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연금술사 (2)
말에서 뛰어내린 기사가 허겁지겁 아틸라에게 달려왔다.
여덟 명의 병사가 그 모습을 휘둥그런 눈으로 바라봤다.
아틸라가 말했다.
“오랜만이오. 쟝 브뤼노 기사대장.”
그랬다.
그는 발랑스 마을에서 만났던 브뤼노 백작의 아들, 쟝 브뤼노였다.
상황을 짐작한 쟝이 병사들을 꾸짖었다.
“네놈들이 감히 브뤼노 가문의 인장을 무시하다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이런 무례를 범하는 것이냐!”
쟝은 아틸라가 아스투리아 왕국 전역을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도록 가문의 인장이 찍힌 증표를 줬었다.
아틸라가 병사들에게 그것을 제시했는데도 길을 막아선 거라 생각한 것.
‘아 맞다. 그런 걸 줬었지.’
그러나 아틸라는 꾸지람 듣는 병사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옆에서 슈시아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만면에 짓고 있었기에.
* * *
쟝은 일행을 성 안으로 인도했다.
그러고는 마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맛집으로 안내해 술과 고기를 비롯한 각종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아틸라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을 뱃속에 넣었다.
바토리도 오랜만의 진수성찬이 마음에 드는 듯 얼굴빛을 밝혔고.
슈시아는 투덜대며 과일과 채소만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조용한 방 안에서 쟝이 물었다.
“아틸라 공.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브뤼노 백작령에 있어야 할 쟝이 이곳, 필리쁘 변경백령에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발랑스 마을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한 사건이 근처 마을에서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워 기분이 좋아진 아틸라가 농을 던졌다.
“호오. 언제부터 마귀 퇴치 전문가로 활동하셨소.”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쟝이 답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발랑스와 리모즈의 마귀들은 모두 아틸라 공께서 처단하신 거라고 말씀드렸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다르신 것 같더군요.”
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버지의 심중을 모르겠습니다. 아인하르트의 창날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때, 저를 포함한 백작령의 기사들을 이곳으로 보내다니요. 게다가 왕도로 전갈을 보내 더 이상의 지원군은 필요 없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합니다.”
“전선의 상황은 어떻소. 마귀가 등장했다 들었소만.”
“알고 계셨습니까. 지금 전선엔 엄청난 수의 마귀가 등장해 아인하르트의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습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마귀들이 브뤼노 백작령 쪽으론 오고 있지 않다는 것인데…….”
쟝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마귀들이 언제 브뤼노 백작령으로 송곳니를 겨눌지 모른다는 것을.
‘게다가.’
샤를 아인하르트라는 사내의 무용담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그는 툴루즈 백작령에 출몰한 거대 마귀 크라켄을 제압한 전적이 있다고 들었다.
‘만약 그가 전선에 등장한 마귀들을 모조리 제압한 뒤 브뤼노 백작령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쟝은 고개를 털어 생각을 떨쳐 냈다.
지금 중요한 건, 서둘러 이곳의 임무를 마치고 전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편 아틸라는 쟝과 달리 브뤼노 백작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브뤼노 백작령은 아인하르트 백작령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시간을 거슬러 아인하르트 이전, 그러니까 툴루즈 백작이 그곳의 군주로 있던 시절엔 두 백작령의 관계가 원만했다.
국경 마을을 사이에 두고 툴루즈와 브뤼노는 활발하게 교역했고, 덕분에 브뤼노 백작은 많은 세금을 징수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중 일부는 툴루즈와 사이좋게 나눠 가졌고.’
그뿐만이 아니다.
툴루즈 백작에게 아스투리아 왕과의 접견 자리를 마련해 녹마탑 운용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도운 것도 브뤼노 백작이었다.
그것만 보면 브뤼노 백작이 공생관계인 툴루즈 백작을 도운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아스투리아 왕국은 툴루즈를 지원해 가스코뉴를 정벌한 뒤, 툴루즈와 가스코뉴를 한꺼번에 집어삼킬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흉계를 꾸민 이 역시 브뤼노 백작이었으니까.
‘대가로 툴루즈 백작령을 갖기로 하고 말이야.’
늙은 너구리.
브뤼노 백작의 별칭이다.
그런 음험한 작자에게 쟝처럼 순진하고 어리숙한 아들이 태어난 것도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
‘내가 그렇게 만들긴 했지만.’
아무튼 브뤼노 백작은 지금의 위기 상황을 이용하려 한다.
아인하르트와의 전쟁에서 선봉에 선 브뤼노 가문이라는 이름을 유지하면서.
왕국 곳곳에 출현 중인 마귀들을 후계자인 쟝을 보내 섬멸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안과 밖으로 명성을 쌓은 브뤼노 백작의 입지는 전쟁을 마친 뒤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늙은 너구리는.’
그러나 브뤼노 백작이 크게 간과하고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쟝이 마귀 퇴치에 아무런 소질이 없다는 것이고.
‘아들의 실력에 대한 믿음만은 각별하니, 쟝이 아무리 아니라 말해도 겸손이라 생각했겠지.’
둘째는.
‘샤를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것.’
브뤼노 백작은 샤를이 저 거대한 마귀들의 군세를 뚫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할 거라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태평하게 쟝을 비롯한 백작령의 우수한 기사들을 이곳에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게다가 브뤼노 백작은 지원군조차 필요 없다는 전갈을 왕도에 날렸다 하지 않는가.
‘뭐 그렇게 지 팔자대로 샤를에게 뒈지는 거지. 원작에서도, 여기에서도.’
원작과 다른 점이라면 이곳으로 파견된 덕분에 쟝은 목숨을 건질지 모른다는 것.
침통한 얼굴의 쟝에게 아틸라가 말했다.
“이곳의 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소.”
그 말에 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도와주시는 겁니까! 아틸라 공!”
“이야기나 먼저 해 보시오.”
신이 난 쟝이 설명을 시작했다.
“근처의 마을 하나가 송두리째 전멸했습니다. 발랑스의 로돌프 성주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자들이 목격됐다는 보고도 들어온 상태이고요.”
“혹시 타란툴라도 목격됐소?”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다크웜인가.
“증상을 보이는 자들은 어찌 되었소.”
“그게…… 신기하게도 그들을 이끄는 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끄는 자?”
“그렇습니다. 어느 자그만 꼬마가 군대처럼 놈들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본 자가 있습니다.”
아틸라의 눈이 번득였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는?”
“마을 너머 ‘키다리 산’이라 불리는 험준한 산의 초입부입니다. 예전부터 음험한 기운이 감돌아 다들 출입을 꺼리는 곳이지요.”
상황이 공교롭다.
로돌프 성주와 같은 증상을 보인다면 다크웜의 소행인 것은 분명한데.
‘숙주들을 이끄는 자가 있다니.’
다크웜은 철저하게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마귀다.
무리 지어 있다 해도 협동하지 않는다.
기행귀 타란툴라 같은 상위의 존재가 조종하지 않는 이상, 결코 조직을 이루는 마귀가 아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인데.’
“파우스트는 아니다.”
바토리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 말에 아틸라는 둘로 나뉘었던 가능성을 하나로 좁힐 수 있었고, 그건 쟝의 도움 요청을 수락할 이유가 되었다.
“놈들이 어디로 움직일지는 미지수입니다. 장소가 특정되었을 때 타격하는 편이…….”
“좋소. 우리가 처리하지.”
아틸라의 수락에 쟝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고맙습니다 아틸라 공! 지금 즉시 병사들을 소집……!”
“병력은 필요 없소. 우리들로만 움직이는 걸로 하겠소.”
“알겠습니다! 어중이떠중이가 늘어 봐야 방해만 될 뿐이지요. 그럼 병사들은 성에 주둔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아틸라 공과 다시 한번 함께 싸울 수 있게 되다니! 리모즈 마을의 타란툴라를 처치할 때 돕지 못한 일이 가슴에 한이 되어 남아 있었습니다! 내 이날을 얼마나 고대했던지……!”
“쟝 브뤼노 기사대장께서도 빠져 줬으면 하는데.”
“저, 저도요?”
쟝의 얼굴엔 서운함이 가득했지만 아틸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감염자를 이끄는 이의 정체를 특정한 이상 쓸데없는 목격자가 있어선 곤란하다.
놈은 자신의 은신처가 인간에게 알려지는 걸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출발하겠소.”
아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토리와 슈시아가 뒤를 따랐다.
말 등에 올라타며 아틸라가 말했다.
“잘 따라와라, 슈시아.”
키다리 산으로 향하는 길은 상당히 험한 편이다.
슈시아가 비소하며 답했다.
“웃기는군. 인간이 엘프의 승마술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그래? 내기라도 해볼까?”
“좋지. 패자가 우리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모든 잡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걸로. 어떤가.”
“나중에 딴말하지 마라.”
“너나 하지 말도록.”
몇 분 후.
“내, 내가 졌다! 같이 가자! 아틸라!”
슈시아는 아틸라를 이기지 못했다.
이유는.
[ 동방 민족의 스킬을 사용합니다. ]
[ 유목민의 승마술 ]
애꿎은 바토리만 꼴찌를 달리며 헉헉댔다.
“나, 나도 있단다! 야만전사야!”
그제서야 아틸라는 속도를 줄였다.
험준한 지역을 지나, 세 마리의 말이 나란히 초원을 달리는 동안 해는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빛이 바토리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술자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이로구나 야만전사야.”
“그래.”
“흐응. 아무래도 나와 같은 상상을 하는 것 같구나.”
“그럴지도.”
“잠깐. 지금 둘이서 나만 모르는 이야길 하고 있는 건가. 나 혼자 엘프라고 따돌릴 셈인가.”
“넌 알아서 뭐 하게. 그리고 그냥 평소처럼 말해라. 여긴 서리나무숲이 아니니까.”
아틸라에게 마음을 열며 부드러워졌던 슈시아의 어투는 서리나무숲에 머무는 동안 다시 변했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것이 내 본연의 어투와 목소리다. 인간을 흉내 내는 말투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군.”
“아까 경비병 앞에선 잘만 하던데.”
“그래. 잘만 하더구나.”
“……아무튼 나도 듣고 싶군. 술자의 정체에 대해.”
그러나 대답은 없었고, 슈시아도 더는 묻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키다리 산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턴 걸어서 간다.”
말에서 내린 일행은 도보로 산을 올랐다.
말을 타고 오르지 못할 만큼 험준한 지형이었음에도 아틸라와 슈시아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바토리는 달랐다.
“후우……. 후우…….”
가쁜 숨을 내쉬는 바토리에게 아틸라가 말했다.
“빨리 와.”
“……잠시만 쉬었다 가자꾸나.”
“그럴 시간 없다.”
아틸라는 바토리를 등에 업었다.
“야만전사야.”
“왜.”
“도끼가 차구나.”
“빌어먹을 할망구. 바라는 것도 많네.”
말과 달리 아틸라는 용아귀를 가슴 앞으로 당겨 맸다.
“너무 달라붙지 마라.”
아틸라는 묵묵히 산을 올랐다.
머지않아 산짐승을 뜯어먹는 감염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토리가 말했다.
“다크웜이 맞구나.”
아틸라는 감염자의 목을 베었다.
절단면에서 새로운 숙주를 찾아 튀어 오른 다크웜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새끼. 상대를 보고 덤벼라.”
그 뒤로 계속해서 감염자들을 만났다.
간혹 번식한 다크웜에 감염된 산짐승의 습격도 있었다.
아틸라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놈들을 제압했다.
“짐승에게도 기생하는 건가.”
슈시아가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녀는 벌레에 거부감이 강했다.
“엘프에게도 기생하지.”
아틸라가 꿈틀대는 다크웜 한 마릴 들이밀자 슈시아가 꺄악 비명을 질렀다.
그 뒤로 슈시아는 아틸라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 걸었다.
그 모습을 바토리가 불만족한 얼굴로 바라봤고.
머지않아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건……!”
산중에 위치한 자그만 고원.
장난감 같은 나무집.
그 앞으로 십여 마리에 달하는 감염 짐승과 인간들이 무언갈 둘러싸고 으르렁대고 있었다.
“이놈들! 저리 가! 저리 가라니까!”
약병을 휘두르며 놈들에게 맞서는 자그만 사내.
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