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무적자 (4)
타리엘 페살라스.
패영전의 영웅 중 몇 안되는 창(槍)전사이자.
불패의 명성을 이어 가던 샤를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 준 인물.
‘물론 둘만의 조용한 결투였기에 정식 전적엔 포함되지 않았지만.’
지금의 샤를이 아틸라에게 패한 뒤 심경의 변화를 겪은 것처럼.
원작에서의 샤를은 타리엘에게 패배한 이후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 계기로 한층 더 강해지지. 샤를은.’
승자 타리엘 역시 샤를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샤를이 엘프와의 연합군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여러 엘프족 가운데서도 ‘타리엘 페살라스’만큼은 모두의 존경을 받았으니까.
‘엘프 세계관 최강의 전사.’
그 무적자가.
아틸라 앞에 마주 섰다.
“훌륭한 실력이었소. 인간 전사 아틸라.”
“그거 고맙군. 타리엘 페살라스.”
아틸라는 서리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끄덕여 결투를 수락했다.
타리엘이 말했다.
“난 오랜 시간 대륙을 떠돌았소. 물론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긴 수명 덕분이긴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무심한 물음에 타리엘은 시원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새끼. 훈남이네.
“방랑생활을 이어 가는 동안 수많은 전사들과 겨뤄 볼 수 있었소. 때로는 전쟁 용병으로, 때로는 지금과 같은 결투의 형식으로.”
혓바닥 참 길구만.
귀때기만 긴 게 아니었어.
“그리고 최근, 내 귀에 어떤 위대한 전사에 대한 명성이 들려왔소.”
“호오.”
“그의 이름은 금사자 용병단의 단장, 샤를 아인하르트. 난 호승심이 일었소. 그러나 당시의 난 발루아 왕국에서 제법 먼 곳에 있었기에 만날 도리가 없었지.”
나도 알아. 후마이야 왕국에 있었잖아.
“그런데 재밌는 소문이 들려왔소.”
“재밌는 소문?”
“그 사자왕 샤를 아인하르트가, ‘도살자’라 불리는 야만전사에게 완패했다는 소문.”
아틸라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타리엘도 예의 훈남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밌는 소식은 그게 끝이 아니었소. 얼마 뒤, 남쪽 수해의 트롤을 세 마리나 쓰러뜨렸다는 전사의 이야기가 들려왔으니까.”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듯 타리엘의 얼굴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트롤 학살자. 인간들은 그를 그렇게 부르더군.”
타리엘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얼굴이 평상의 것으로 돌아왔다.
“나 역시 트롤을 상대해 본 적이 있기에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있소. 그래서 더 이상은 가만 있을 수가 없었지. 난 트롤 학살자를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소.”
엥? 그랬어?
“그러나 발루아 왕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소. 그리고 툴루즈 백작령과 가스코뉴 공작령 간의 영지 전쟁이 벌어졌지.”
타리엘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알게 된 거요. 내가 쫓던 두 인물, 도살자와 트롤 학살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또한 그 사내가 용병 비두킨트와 파비앵은 물론이고, 녹마탑의 탑주를 포함한 수많은 마법사들을 쓰러뜨렸다는 것까지.”
타리엘의 눈이 아틸라를 똑바로 향했다.
“그 사내가 아스투리아로 떠났다는 말에 서둘러 뒤를 쫓았소. 그곳엔 더욱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지. 바로, 파우스트의 사령술사 할리와 노이어가 소멸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이쯤 되면 너 스토커 아니냐.
“그때쯤이었소. 아스투리아 왕국 곳곳에 마귀들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난, 그 마귀들을 소탕한 것 역시 같은 사내라 짐작하고 있소.”
타리엘이 시선이 슈시아에게 돌아갔다.
“머지않아 사내의 목적지를 가늠할 수 있었소. 그는 서리나무 일족에서 추방된 슈시아의 마을을 향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최종 목적지는 이곳, 서리나무숲일 거라 생각했소.”
슈시아에게 머물던 타리엘의 시선이 바토리를 향했다.
“그런데 설마, 바토리 에르제베트마저 인간으로 되돌렸을 줄이야.”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
“그대는 이제 ‘서리곰 살멸자’ 칭호마저 손에 얻었소.”
“칭호 따윈 내 관심사가 아니오. 하지만 이거 하난 분명히 알고 있지.”
“무엇을 말이오.”
“이 결투가 끝나면, 내게 또 하나의 칭호가 추가될 거라는 걸.”
정적이 일었다.
타리엘은 그답지 않게 동그란 눈을 떴다가, 미소했다.
“자신감 넘치는 전사로군. 난 그런 걸 싫어하지 않지.”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아틸라는 손도끼를 내버리고 용아귀를 쥐었다.
‘무휼로 열심히 갈아 두길 잘했군.’
타리엘은 장창을 꺼내들었다.
두 전사가 말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선제공격은 아틸라의 손에서 시작됐다.
파캉!
용아귀와 장창이 맞부딪쳤다.
직전까지와 달리 아틸라는 힘 조절을 하지 않았지만, 타리엘의 창날은 용아귀의 힘을 가뿐하게 견뎌 냈다.
‘과연. 무기가 개사기급이야.’
타리엘의 장창.
그건 일반적인 창병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갖고 있었다.
‘언월도(偃月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저건 검이다.
거대한 검날에 긴 창자루를 끼워 놓은 형태.
‘게다가 저 창날엔 성력이 깃들어 있지.’
분명 용아귀보다 윗급의 무기.
타리엘 역시 일합(一合)을 나눈 것으로 그것을 파악했다.
그리고 아틸라와는 다른 의미로 놀라움을 느꼈다.
‘재미있군.’
언월도가 저 거대한 도끼의 성능을 웃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금 전 검을 나눴을 때 상대를 압도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 말은 즉.
‘상대의 근력이 나보다 강하다는 것.’
타리엘은 웃었다.
‘두 번째로군. 나보다 강한 근력을 지닌 전사를 만난 것은.’
첫 번째 상대는 먼 북동쪽 황금바위산에서 만난 드워프 전사.
‘녀석과 비교하면 어떨까.’
타리엘은 생각을 지웠다.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는.
근력을 바탕으로 싸우는 전사가 아니었다.
파카캉!
두 번째 격돌이 발생했다.
아틸라는 상대에게 근접하려 했고, 그것을 타리엘이 창날을 뻗어 막았다.
세 번째 격돌은 타리엘의 반격.
이어 숨 쉴 틈 없는 창날의 비가 쏟아졌다.
“여, 역시 무적자!”
“타리엘 페살라스는 대륙 제일검이다!”
“언월도의 페살라스!”
“광전사 카르타고가 살아 돌아와도 타리엘에겐 어림없지!”
엘프들이 격렬하게 환호했다.
3인의 전사장이 인간 전사 한 명에게 맥도 못 추고 당했던 광경을 머리에서 지워 버리려는 듯이.
‘과연 타리엘 페살라스다. 저 아틸라가 밀리고 있어.’
슈시아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설마 타리엘이 방문했을 줄은 몰랐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그리고 서리왕이 그것을 이용할 줄 알았다면 결코 결투를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 스승님!”
한편 제롬은 거의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설마 아틸라를 압도하는 전사가 있을 줄이야.
‘군신 아레스와도 맞짱이 가능할 것 같던 아틸라 님이……!’
상상도 못했다.
저런 어마어마한 전사가 있을 줄은.
그러나 바토리는 조금의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제롬아.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더냐.”
그녀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눈을 크게 뜨고 똑똑히 보거라.”
파카카카캉!
금속성 소음이 숲을 울렸다.
예리한 창날의 소나기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공격하는 타리엘은 과연 무적자다운 면모를 보였으나.
그것을 완벽히 막아 내는 아틸라도 그 못지않았다.
‘전사 아틸라. 어쩔 셈입니까. 방어만 해서는 승리할 수 없답니다.’
서리왕의 입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그 상태가 지속된다면, 당신의 도끼는 타리엘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테지요.’
그녀의 생각대로.
용아귀와 언월도 사이엔 성능 외의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는데.
바로 무기의 길이였다.
‘진짜 더럽게도 기네. 원작의 샤를아. 너 정말 고생했겠구나.’
창은 도끼보다 길다.
그리고 타리엘의 언월도는 일반적인 창보다 더욱 길다.
‘접근 못하게 하려고 아주 용을 쓰는군. 빌어먹을 귀쟁이 새끼.’
상대가 타리엘이 아니었다면 아틸라는 진즉 몸으로 강제 돌파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샤를마저 쓰러뜨린 무적자, 타리엘.
‘우격다짐으로 달려들다간 순식간에 벌집이 되겠지.’
그래서 아틸라는 방어 태세로 전환하고 수비에 몰두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 여기게 만들어야 한다.’
아틸라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려면 밑밥을 깔아 둘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만 더.’
맹렬한 공격에 아틸라의 방어가 조금씩 느슨해졌다.
타리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없던 강력한 일격이 그의 팔에서 쏘아졌다.
아틸라의 눈이 커졌다.
‘지금!’
용아귀를 방패처럼 들어 아틸라는 정면으로 그것을 막았다.
콰콰쾅!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그의 몸이 이십여 미터 뒤로 밀려났다.
아틸라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태세를 전환했다.
[ 검투 태세 ]
한편 타리엘은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이대로 달려가 창날의 비를 퍼붓고, 방어력을 상실한 상대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이, 이건!’
저 멀리 밀려났던 상대의 얼굴 표정이 불현듯 또렷하게 보였다.
아니,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차례로군. 타리엘 페살라스.”
길게 입을 찢어 웃는 상대의 얼굴이 코앞에 등장한 순간 타리엘은 경악했다.
‘어느 틈에 여기까지!’
벼락처럼 도끼가 내리쳐졌다.
‘간격을 완전히 빼앗겼다!’
저만치 앞선 창날을 회수하긴 늦었다.
타리엘은 소매에 숨겨 뒀던 단검을 뽑아 쥐었다.
창자루와 함께 뻗어 도끼를 막았다.
트카아앙!
그리고 타리엘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나의 언월도가!’
산산이 부서진 단검과 함께 창자루가 절단됐다.
성력이 깃든 창날의 견고함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창자루가 이렇듯 종이처럼 잘릴 물건은 결코 아니었다.
‘저 도끼가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타리엘의 오판이었다.
용아귀는 언월도의 창자루를 자를 수 없다.
답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저것은……!’
타리엘의 눈이 부릅떠졌다.
상대의 자세가 기묘했다.
거대한 도끼를 쥔 채 아래로 향한 오른팔.
그와 반대로 왼손은.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고?’
어떻게 된 것인가.
분명 양손으로 파지해 도끼를 내리친 것이 아니었던가.
“너만 무기가 두 개일 거라 생각했냐.”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차게 들어 올려진 아틸라의 왼손엔 휘황한 빛을 내뿜는 검이 쥐여 있었다.
타리엘은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성검!’
아틸라는 용아귀로 언월도의 창자루를 내리쳤다.
그러나 그건 창자루를 절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올려치는 무휼의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반작용을 일으킨 것이었을 뿐.
“타, 타리엘 페살라스의 언월도가……!”
“저걸 부쉈다고?”
“말도 안 돼! 저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경악의 외침이 사방을 울렸다.
물론 아틸라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질풍처럼 몸을 돌린 무휼의 칼자루가 상대의 복부를 가격했고.
“이걸로 끝이다. 타리엘 페살라스.”
그에 맞춰 더욱 강한 회전력을 머금은 용아귀의 옆면이 타리엘의 머리통에 벼락을 선사했다.
콰앙! 머리부터 떨어진 그의 몸이 지면에 박혔다.
“이제부터는.”
미동 없는 상대의 목을 용아귀가 겨눴다.
“내가 무적자(無敵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