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연금술사 (1)
말발굽에 짓눌린 들풀이 사각대는 소리를 냈다.
두 마리의 말이 초록빛 초지를 걷고 있었다.
말 등 위에 앉아 있는 건 아틸라와 바토리.
며칠 쉰 게 효과가 있었는지 바토리는 한결 얼굴이 좋아 보였다.
“제롬 녀석. 결국 그리될 줄 알았느니라.”
제롬은 일행을 떠났다.
“그래도 스승으로서의 도리는 다한 것 같구나.”
나란히 말을 몰던 아틸라가 바토리의 얼굴을 돌아봤다.
제자가 하산한 것이 속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론 섭섭함이 엿보이는 얼굴.
그 미묘한 표정을 응시하며 아틸라는 생각했다.
‘도리 정도가 아니다. 할망구.’
바토리의 제자로 수행하는 동안 제롬은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현재 그의 실력은 대륙의 인간 마법사 중 최상급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토리의 눈엔 한참 못 미치는 모양.
“물론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애송이 제롬, 너무 자만하진 말아야 할 터인데.”
“그 정도가 햇병아리면 다른 마법사는 무슨 갓 낳은 달걀 상태냐.”
아틸라가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이 만난 등장인물 중, 샤를을 제외한다면 제롬이 가장 크게 성장한 인물일 것이다.
‘아니지. 카스피도 있었군.’
아틸라는 두 인물의 성장세에 대해 생각해 봤다.
자신만의 마법 세계를 구축해, 대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초석을 다진 제롬.
파우스트의 노이어를 쓰러뜨리며 자신의 핏줄에 감춰진 특별한 힘, ‘귀살(鬼殺)’을 각성한 카스피.
‘뭐, 클래스가 다르니 무의미한 비교인가.’
아무튼 아틸라는 제롬이 떠난 것에 만족했다.
아틸라와 샤를 사이에서 고뇌하던 제롬의 속내를 바토리가 읽어 냈던 것처럼.
아틸라 역시 진작부터 제롬의 생각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울러 녀석이 바보 연기를 참 잘 한다는 것도.
‘원작의 제롬은 저런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그동안 제롬은 아틸라와 바토리를 따라다니며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움직였다.
섣불리 나서지 않고, 모자란 척 한발 물러나 있으면서도 주의 깊게 상황을 관찰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아틸라에게 고개 숙이고, 바토리를 스승으로 모시며 마법을 연마했다.
그러면서 제롬은 아틸라와 바토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틸라가 지닌 특별한 힘에 대해.
바토리를 둘러싼 여러 신비에 대해.
그리고 환수 펀치와, 도롱뇽의 존재에 대해서도.
‘물론 대략적인 정보일 뿐이지.’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제롬은 아틸라와 함께 하며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았다.
제롬만큼 마귀와의 전투 경험을 쌓은 마법사는 드물 것이다.
그렇게 제롬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걸 주저하지 않았고,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남은 건 샤를에게 향할 시기를 결정짓는 것뿐.
때맞춰 제롬에게 선택의 방아쇠를 당기게 한 건 타리엘이었다.
‘아인하르트의 앞을 가로막는 마귀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군.’
며칠 사이에 불과했지만 타리엘의 정보는 아틸라 일행이 들은 것 중 가장 최신의 것이었다.
그날로 제롬은 샤를에게 떠날 채비를 마쳤다.
아마도 마귀와의 전투에서 일반적인 보병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샤를 아인하르트의 강력한 창날이 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존재감을 아인하르트 백작령에 각인시키는 데 있어, 그만큼 극적인 등장도 찾기 어려울 것이리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아틸라 님.’
마지막에 제롬은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땐, 적으로 마주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제롬은 일행을 떠났고, 슈시아가 국경까지의 안내를 맡았다.
슈시아와는 이후 만날 장소를 정해 두었다.
“괜찮겠느냐. 야만전사야.”
“뭐가.”
“이렇게 단둘이 여행하는 것 말이다.”
“시답잖은 소리는.”
“나는 좋구나.”
이전보단 나아졌지만 펀치는 여전히 바토리를 두려워했다.
아틸라의 다리 사이에 웅크린 채 바토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펀치의 등 위에서 도롱뇽은 늘어지게 자고 있었고, 그 모습이 괘씸해 아틸라가 녀석의 콧잔등을 검지를 튕겨 때렸다.
“……코! 코! 내 코가 뜨겁다! 부, 불이……! 빌어먹을 이프리트 미물 촛불 새끼가 뒤질라…… 흠…… 음냐…….”
두서없는 잠꼬대를 뱉어 낸 도롱뇽은 금세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도롱뇽이 당할 때마다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바토리가 입을 열었다.
“야만전사야.”
“왜.”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더냐.”
“슈시아와의 약속 장소.”
“그걸 물은 게 아니지 않느냐.”
무성한 잎새로 조각난 하늘을 아틸라는 물끄러미 올려봤다.
‘이렇게 보면 지구의 하늘과 똑같은데.’
아틸라는 지구가 그리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그리워졌다.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던 아틸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무사히 지구로 돌아가려면, 이곳에서 세운 목표부터 차근차근 수행해야겠지.’
현재 아틸라가 해결해야 할 일은 모두 네 가지.
첫째는 바토리의 치유.
둘째는 리베르의 구속을 해제할 수 있는 성물 찾기.
셋째는 슈시아에게 발키리의 힘을 계승시키는 것.
넷째는 망가진 용아귀를 수리하는 것.
이중 가장 빠르게 해결해야 할 건.
‘바토리의 치유.’
예정에 없던 용아귀 수리도 시급한 일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바토리를 치유해야 후유증을 줄일 수 있을 테니.’
생명의 보석은 얻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연금술사를 만나러 간다.”
“연금술사라. 설마 어느 산중에 숨은 노움의 연구실이라도 찾을 생각은 아닐 테고.”
“잘 알고 있군.”
“뭐라?”
패영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금술을 발휘할 수 있는 종족은 노움이다.
그러나 그 수가 매우 적고, 인간을 피해 꽁꽁 숨어 살기 때문에 존재조차 모르는 이가 대부분.
그러나 바토리가 놀란 이유는.
“노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더냐.”
“그러니까 가지.”
“야만전사야. 노움은 다른 종족을 돕지 않는단다.”
알고 있다.
노움은 다른 종족은커녕 자기 가족조차 돌보지 않는다.
엘프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의 두세 배에 달하는 수명 대부분을 혼자만의 공간에 틀어박힌 채 연구만을 거듭하는 괴짜 중의 괴짜.
‘매드 사이언티스트(Mad scientist) 콘셉트로 만든 종족이니까.’
태어났으니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그러다 죽는다면 그게 자신의 삶이었노라 겸허히 받아들이는 희한한 녀석들.
그래서 고문이나 협박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조금 더 인간스럽게 만들었으면 편했으려나.’
“나도 알아. 할망구.”
“그럼 어떻게 도움을 받을 생각이더냐.”
“놈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돼.”
노움은 연금술을 연구하는 학자.
등가교환의 법칙에 민감하다.
받은 게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갈 내줘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이야기.
그제야 바토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등가교환의 법칙을 이용할 생각이더냐. 하지만 그러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만 할 텐데.”
“녀석들이 원하는 거야 잘 알지. 더구나 그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갖고 있거든.”
“그게 무엇이더냐.”
아틸라는 씩 웃으며 품에서 무언갈 꺼냈다.
바토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베르의 구슬이 아니더냐.”
“그래. 이걸 보여 주면 연구하고 싶어서 눈알이 뒤집어질걸. 특히 지금부터 우리가 만나려는 노움 녀석이라면 더더욱.”
바토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것을 양도할 생각이더냐.”
“연구할 수 있도록 며칠 빌려주는 걸로 충분할 거다.”
“다행이구나.”
그제야 바토리는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흐응, 그래. 등가교환. 등가교환이라…….”
그러고는 슬그머니 표정을 바꾸기 시작했다.
저거 뭔 헛소리할 때 나오는 면상인데.
“야만전사야.”
목소리부터 아주 은근하다.
“왜.”
“모처럼 단둘인데 이름으로 불러 주면 안 되겠느냐.”
아틸라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바토리를 쳐다봤다.
얼굴에 가벼운 홍조까지 머금은 그녀는 일견 수줍어하는 소녀처럼 보였다.
서리나무숲에서의 결투 때 환호하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힘내거라! 야만전사야!’
‘야만전사야! 너의 곁엔 내가 있느니라!’
할망구. 아주 노망이 단단히 들었어.
“대답을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아틸라.”
“네가 내 이름을 부르든 말든, 난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참으로 무정하구나.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더냐.”
“글쎄.”
“우리 사이에도 등가교환의 법칙을 적용해 보자꾸나. 자, 내가 이름을 불렀으니 너도 그리해야 한다. 노움을 만나려면 이 정도 준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대체 뭔 상관인데 그게.
“자. 난 준비가 되었느니라. 아틸라.”
“관음할망.”
“……!”
* * *
계절이 바뀌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확히 셈해 보진 않았지만, 아틸라는 자신이 패영전 세계에 떨어진 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새삼 자각했다.
그래서 짜증 내듯 말했다.
“빨리 좀 와라 할망구. 나들이라도 나왔냐.”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신비로워 그러느니라.”
그렇게 말하는 바토리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 숲과 강물, 하늘과 구름을 바라봤다.
조바심을 느끼는 아틸라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
솨아아.
바람이 흔든 긴 머리칼이 그림처럼 나풀거렸다.
짜증 부리던 것까지 잊은 채 멍하니 그 모습을 응시하던 아틸라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투덜댔다.
“빌어먹을 할망구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슈시아가 먼저 도착했을지도 모르겠군.”
“그것이 무어 중요하더냐. 조금 기다리라 하려무나. 난 지금이 좋으니.”
바토리가 전에 없던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친구 리베르야.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구나.”
“나중에 해라. 옛 생각.”
아틸라는 바토리를 강제로 이끌었다.
그러면서도 바토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나무와, 바람과, 구름과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속 장소에 도착한 둘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슈시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인간의 모습을 한 채로.
“그러니까, 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건데.”
귀찮다는 듯 병사가 답했다.
“아인하르트와의 전쟁 준비가 한창이다. 수상쩍은 자를 함부로 영지에 들이지 말라는 성주님의 명령이 있었다.”
“수상쩍다고? 내가?”
“네가 전쟁을 틈타 기습을 노리는 후마이야 왕국의 첩자가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나?”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쉬며 슈시아가 말했다.
“그럼 내 친구들은 어떻게 들어갔지?”
“친구?”
“그래. 나보다 며칠은 먼저 도착했을 거다. 들어가지 못했다면 응당 여기에 있어야 하는……, 음 여기 있네.”
옆으로 다가온 아틸라와 바토리를 발견한 슈시아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쯔쯔, 혀를 차며 병사가 말했다.
“저들이 네가 말한 친구인가.”
“……아 뭐.”
“그럼 볼일은 끝났군. 돌아가라.”
“우린 들어가야겠는데.”
아틸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움찔한 병사는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른 병사들을 불렀다.
“이, 이봐들! 잠깐 이쪽으로 좀 와야겠는데!”
“뭐야.”
“무슨 일인데.”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왔다.
졸지에 성문 앞에 여덟 명의 무장 병사가 모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점점 살벌해졌다.
그때였다.
“거기 무슨 소란이냐.”
성문 너머에서 말을 탄 기사가 다가왔다.
언짢은 얼굴로 병사들을 둘러보던 기사가 바토리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아틸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쩌억 입을 벌렸다.
“아, 아틸라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