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사막의 시험
십여 기의 군마가 평원을 달렸다.
선두의 말 위에 앉아있는 건 쟝 브뤼노.
아틸라 덕에 필리쁘 변경백령의 다크웜 사건을 해결하고 복귀 중인 그의 얼굴엔 후련함 대신 수심이 가득했다.
오는 길에 마주했던 브뤼노 병사의 전갈 때문.
‘샤를 아인하르트. 정말로 마귀들을 모조리 섬멸할 줄이야……!’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전령의 말에 따르면, 샤를은 이미 수일 전부터 브뤼노 백작성을 타격하고 있다.
‘아버지……!’
비수라도 꽂힌 것처럼 등줄기가 서늘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더 빨리 달려라!”
등 뒤에서 기사들이 우렁차게 화답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끝에 쟝과 기사들은 목적지에 도달했고.
그들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이럴…… 수가……!”
백작성 꼭대기에서 휘날리는.
금사자의 깃발.
“대, 대장!”
“가면 안 됩니다!”
부하들의 만류에도 쟝은 말을 달렸다.
피투성이로 널브러진 브뤼노의 병사들.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적과 싸웠으리라.
‘빌어먹을……!’
성에 가까워지자 보였다.
금사자의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금발의 사내.
그가 누구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샤를 아인하르트……!’
그리고 쟝은, 자신의 시선을 잡아끄는 또 다른 존재를 감지했다.
‘엘프?’
샤를 아인하르트 앞에 마주 선 훤칠한 키의 엘프.
그의 손엔 괴상한 모양의 장창이 들려 있었다.
마치 거대한 검날에 창자루를 끼워 놓은 것 같은.
그 순간 엘프가 샤를에게 몸을 날렸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장창이 쏘아졌다.
샤를이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샤를의 뒤엔 수많은 병사들이 있었지만 둘의 결투에 끼어드는 이는 없었다.
팡! 파앙! 차아아앙!
금속성의 울림이 공기를 갈랐다.
쟝은 자신의 목적도 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초반엔 엘프가 우세했다.
그러나 중반부터 호각을 이루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샤를의 검이 엘프를 압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음이 멎었다.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샤를이 바닥에 누운 엘프를 향해 걸어갔다.
검을 겨누며 물었다.
“네게서 무적자 칭호를 빼앗아간 사내와, 나를 비교한다면 어떤가.”
엘프가 무어라 중얼댔지만 쟝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쟝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샤를의 얼굴뿐이었다.
* * *
“가 보지 않아도 괜찮겠느냐.”
“어딜.”
“네 단짝, 샤를 아인하르트에게 말이다.”
“걔가 왜 내 단짝이야.”
“아니었더냐.”
“아니야.”
“한데 왜 그리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더냐.”
“안절부절못하긴 누가.”
“너 말이다. 야만전사야.”
“빌어먹을 할망구. 노망이 나려면 곱게 날 것이지 어디서 자꾸 헛소리야.”
“참으로 솔직하지 못하구나. 너도.”
“카스피는 어쩌고 있냐.”
“말 돌리는 게냐.”
“카스피 어딨냐고.”
바토리는 잠시 반지에 정신을 집중했다.
“카스피가 반지에 집중하고 있지 않구나.”
“너도 줄곧 그랬던 거 아니냐.”
“아니니라. 난 언제나 최소한의 정신력을 반지에 머물도록 하고 있단다.”
“카스피가 반지를 잃어버린 건 아니고?”
“그건 아니다. 카스피의 기척은 분명 느껴진다. 미약하나마 철혈귀검의 냄새도 나는 것 같구나.”
“하여간 그놈은 죽지도 않네.”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릴.”
세 마리 말은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둘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슈시아는 생각했다.
발키리의 힘을 얻게 되면, 이후 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샤를이 이겼을 거다.”
아틸라의 말이 슈시아의 상념을 깨웠다.
“흐응. 역시 단짝의 편을 드는 것이더냐.”
“단짝 아니라니까.”
슈시아가 입을 떼었다.
“샤를 아인하르트가 타리엘을 이겼을 거라고?”
“그래.”
슈시아는 기분이 나빠졌다.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엘프의 자랑인 타리엘 페살라스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패배한다고?
“타리엘은 지지 않는다. 그의 강력함은 아틸라,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샤를은 더 강해.”
“그와 겨뤄 본 적이 있나.”
“있지.”
“승자는?”
“나.”
슈시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틸라는 타리엘과 샤를, 두 사내와 모두 겨뤄 봤다.
‘그렇다면.’
그런 그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는 것 아닐까.
“뭐, 실력이라면 타리엘 쪽이 위일 테지만.”
“그건 또 무슨 말이지?”
“타리엘이 더 강하지만 승자는 샤를이라는 거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슈시아를 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싸우는 도중, 샤를이 더욱 강해질 테니까.”
“의미를 모르겠군.”
신경질적으로 답한 슈시아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틸라도 구태여 말을 잇지 않았다.
새벽해가 떠오를 무렵 일행은 후마이야 왕국에 진입했다.
* * *
후마이야 왕국.
남쪽의 아스투리아 왕국과 국경을 맞댄 이곳의 땅 대부분은.
북으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낮아진다는 대륙의 통념을 깨뜨리는 무더운 사막지대였다.
‘불의 정령들이 사는 곳이니까.’
후마이야는 불의 힘이 강한 땅.
‘즉, 망치와 모루가 발달한 곳이지.’
후마이야 왕국 최고의 대장장이는 ‘이프리트 사막’ 한가운데 살고 있다.
웬만한 드워프 대장장이 뺨치는 실력자이자 인간 중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그에게 아틸라는 용아귀의 수리를 맡길 생각이다.
그런데.
“야만전사야……. 너무 덥구나…….”
“조금만…… 쉬었다 가면…… 좋겠군.”
바토리와 슈시아가 더위를 견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막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아틸라마저 짜증이 일 정도로 날씨는 가혹했다.
“바토리……. 날씨는…… 어떻게 마법으로 안 되는 건가.”
아까부터 슈시아는 줄곧 저 소리였다.
바토리도 계속 같은 대답을 했다.
“날씨라는 건 신의 영역이니라. 보잘것없는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러나 아틸라는 바토리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라면 사막을 빙하로 만들 순 없어도, 특정 지역을 시원하게 만드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불정령의 터전을 함부로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을 뿐.
“낙타는 참 잘도 걷는구나.”
본격적인 사막지대 진입을 앞두고 일행은 말을 팔고 낙타를 샀다.
며칠을 걷자 오아시스를 둘러싸듯 펼쳐진 마을이 보였다.
땅! 땅! 따앙!
무더운 날씨에도 망치질이 한창이었다.
구릿빛 피부의 사내들이 쇠를 달구고, 식히고, 두드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손님들이 그것을 구경하며 왁자지껄 술을 들이켜는 모습도 보였다.
“흐응. 사막의 열기 못지않은 사내들이로다.”
바토리가 그들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슈시아도 더위에 헉헉대던 건 까맣게 잊은 채 망치질을 관찰했다.
아틸라는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어딜 가는 게냐. 야만전사야.”
“잔말 말고 따라와.”
한적한 골목을 지났다.
그러자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원이 모여든 장소가 보였다.
“여기군.”
인파를 헤치며 성큼성큼 걸었다.
머지않아 일행은 그 많은 사람들이 둘러싼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위?”
슈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면 위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아틸라 못지않은 덩치의 사내가 팔짱을 끼고 선 모습이 보였다.
사내가 말했다.
“하디드 살만의 손님이 될 자는 더 없는가.”
주변이 웅성거리는가 싶더니 인파 속에서 근육질 남자가 걸어 나왔다.
커다란 양손검을 차고 있는 걸 보니 힘깨나 쓰는 모양.
“도전하겠소.”
“이름은.”
“사막의 호랑이.”
전사의 답에 사내는 옆으로 물러섰다.
검과 장비를 내려놓은 전사가 양팔로 바위를 껴안았다.
“저게 뭐 하는 것이냐. 야만전사야.”
“하디드 살만의 손님이 되기 위한 시험.”
“시험?”
바토리가 바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보니 바위 아래 지면엔 그것을 둘러싸듯 원이 그려져 있었다.
몇 걸음 옆으로 그와 비슷한 크기의 원이 보였다.
“흐응. 바위를 저리 옮기는 것이로구나.”
“바위가 너무 크군.”
슈시아는 전사가 바위를 옮기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흐으으으읍! 전사의 기합이 터져 나왔다.
“오오! 들린다! 들려!”
“저걸 들어 올리다니! 과연 사막의 호랑이!”
사막의 호랑이라 불린 전사는 콧김을 뿡뿡 뿜어대며 발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졌다.
“가라! 사막의 호랑이!”
“팔에 힘을 꽉 줘!”
“바위가 땅에 닿으면 끝장이라고!”
사람들이 주먹을 휘두르며 응원했다.
그것이 힘이 됐는지 전사는 두어 걸음을 더 옮겼지만.
결국 절반도 가지 못한 채 바위를 놓치고 말았다.
“끄아아아아!”
전사가 비명을 질렀다.
놓친 바위가 그의 발등을 깔아뭉갰기 때문.
슈시아가 급히 아틸라를 돌아봤다.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기다려라.”
아틸라는 잠자코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내 팔짱을 끼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전사에게 다가와 번쩍 바위를 들었다.
그러고는 처음의 자리에 갖다 놓았다.
“무, 무슨 저런 괴력이.”
슈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녹음기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사내가 다시 말했다.
“하디드 살만의 손님이 될 자는 더 없는가.”
“여기 있다.”
답한 건 아틸라였다.
아틸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사내의 눈빛이 변했다.
척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것.
“이름은.”
“검은 늑대.”
관중이 술렁댔다.
“오오. 이번 도전자는 덩치가 아주 끝내주는데?”
“에산과 비교해도 밀리질 않잖아!”
사람들은 팔짱의 사내를 ‘에산’이라 불렀다.
아틸라가 바위 앞으로 걸어가자 에산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쿠웅!
아틸라가 용아귀를 풀어 바닥에 꽂는 소리였다.
관중의 기대감이 극적으로 고조됐다.
“우와아아! 저런 도끼를 쓰는 전사라면!”
“정말 바위의 시험을 통과할지도 모르겠는데!”
“난 성공한다에 걸겠어!”
“나도!”
어느새 주위는 도박장처럼 변했다.
아틸라는 바위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의 허벅지 근육과 팔근육이 짐승처럼 꿈틀거렸다.
“흐응…….”
“하아…….”
저도 모르게 비슷한 소리를 낸 바토리와 슈시아가 붉어진 얼굴로 서로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아틸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와아아아아!”
“저, 저럴 수가!”
“말도 안 돼!”
사막의 호랑이와 같은 기합 소리는 없었다.
바위를 든 채 아틸라는 저벅저벅 걸었다.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잠시 후 반대편 원 안에 바위가 놓였다.
“됐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동과 물음에 에산마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금세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검은 늑대는 첫 번째 시험을 통과했다!”
관중들이 요란하게 손뼉을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는 사이 에산은 커다란 나무 탁자와 의자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앉아라. 검은 늑대.”
“이걸론 안 될 거 같은데.”
“뭐라고?”
주위를 둘러본 아틸라는 나무 탁자를 대신할 물건을 찾았다.
모루를 닮은 커다란 무쇠 탁자.
“잠시 빌려도 되겠소?”
그 앞에 앉은 건장한 백발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아틸라는 그것을 나무 탁자가 있던 자리로 가져왔다.
“오오오오! 아주 본격적이잖아!”
“난 검은 늑대에게 걸겠어!”
“난 에산! 에산이 문지기를 맡은 이래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한 전사는 한 명도 없었다고!”
아틸라에 뒤질세라 에산도 무쇠 의자 두 개를 들고 왔다.
두 사내는 무쇠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준비는 됐나. 검은 늑대.”
에산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아틸라가 답했다.
“물론.”
하디드 살만의 손님이 되기 위한 두 번째 시험.
그건 문지기와의 팔씨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