지는 황금색 모래사장을 지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고풍스러운 성 안에 들어와 있었다.
아틸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역시.’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알 수 있다.
이곳은.
“멈춰라.”
신기루처럼 눈앞에 나타난 소년이 일행에게 검을 들이댔다.
“이 안은 공주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곳이다.”
소년의 등 뒤로 아치형의 철문이 생성됐다.
그것을 가로막은 소년의 눈빛이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정체를 밝혀라.”
아틸라는 말없이 소년을 바라봤다.
그는 소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너까지 등장하는 거냐.’
대답은 상대의 입에서 나왔다.
“나의 이름은 리베르 파테르. 사르데니야 왕국의 적법한 후계자, 바토리 에르제베트 공주 전하를 지키는 수호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