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무적자 (3)
“야수처럼 달려드는군! 인간 전사!”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엘프가 외쳤다.
아틸라는 눈앞의 세 전사장이 원작에서 샤를이 상대한 이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리나무숲에 진입한 시기도 이르고, 대전 상대 역시 샤를이 아닌 나로 바뀌었으니 다를 만도 하지.’
아틸라의 눈이 상대를 훑었다.
세 엘프 모두 장검을 손에 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앞쪽의 호전적인 녀석은 전형적인 전사 타입이군. 그러나.’
나머지 둘은 달랐다.
전사 엘프의 우측에 선 엘프는 양 허리에 단검을 차고 있었고.
뒤쪽에 선 마지막 엘프는 활과 화살통을 메고 있었다.
‘게임으로 치면 전사, 도적, 궁수 조합이라는 건가.’
아틸라는 피식 웃었다.
세 가지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 전사장을 배치해, 아틸라의 실력을 면밀히 살펴보겠다는 서리왕의 의도가 훤히 들여다 보였으니까.
“뭐, 그래보던가.”
아틸라는 손도끼를 뻗었다.
물론 적당히 힘 조절을 한 채로.
전사 엘프가 그것을 검으로 막아 냈다.
“뭐야. 고작 이 정도 힘인가.”
녀석이 비소하며 검을 밀쳤다.
그러나 아틸라는 석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사 엘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당황한 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덮였다.
“네놈!”
분노한 전사 엘프의 검이 아틸라에게 뻗어왔다.
섬광처럼 빠른 일격이었지만 아틸라의 동체시력은 그보다 뛰어났다.
목을 기울여 피한 아틸라가 상대의 손을 움켜쥐었다.
부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전사 엘프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요란 떨기는.
저 정돈 치유의 바람으로 금세 회복할 수 있다.
물론 회복하게 둘 생각은 없지만.
“네놈이 감히!”
전사 엘프가 반대편 손으로 검을 옮겨 반격을 취해 왔다.
그러나 아틸라가 더욱 빨랐다.
탄환처럼 쏘아진 도낏자루가 상대의 안면에 직격했고, 코뼈가 부서진 녀석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관객들이 경악의 목소리를 뱉었다.
“뭐, 뭐야!”
“전사장 하나가 벌써 쓰러졌다고?”
“서리나무의 전사장을 저렇게 어린애 다루듯……!”
널브러진 전사 엘프는 사지를 버르적대긴 했지만 일어서지는 못했다.
그러자 남은 두 엘프가 합동 공격을 벌여 왔다.
대응하려는 슈시아를 아틸라가 막았다.
“물러나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
슈시아의 몸이 굳어졌다.
발트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슈시아는 아틸라의 살기 어린 목소리 때문에, 발트는 아틸라가 어떤 활약을 펼칠 것인지가 기대됐기 때문이었다.
‘서리나무의 전사장을 저리도 손쉽게 제압하다니.’
발트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아틸라의 동작 하나하나에 더욱 집중했다.
“건방진 인간 전사!”
“이건 막을 수 없을 거다!”
도적 엘프와 궁수 엘프의 연계는 훌륭했다.
서리나무 일족의 전사들은 괴수들을 조우했을 시 조를 이뤄 대응한다.
즉, 지금 두 엘프는 아틸라를 산맥에서 마주한 괴수라 상정하고 덤비는 것이다.
‘졸지에 괴수 취급이냐.’
두 자루 검이 쌍머리의 뱀처럼 날아들었다.
하나를 회피하면 다른 하나의 공격에 당하고 마는 예리한 검로.
‘다이어울프의 연계가 생각나는군.’
아틸라는 피하지 않았다.
손도끼를 입에 물고 양손을 펼쳐 두 자루 검신을 움켜쥐었다.
콰득! 득……!
검날의 예리함이 피를 불렀다.
날선 통증이 손바닥에 이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아틸라는 팔을 안으로 꺾었다.
두 검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지다, 부서졌다.
“뭐, 뭐야 저건!”
“날아드는 검을 맨손으로 잡고, 구부려 부숴 버렸어?”
“말도 안 돼!”
관객들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이번만큼은 아이리스도 크게 놀랐다.
‘보통의 인간 전사와는 다르다.’
뛰어난 전투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사 아틸라는, 여타 전사와는 근본부터 다른 전투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전투엔 형식이 없어.’
검을 배운 자라면 무릇 초식(招式)이란 게 있기 마련.
검뿐 아니라 모든 무기, 하다못해 맨손 격투가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형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아틸라에겐 그게 없었다.
인간이 아닌, 흡사 야생의 괴수를 보는 듯한 느낌.
‘에르윈이시여. 당신께서 안배하신 것이 저 사내란 말입니까.’
슈시아가 에르윈의 성물을 잃어버린 날, 아이리스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성물을 굳이 되찾지 않아도, 언젠가 놀라운 실력을 지닌 인간 전사가 그것을 손에 든 채 서리나무숲을 찾으리라고.
아울러 그의 곁엔 슈시아가 함께할 것이며, 그와의 여정을 통해 잃어버린 엘프의 힘을 되찾게 되리라고.
그 계시를 따르기 위해 아이리스는 슈시아를 추방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서리검을 지금껏 찾지 않았다.
“빌어먹을!”
검을 잃은 도적 엘프가 단검을 뽑았다.
궁수 엘프는 뒤로 물러나며 활을 꺼냈다.
아틸라는 궁수 엘프를 추격할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놈들이 지닌 모든 힘을 사용하게 두는 편이 좋다.’
모든 힘을 사용하게 하고, 정면에서 부숴 버린다.
그래야 저 음흉한 서리왕의 콧대를 제대로 눌러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때였다.
“힘내거라! 야만전사야!”
생각지도 않은 바토리의 외침에 아틸라는 옆을 돌아봤다.
좋아하는 남학생의 운동 경기를 응원하는 여고생처럼 맑게 웃으며 손 흔드는 그녀의 모습에 아틸라는 놀라움을 넘어 당혹감을 느꼈다.
‘뭐, 뭐야. 쟨 또 왜 저러는 거야.’
“야만전사야! 너의 곁엔 내가 있느니라!”
아틸라는 바토리의 헛소리에 신경을 끄기로 했다.
마침 도적 엘프가 외쳤다.
“서리나무의 전사장은 물러서지 않는다!”
두 자루 단검이 쇄도했다.
그러나 아틸라를 타격하기엔 부족한 실력이었고, 어렵지 않게 그것을 피한 아틸라의 눈이 궁수 엘프를 찾았다.
어느새 저만치까지 거리를 벌린 녀석이 활시위를 매기는 것이 보였다.
서리나무 엘프의 종족 특성, 바람 걷기를 시전한 것이리라.
‘그래. 전사장은 전사장이라는 거군.’
서리나무 엘프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파우스트와 결전을 벌여야 한다.
그것을 대비해.
‘약간의 깨달음을 주는 것도 좋겠지.’
아틸라의 눈빛이 변했다.
퉁! 궁수 엘프의 손에서 화살이 떠나갔다.
아무리 발키리의 힘을 잃었어도, 엘프의 궁술은 인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시이이이잇!
변화구처럼 화살이 날아왔다.
회피 경로를 차단하듯 도적 엘프의 단검이 쇄도했다.
그래서 아틸라는 날아드는 화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도적 엘프의 손등에 박아 넣었다.
“끄아아아악……!”
도적 엘프가 비명을 질렀지만 잠시였다.
다른 손에 든 단검을 찔러 왔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틸라의 손도끼에 얻어맞고 지면에 박혔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화살이 날아왔다.
아틸라는 도적 엘프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낙하하는 힘을 이용해 가슴팍을 걷어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크헉……!”
녀석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아틸라는 손도끼를 휘둘러 코앞까지 근접한 화살을 쳐냈다.
그 자리로 검이 날아들었다.
맨 처음 코를 얻어맞고 쓰러졌던 전사 엘프.
‘벌써 회복한 건가.’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다.
아틸라는 핑그르르 몸을 돌려 검을 피했다.
주먹을 뻗어 다시 한번 상대의 코를 짓뭉갰다.
“크허어억……!”
그대로 녀석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검을 쥔 손을 걷어차 비무장으로 만든 아틸라는 상대의 몸을 방패처럼 들고 궁수 엘프에게 달렸다.
‘발키리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활을 쏠 수 있겠지. 하지만.’
녀석은 발키리가 아니다.
역시나 궁수 엘프는 활을 쏘는 것을 포기하고 검을 쥐었다.
“네놈……! 감히……!”
방패가 된 전사 엘프의 목소리가 시끄러워 따귀를 날렸다.
푸르뤄럭……!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으며 녀석이 기절했다.
기절한 몸뚱이를 궁수 엘프에게 던졌다.
대포알처럼 쏘아진 그것이 타깃을 가격했지만 충격은 크지 않았다.
놀라운 민첩성을 발휘한 궁수 엘프가 날아드는 몸뚱이를 물 흐르듯 옆으로 밀어낸 것.
그러나 그건 실수였다.
동료의 몸을 밀어내자마자 그의 시야를 채운 건 쇄도하는 아틸라의 주먹이었으니까.
퍼억! 주먹에 가격 당한 엘프의 허리가 뒤로 꺾였다.
이번에도 민첩성을 활용해 얼마간의 충격은 흡수했지만 그 정도론 부족했다.
‘무, 무슨…… 괴력이……!’
아틸라가 비죽 웃었다.
“그래. 네가 대장이로군.”
그 말을 끝으로 벼락처럼 주먹이 내리쳐졌다.
내장이 으깨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궁수 엘프의 몸이 지면에 박혔다.
쿵.
전투를 마친 아틸라가 긴 숨을 내뱉었다.
궁수 엘프를 포함해, 널브러진 세 엘프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 이럴 수가……!”
“혼자서 전사장 셋을 쓰러뜨렸다고?”
“말도 안 돼……!”
관객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아까보다 더욱 활짝 웃으며 손 흔드는 바토리를 제외한다면.
아틸라는 무심한 눈으로 아이리스를 바라봤다.
서리왕이 여기서 끝낼 리 없다.
지금 아틸라가 상대한 이들은 서리나무의 전사장 중 햇병아리에 속한다.
분명 제대로 된 전사장이 다시 덤벼올 터다.
원작에서 샤를에게 그랬던 것처럼.
‘준비한 걸 꺼내 보라고. 능구렁이 할망구.’
서리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훌륭한 결투였습니다 전사 아틸라. 그대는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전사였군요.”
그녀의 눈이 옆으로 돌아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일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아틸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뭐지. 방금 건.’
아이리스의 표정이 변했다.
“서리나무 일족의 수장으로서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직전과 달리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가 생각하며 아틸라가 답했다.
“말해 보시오.”
“그대의 무용은 실로 대단합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서리나무의 그 어떤 전사장도 그대를 쓰러뜨리진 못할 것 같군요. 그러나.”
“그러나?”
“때마침 서리나무숲을 찾은 귀한 손님 중에 그대 못지않은 전사가 있는듯합니다.”
아틸라의 눈썹이 꿈틀댔다.
관객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서리왕의 말속에 숨은 뜻을 감지한 것이다.
“설마……?”
“그럴 리가. 그는 아직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잖아.”
“하지만 왕께선 분명…….”
서리왕의 눈이 아틸라에게 고정됐다.
그 눈을 보며 아틸라는 깨달았다.
‘그렇군.’
아틸라의 입가가 비틀리듯 위를 향했다.
‘녀석이 왔다는 거냐.’
패영전의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엘프 영웅.
최초로 샤를에게 패배를 안겨 준 전사.
아틸라의 몸이 흥분으로 들끓었다.
서리왕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무적자(無敵者), ‘타리엘 페살라스’가 그대에게 결투를 청합니다.”
관객들이 폭발하듯 환호했다.
“저, 정말인가!”
“무적자, 타리엘 페살라스라고?”
“그가 언제 서리나무숲에!”
관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타리엘 페살라스의 모습을 찾았다.
이윽고 관객의 숲을 헤치며 건장한 체격의 전사가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엘프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지, 진짜다!”
“진짜 타리엘 페살라스다!”
“크리엘도라 대륙의 위대한 엘프 영웅!”
아틸라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상대 역시 무심한 눈동자로 아틸라를 바라봤고, 잠시 후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금니를 드러내며 아틸라도 웃었다.
‘자.’
무적자 타이틀을 빼앗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