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난 이런 사람이니라
백발노인, 하디드 살만은 검은 늑대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오랜만에 진짜배기가 왔군.’
사내의 괴력.
지금까지 하디드 살만이 마주한 전사 중 저렇게나 말끔히 바위를 옮겨 놓은 자는 없었다.
‘아니지. 황금바위산의 땅딸보 드워프 녀석이 있었나.’
그 이후로는 처음이다.
게다가.
‘저자가 지닌 도끼.’
멀리서 봐도 알 수 있다.
저건 인간의 솜씨로 만든 무기가 아니다.
‘드워프 강철.’
순도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드워프 강철이 섞인 물건.
그 말은.
자신이 저것을 완벽하게 손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하디드 살만은 보고 싶었다.
검은 늑대와 에산의 시합을.
그리고 어쩌면 이후 다가올 가슴 뛰는 승부 역시도.
‘쉽지는 않을 것이네. 검은 늑대의 전사.’
에산의 팔씨름 실력은 진짜배기 중의 진짜배기였으니까.
* * *
“시작이다!”
두 사내의 손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누군가 소리쳤다.
‘이것은……!’
상대의 완력에 에산은 놀랐다.
바위를 옮기는 걸 봤을 때부터 보통내기는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팔씨름은 초반에 박살을 내야겠다 생각하며 모든 힘을 쏟았다.
그러나 상대의 팔은 돌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마, 나와 동급의 완력이란 말인가.’
아틸라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아차차. 손모가지 작살을 내 버릴 뻔했네.’
상대의 기세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갈 뻔했다.
제대로 힘을 준다면 결과는 번하다.
저 곰 같은 에산의 손은 장난감처럼 박살이 날 것이다.
‘그럴 순 없지. 손으로 먹고사는 놈인데.’
에산은 하디드 살만의 하나뿐인 아들.
향후 하디드의 뒤를 이어 인간 최고의 대장장이가 될 자다.
‘샤를에게도 상당한 도움을 주는 녀석이지.’
그런 자의 손을 망가뜨릴 수는 없다.
그래서 아틸라는 적당히 힘을 줄였고, 공교롭게도 그 힘이 에산의 풀 파워와 비슷했던 것.
‘용쓰네. 자식.’
에산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조심조심 힘을 주자 녀석의 팔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에산이 밀리잖아!”
“말도 안 돼! 팔씨름 장사 에산이!”
“한 방을 보여 보라고 에산! 난 너한테 걸었어!”
우어어어! 에산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아틸라의 팔이 밀리기 시작했다.
“좋아!”
“이제부터 시작이다!”
“에산의 반격……!”
쿠웅!
소란을 휘발시키는 굉음이 탁자를 울렸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들 어안이 벙벙한 얼굴.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긴 거지?”
탁자에 짓눌린 커다란 손.
그 위에서 하늘을 향해 손등을 드러낸 건 아틸라 쪽이었다.
“거, 검은 늑대다!”
“검은 늑대가 에산을 이겼어!”
“우와아아아!”
요란한 함성이 공기를 울렸다.
아틸라가 손을 풀자 에산은 콧김을 풍풍 뿜으며 욱신대는 오른손을 주물렀다.
그리고 외쳤다.
“검은 늑대는 두 번째 시험을 통과했다!”
아틸라에게 돈을 걸었던 자들이 행복에 겨워 소리쳤다.
이제 마지막 시험이 남았다.
벌써부터 관객들은 마지막 시험의 승자를 점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검은 늑대가 이길까?”
“그럴 리가. 이번 시험은 힘쓰는 게 아닌걸.”
“게다가 세 번째 시험을 통과한 자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지 않나.”
사실 하디드 살만의 손님이 되기 위해선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으로 족했다.
세 번째는 하디드의 짓궂은 취미일 뿐.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를 통과한 전사들은 이의 없이 세 번째 시험을 치렀다.
대장장이의 마음이 즐거워야 제작품의 질이 올라갈 것은 뻔한 일이었으니까.
“육체 능력은 잘 보았네. 검은 늑대의 전사.”
백발노인, 하디드 살만이 무쇠 탁자로 걸어왔다.
그 모습에 에산이 일어섰고, 교대하듯 하디드가 아틸라와 마주 앉았다.
“그러나 육체의 능력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지. 무릇 진정한 강자가 되기 위해선.”
하디드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두뇌 역시 빼어나야 하는 법.”
그러고는 싱긋 웃었다.
“혹시 알고 있었나.”
“무엇을 말이오.”
“세 번째 시험이 이 무쇠 탁자 위에서 치러진다는 것을.”
아틸라는 대답 없이 입가만을 올렸다.
하디드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탁자 위 검은 철판을 밀어냈다.
그그그그긋…….
흡사 양장본의 두툼한 표지 한 장을 넘긴 것처럼 그 안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오오!”
“저것이 바로!”
먼 옛날, 신과 악마의 전쟁을 모티브로 만들어 낸.
규칙은 간단하지만 변수가 많은 탓에 하수부터 고수까지의 실력차가 극과 극에 달한다는 전략 게임.
하디드의 입가가 올라갔다.
“성전(聖戰).”
탁자 중앙엔 정교한 솜씨로 음각된 정사각형 패턴이 늘어서 있었다.
또한 두 사내의 앞엔 그릇처럼 파인 두 개의 홈이 존재했는데.
하나는 비어 있었지만, 다른 하나엔 납작한 돌이 가득했다.
“신의 대리인이 될 텐가. 아니면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신에게 대항할 텐가.”
“이대로 하겠소.”
“흥미롭군. 악마 쪽에 서겠다는 것인가.”
아틸라의 돌은 악마의 상징 흑색.
하디드의 돌은 신의 상징인 백색.
자,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렇군. 때론 악마의 힘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성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이 게임의 정체.
그것은 바로.
‘바둑이다.’
* * *
이쯤에서 되짚어 보겠다.
패영전 세계에 떨어지고, 죽은 아틸라에게 빙의돼 무덤을 뚫고 일어났던 날.
눈앞에 떠올랐던 메시지.
[ 원작자 권능이 개방됩니다. ]
원작자 권능은 그간 아틸라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많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밖에도 각종 전투 스킬, 레벨업, 시나리오 시스템, 숨겨진 종족 특성, 태세 전환 등 다른 등장인물과 차별화되는 점은 많았지만.
그에겐 그것 말고도 또 다른 능력이 있었으니.
[ 보조 스킬 ]
바로 보조 스킬이다.
검술 교육, 전술 탐지, 무두질 등등 아틸라에겐 수많은 보조 스킬이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부터 사용할.
[ 보조 스킬, ‘성전의 기사’가 활성화됩니다. ]
바둑 기사.
[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
아틸라는 웃었다.
* * *
하디드 살만은 부릅뜬 눈으로 신과 악마의 전장을 내려 보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하디드 살만.
자타 공인 후마이야 왕국 최고의 성전 기사.
‘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유령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다.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성전 기사들과 겨뤄 봤지만 이런 경험은 정말 처음이었다.
‘열 수 이상은 앞을 내다보는 듯하다. 신의 권능이 아닌 이상 어떻게……!’
하디드의 눈이 커졌다.
‘정말 악마의 하수인이라도 되는 것인가 이자는!’
그러고 보니 이름부터가 검은 늑대가 아닌가!
그러나 하디드는 이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내가 졌네…….”
관중이 술렁거렸다.
하디드 살만.
그가 무명의 성전 기사 검은 늑대에게 무릎을 꿇었다.
“자네는…… 대체 누구에게 성전을 배운 것인가.”
“배운 적 없소. 룰이나 알고 있는 정도지.”
“그런 말도 안 되는!”
하디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틸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하디드는 그간 수많은 전사들의 눈빛을 봐 왔다.
저 전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긴 어려웠으나.
눈빛에 담긴 것만은 틀림없는 진짜였다.
‘새로운 바람이 부는 것인가.’
가슴속에 시원한 바람이 차오르는 느낌.
“자네, 전사 때려치우고 성전 기사를 업으로 삼는 것이 어떤가. 내 여러 곳에 다리를 놔줄 수 있…….”
“거절하겠소.”
그 말에 하디드는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부리부리하게 치뜬 눈을 빛냈다.
“한 판 더 두세.”
“좋소.”
“아홉 점 깔고 시작하겠네.”
“…….”
* * *
하디드가 여섯 판을 내리 졌을 무렵 달은 하늘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구경하던 자들은 모두 돌아갔다.
그들에게 성전은 그리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아니었으니까.
“모든 시험을 통과한 전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지만…….”
성전의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정신을 차린 하디드가 머뭇대며 말했다.
“자네의 저 도끼 말일세.”
“당신이 완벽히 고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소.”
“알고 있다고?”
하디드는 놀라우면서도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네만, 그러려면 어떤 특별한 힘과 그 힘을 발휘할 장소가 필요하네.”
“그것 또한 알고 있소.”
“……자넨 모르는 게 뭔가.”
“글쎄. 그걸 모르겠소.”
하디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의 도끼엔 드워프 강철……, 아니 어쩌면 드워프 강철이 아닐는지도 모르겠군.”
하디드는 용아귀를 꼼꼼히 살펴보는 중이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무기.
‘드워프 강철과 비슷하지만 무언가 다르군. 인간도, 드워프도, 엘프도 아닌 다른 종류의 기술이 섞여 있다.’
놀라운 점은 또 있었다.
도끼에선 짐작하기도 어려운 긴 세월이 느껴졌다.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될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신의 성력이 깃든 무기라면 가능하겠지만.
이 도끼는 성물이 아니다.
게다가 도끼날에 흥건히 밴 피 냄새.
쉴 새 없이 전장을 뛰어다닌 실전 무기라는 이야기.
“이걸 고치려면 특별한 장소에 가는 수밖에 없네. 하지만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지.”
확신은 못했지만, 아틸라는 하디드가 용아귀를 완벽히 수리하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디드를 찾아온 이유.
“이게 있다면 어떻소.”
아틸라의 품에서 꺼내진 자그만 물건.
하디드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자, 잠깐 좀 보여 주게!”
아틸라에게 물건을 넘겨받은 하디드는 세심히 그것을 살폈다.
그리고 그것이 오래전 어느 고서에서 읽은 물건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분명 이건…….”
“불정령의 반지요.”
하디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불정령의 반지라……. 자넨 이걸 어디서 손에 넣은 건가.”
“우연히.”
도롱뇽 새끼한테서.
“전설로만 전해지던 물건이 정말 존재했을 줄이야.”
하디드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용력의 신 헤라클레스를 떠오르게 하는 가공할 완력, 비상한 두뇌, 출처를 알기 힘든 신비로운 무기에 더해 정령의 반지까지 지니고 있다니. 대체 자네의 정체가 뭔가.”
“새로운 무적자이니라.”
답한 건 바토리였다.
그리고 하디드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 설마 자네……! 무적자 타리엘 페살라스를 쓰러뜨렸단 말인가!”
무심한 얼굴로 아틸라가 답했다.
“그렇소.”
그제야 하디드는 아틸라 곁에 선 두 여인을 차례로 돌아봤다.
“그럼 저분들은…….”
“그가 타리엘 페살라스를 쓰러뜨린 사실은 내가 보증하겠다.”
슈시아가 감춰 뒀던 길고 뾰족한 귀를 드러냈다.
하디드가 놀라 외쳤다.
“에, 엘프! 그렇다면 옆의 분은……?”
“난 이런 사람이니라.”
자신에게 팔짱을 끼는 바토리를 아틸라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내려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