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불의 정령왕 (1)
“뭐 하냐. 너.”
아틸라의 물음에 바토리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무엇을 말이더냐.”
아틸라는 팔짱 낀 바토리의 손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거.”
“무어 잘못된 거라도 있느냐.”
“있지. 아주 많이 있지.”
“나는 잘 모르겠구나.”
아틸라는 바토리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바토리가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그러느냐. 혹시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는 것이더냐.”
“있었지. 하지만 이제 없어졌다.”
불안하게 눈망울을 굴리던 바토리가 소녀처럼 눈을 흘겼다.
“흐응 야만전사야. 혹시 지금 부끄러워하는 것이더…….”
“머리털 다 뽑아 줄까.”
“…….”
아틸라는 그렇게 바토리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다.
하디드가 말했다.
“아, 아무튼 불정령의 반지가 있다면 정령왕께서도 입장을 허하실 테지.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출발하세. 내 한번 실력을 발휘해 보지.”
“에산도 데려가는 것이 좋겠군.”
에산에겐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 * *
불의 신전.
무덥고 메마른 사막을 횡단 중인 아틸라 일행이 지금 향하는 곳이자.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의 성역.
‘불의 신전엔 이프리트의 힘이 깃든 망치와 모루가 있다.’
정령왕은 드래곤이나 관조자처럼 반신이라 불리는 존재.
또한 제각기 상징하는 자연의 힘을 수호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물, 불, 대지, 그리고 바람.’
그중 이프리트는 불의 수호자다.
그리고 불은, 무기를 제련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
즉 이프리트가 지닌 불의 힘과 도구를 이용한다면.
용아귀를 수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
‘물론 문젯거리는 있지만.’
도롱뇽.
아니,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먼 옛날 이프리트를 흠씬 두들겨 팬 뒤 불정령의 반지를 전리품으로 들고 나왔다.
그런 도롱뇽을 이프리트가 발견한다면 가만있지 않을 거다.
용아귀 수리가 물 건너가는 건 물론이거니와 최악의 상황엔.
‘이프리트와 싸워야 할지도.’
그건 달갑지 않은 일이다.
사실 정령왕은 패영전의 반신 중 최상위권 실력자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반신들과 다르게 그들에겐 자신만의 성역이 존재했고, 그 구역에서만큼은 상당한 힘을 발휘했다.
‘살수의 연막술이나, 타란툴라의 거미집처럼.’
그리고 일행은 이프리트의 성역, 불의 신전을 찾아가는 중이다.
불필요한 전투는 피해야 한다.
‘성역 안의 이프리트는 자신이 지닌 힘의 전부, 아니 그 이상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전성기의 도롱뇽이나 바토리 정도의 실력자라면 이프리트의 제압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둘은 본래 지녔던 힘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고.
설령 제압이 가능하다 해도.
‘이프리트를 화나게 했다간 용아귀 수리를 도와주지 않을 테니.’
그래서 아틸라는 도롱뇽을 펀치의 인벤토리에 숨겨 두었다.
아틸라의 우려를 눈치챈 것처럼 바토리가 말했다.
“걱정 말거라 야만전사야. 내가 감지하지 못할 정도이니, 이프리트 또한 그럴 것이다.”
인벤토리의 장점.
그 안에 집어넣은 물건은 완벽하게 기척이 사라진다.
그렇게 ‘도롱뇽’이라는 하나의 문제는 해결했는데.
두 번째 문제가 남아 있다.
‘이프리트가 반지의 출처를 의심할 수 있지.’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는 속성과 어울리게 성질이 아주 불같다.
거기에 더해 의심이 많고 고집이 센 데다 변덕스럽기까지.
한 마디로 꼬장꼬장한 노인네 스타일.
‘좀 유순한 성격으로 만들걸.’
그러나 불의 정령왕이 순둥이라면 위화감이 들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 성격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방해가 될 줄이야.
의외로 그 문제는 바토리가 해결해 주었다.
“내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벌한 뒤, 반지를 되돌려주러 왔다 말하겠다.”
그러고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이 무더운 사막을 마법 없이 악착같이 견디며 온 것이니라. 이프리트에게 트집 잡힐 일을 만들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건 제법이었다고 아틸라는 생각했다.
아틸라의 표정을 읽은 바토리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 줄 말이 있지 않느냐.”
“뭐?”
바토리는 까치발을 들었다 놨다 하며 아틸라를 빤히 올려 봤다.
“내가 이 무더운 사막을 마법 없이 악착같이 견디며 왔느니라. 이프리트에게 트집 잡힐 일을 만들지 아니한 것이니라.”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또 하고 있네.”
“해 줄 말이 있지 않느냐.”
생글생글 웃는 바토리의 얼굴을 내려 보던 아틸라는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저 얼굴을 오래 보고 있자면 곤란해진다.
* * *
불의 신전은 멀었다.
사실 멀다기보단 가는 길이 미로 같았다.
벽도, 함정도 없는 평지의 미로.
언젠가부터 일행은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또 저 오아시스인가.”
“벌써 세 번째로구나.”
“우리 발자국도 세 번째로군.”
슈시아와 바토리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디드가 말했다.
“이프리트께서 우릴 들일 준비가 되셨다면, 머지않아 바른길로 인도할 것이네.”
“이런 씨발.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고.”
더위를 참다못한 슈시아가 욕설을 내뱉었다.
엘프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여겨지지 않는 그 말에 에산은 물론이고 하디드도 크게 놀랐다.
슈시아가 하디드를 노려봤다.
“뭘 봐 영감탱이.”
“아, 아닙니다.”
겉보기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슈시아였지만 그녀는 하디드보다 연장자였다.
인간의 말투로 돌아온 슈시아를 보며 아틸라가 히죽 웃었다.
“이제야 마음에 드는군.”
그것이 탐탁지 않았는지 슈시아는 이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하디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래지 않아 슈시아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건.”
푸른 하늘과 누런 모래사장만 가득하던 풍경이 바뀌었다.
어느새 일행은 새로운 길을 걷고 있었다.
엘프의 목소리로 슈시아가 말했다.
“더 이상 우리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군.”
머지않아 황톳빛 벽돌이 담을 이룬 고즈넉한 도로가 나타났다.
“흐응. 이프리트의 냄새가 가까워지고 있구나.”
바토리의 말에 아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패영전에서 바토리와 이프리트가 마주한 일은 없었기 때문.
그러나 그는 곧 소설과 이곳의 현실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겼고, 머릿속에서 치워 냈다.
그렇게 한동안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일행의 앞에 거대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의 신전일세.”
하디드가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오래전 불의 신전에 입장한 적이 있었다.
바토리가 아틸라에게 속삭였다.
“나만 믿으려무나. 야만전사야.”
“뭘.”
아틸라의 물음에 바토리가 배시시 웃었다.
“다 잘 될 것이니라.”
그그그그그……! 육중한 소음을 내며 입구가 열렸다.
하디드를 선두로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라도 달린 것처럼 천장, 벽, 바닥이 저절로 밝아졌다.
손바닥만 한 불덩이들이 사방에서 일렁일렁 춤을 추고 있었다.
“아기 불정령들이로구나.”
그렇게 말한 바토리는 자연스럽게 하디드를 제치고 앞서 걸었다.
그녀를 안내하듯 불정령들이 조그만 발을 꺼내 달렸다.
정령들이 달릴 때마다 불 소리가 났다.
화륵. 화르륵.
바닥을, 벽면을, 그리고 천장을 거꾸로 달리는 녀석도 있었다.
정령과 바토리의 뒤를 일행이 따라 걸었다.
긴 복도를 지나자 강당처럼 넓은 공간이 보였다.
숨이 답답해질 정도의 후끈한 열기.
이프리트의 대장간이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이곳을 다시 찾게 될 날을 어찌나 고대했던지.”
하디드는 감회가 새롭다는 얼굴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이곳이 처음인 에산은 그저 황홀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때 용광로 속에서 자그만 불꽃이 솟아났다.
어린아이처럼 작은 크기로 시작된 불꽃은 순식간에 몸을 불려 코끼리처럼 커졌다.
‘저러다 천장 뚫겠네.’
불꽃의 성장이 멈추는가 싶더니 타오르는 두 개의 눈과 지옥의 들목 같은 입구멍이 생겨났다.
구멍이 말했다.
- 그대들은 불정령의 반지를 가지고 있구나.
- 먼 옛날, 미치광이 드래곤이 빼앗아 간 나의 보물을.
아틸라가 반지를 꺼내들자 촉수 같은 불의 채찍이 다가와 그것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머리라도 달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 확실히 나의 보물이 맞도다.
- 어떻게 그것을 손에 넣은 것이냐.
예고했던 대로 바토리가 나섰다.
“내가 찾아냈느니라. 내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마계로 추방한 뒤 손에 넣었다.”
- 너는?
이프리트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 바토리…… 에르제베트?
“역시 기억하고 있었더냐.”
바토리가 미소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프리트의 몸이 부풀기 시작하더니 이내 폭발하듯 뻗치기 시작한 것이다.
- 네 이노오오옴! 바토리 에르제베트! 사악한 핏빛의 마녀야!
이프리트가 내지르는 격노의 외침에 일행 모두가 당황했다.
단 한 명, 바토리만 빼고.
“흐응. 아직 화가 나 있었던 게로군.”
-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프리트가 불의 채찍을 휘둘렀다.
바토리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왼팔을 뻗었다.
“이제야 돌의 힘을 시험해 볼 수 있겠구나.”
손안의 돌이 붉게 빛났다.
그 빛은 마법진의 문양을 그리며 손등을 타고 왼팔 전체로 번졌다.
“플람마 이그니스 하우스트.”
완성된 마법진에서 홍염의 다발이 뿜어졌다.
그것은 이프리트가 쏘아 낸 채찍을 휘어감아 분쇄했고, 이어 본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혼이 나고 싶은 게냐. 어리석은 불의 왕자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아틸라는 깨달았다.
이프리트가 악연을 가지고 있는 건 도롱뇽, 즉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뿐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거기 바토리도 있었다는 설정인 거냐!’
조금 전에도 말했듯 소설과 현실은 다르다.
원작에서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던 아틸라.
마찬가지로 무명의 캐릭터였던 오토와 펀치가 그런 아틸라의 동료가 된 것처럼.
‘그 차이가 지금의 돌발 상황을 만들었다.’
이프리트가 처음부터 정령왕이었던 건 아니다.
정령왕이 되기 전, 그러니까 후계자 시절의 이프리트가 어느 관조자 콤비에게 까불다 혼쭐이 났다는 설정이 있었는데.
- 바토리 네 이노오오옴! 리베르 파테르는 어디 있느냐!
아무래도 그게 바토리와 리베르였던 모양.
“왕이 되더니 눈에 뵈는 게 없어진 것이더냐. 하찮은 불의 왕자야.”
바토리는 이프리트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이제 완전한 관조자로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 정도로 엄청난 공격.
물론 아틸라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런 공격을 계속 이어 갈 수는 없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프리트를 몰아넣고 있다는 것은.
‘기를 꺾으려는 거겠지.’
이프리트의 괴팍한 성격을 통제하려면 그보다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바토리는 이미 녀석을 제압한 적이 있다.
아틸라의 용아귀를 무사히 수리하기 위해 바토리도 나름의 해답을 내놓은 것.
‘내게 말을 하지 않은 이유도 반대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사실이다.
미리 말했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바토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바토리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 것이다.
아틸라는 무휼을 뽑았다.
그 순간 상태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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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령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