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무적자 (2)
파우스트를 쓰러뜨리는 건 아틸라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놈들이 너무 빨리 날뛰기 시작했다.’
원작대로라면 파우스트는 아직 중간계에 개입할 시기가 아니다.
그러나 아틸라의 존재가 바토리의 관심을 끌었고, 그런 바토리를 인간으로 만든 탓에 파우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 예상한 일이긴 했지만.’
이전에도 말했듯 파우스트는 고위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추종하는 자들.
그들의 목적은 메피스토펠레스의 목적과 부합한다.
‘중간계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
고위악마 메피스토펠레스.
놈은 신들의 눈을 피해 중간계의 마력을 갈취하려 한다.
이유는.
‘대악마(大惡魔)로 거듭나기 위해.’
악마의 등급은 크게 다섯으로 나눌 수 있다.
하급 악마.
중급 악마.
상급 악마.
고위악마.
그리고.
‘대악마.’
대악마는 신에 필적하는, 아니 보는 관점을 달리하면 신보다 강력한 존재다.
심지어 고위악마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 놈들은 신과 자웅을 겨룰 정도니까.
어떻게 대악마도 아닌 고위악마가 신과 비슷한 힘을 낼 수 있을까.
그건 신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신들은 주신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
주신(主神).
모든 신들의 왕이자, 모든 신들을 빚어낸 절대적인 존재.
그런 주신의 울타리에 갇힌 신들은 자신이 지닌 힘을 오롯이 발휘할 수 없다.
‘대악마와 고위악마 역시 한때는 신이었다.’
그들은 주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원했다.
그래서 뜻이 맞는 신들과 힘을 키워, 오랜 투쟁 끝에 주신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그 길고 긴 투쟁의 역사를 원작자 김도현은 이렇게 명명했다.
‘주신 전쟁.’
아울러 전쟁의 여파로 천계엔 균열이 일어,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생성되는데.
주신의 힘이 그것을 막을 때까지, 균열은 전쟁 중에 죽은 신과 천사의 시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그렇게 그들이 외친 단말마의 숨결은 신세계의 대기와 구름이 되었고.
뼈와 살은 산과 대지가 되었으며.
눈물과 피는 강과 바다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인간, 엘프, 드워프, 노움 등의 지성체들이 함께 살아가는 터전, ‘중간계(中間界)’다.
한편 천계는 악마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구축된 것 외에 두 가지 격변을 맞이하는데.
첫째는 신들을 향한 주신의 구속이 더욱 단단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구속을 벗어난 신, 즉 악마들의 힘은 역으로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천계는 신계와 악마계로 분리되었고.
악마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거대한 사건이 발발한다.
‘대악마의 등장.’
강력한 힘을 지닌 몇몇 악마들이 스스로를 ‘대악마’라 칭하고, 나머지 악마들을 ‘고위악마’로 강등시켜 버린 것.
고위악마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이제야 주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더니, 이번엔 대악마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고위악마들은 반발했다.
주신과 그를 따르는 신들에게 대항했던 것처럼, 이번엔 대악마에게 도전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악마 전쟁’이다.
그러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고위악마들은 대악마를 당해내지 못했고.
오랫동안 이어진 악마 전쟁으로 천계의 일부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완전히 허물어진 세계는 중간계보다도 더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그렇게 악마들의 새로운 세상, 마계(魔界)가 탄생한다.
마계로 떨어진 고위악마들은 대악마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대악마에게 복종하는 척하며, 한편으로는 보다 강한 힘을 얻기 위해 은밀한 노력을 거듭했다.
그 노력파 고위악마 중 하나가 바로.
‘메피스토펠레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이용하기로 한다.
그들에게 흑마술(黑魔術)의 힘을 약속한 대가로 중간계의 마력을 갈취하기로 한 것.
그 첫 번째 희생양이 된 종족이 엘프다.
엘프들이 잃어버린 종족 특성.
그 대부분을 손안에 쥐고 있는 게 파우스트다.
아틸라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 쓰러뜨리는 편이 낫다.’
파우스트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적이다.
그들의 목적이 중간계의 번영과 평화를 크게 위협하기 때문.
원작에서는 샤를이 엘프와 대규모 연합군을 형성해 파우스트를 섬멸한다.
그 정도로 파우스트의 힘은 막강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할리와 노이어가 죽었다.
게다가 이쪽엔 바토리가 있다.
물론 인간이 된 그녀가 관조자 시절만큼의 힘을 발휘할 순 없을 테지만 아틸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서리왕에게 말했다.
“그녀의 곁엔 내가 있소.”
바토리의 눈이 커졌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아틸라를 돌아봤다.
아이리스의 눈빛이 깊어졌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요. 전사 아틸라.”
“게다가 구슬을 깨뜨리려면 리베르와 바토리를 관조자로 만든 신의 성물이 필요하오. 난 아직 그걸 가지고 있지 않소.”
“아직이라면, 그것마저 손에 넣을 생각이라는 겁니까.”
“그렇소.”
아이리스의 눈에 진한 흥미가 깃들었다.
“묻겠습니다. 생명의 보석을 빌려드린다면 그대는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힘을 되돌릴 수 있습니까.”
“물론이오.”
“아까 말씀하셨던 ‘명분’은?”
그녀의 눈은 이제 확연한 즐거움을 내비치고 있었다.
아틸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음흉한 능구렁이 할망구 같으니.
“슈시아를 데려가겠소.”
놀라 반문하는 슈시아를 무시하며 아틸라가 말했다.
“명분은 확실할 거요.”
아틸라는 아이리스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그녀는 ‘발키리’의 힘을 갖게 될 테니까.”
* * *
“발키리? 설마 먼 옛날 파우스트를 쓰러뜨렸다는 전장의 신궁(神弓)들을 말하는 건가.”
성문을 나서며 슈시아가 물었다.
아틸라에게 마음을 연 이후, 그녀의 말투는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아틸라가 답했다.
“잘 알고 있군.”
그것만이 아니다.
잃어버린 엘프의 종족 특성 중 가장 강력한 특성.
그것이 발키리의 힘이다.
또한 아직까지 파우스트가 확보하지 못한 유일한 힘이기도 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아틸라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가 좋군.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과는 다르게.”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더냐 야만전사야.”
“몰라도 돼.”
“넌 꼭 그렇게 종종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더구나.”
일행은 서리나무숲에 며칠 머물기로 했다.
자연의 기운이 강한 이곳에서 바토리의 몸을 얼마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슈시아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멸종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발키리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알아서 할 테니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으로나 안내해.”
“뭐라고? 엘프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건가.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네가?”
“난 먹어도 되잖아.”
“…….”
그때 맞은편에서 세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걸어왔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슈시아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호오.”
“진짜 슈시아잖아.”
“인간과 섞여 살더니 고약한 냄새가 배어 못 알아볼 뻔했군.”
그들의 눈이 바토리와 아틸라를 차례로 훑었다.
“당신인가. 일족의 보물을 되찾아 왔다는 인간 전사가.”
“동굴 안의 서리곰들을 박멸했다고 하던데, 정말 대단하군.”
이들은 발트에게 아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용무라도 있나.”
“오. 목소리 한 번 굵직하시군. 원래 그런 목소리인가?”
“아니면 옆에 여인들이 있다고 무게 좀 잡아 보려는…….”
“그만하거라.”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슈시아.
엘프들이 과장스럽게 눈을 키웠다.
“으응? 뭐냐 그 고압적인 말투는.”
“아직도 네가 왕의 후계자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슈시아.”
“그만하라고 했다. 내가.”
아이리스 호어프로스트의 하나뿐인 딸이자 후계자였던 슈시아.
이것이 추방당하기 전의 그녀가 지녔던 본연의 목소리였다.
직전까지 종종 내비쳤던 말투는 인간과 섞여 살며 습득한 연기에 불과했던 것.
엘프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우린 네 말을 따를 이유가 없다. 넌 정식으로 복귀한 상태도 아니고, 흘러간 시간은 우리 셋을 일족의 전사장으로 만들었거든.”
“호오. 그래서 그리 콧대를 세우며 거들먹대는 건가. 내 눈만 마주쳐도 오줌 지도를 그리던 개허접새끼들이.”
마지막엔 인간의 말투까지 쏟아내며 슈시아가 으르렁댔다.
아틸라는 슬슬 짜증이 났다.
얼른 술과 고기를 먹고 싶은데.
“네깟 것이 감히 전사장을 모욕해!”
“무릎 꿇고 사죄해라! 그러지 않으면 전사장의 권한으로 결투를 신청하겠다!”
아틸라의 표정이 변했다.
가만.
이거 어디서 봤던 전개인데.
‘아.’
생각났다.
원작에서 서리나무숲을 찾았던 샤를과 슈시아.
그때도 전사장이라는 녀석들이 슈시아에게 시비를 걸어왔었다.
샤를이 겪어야 하는 일을 아틸라가 대신하고 있는 것.
‘샤를아. 내가 자꾸 네 분량을 가로채는구나. 이러다 패영전 주인공 바뀌겠다.’
무사히 지구로 돌아가면 리메이크라도 해야 하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아틸라는 사태를 관망했다.
예상했던 말이 슈시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결투를 받아들이겠다. 단, 조건이 있다.”
아이고 역시나.
“단체전을 원한다.”
* * *
“슈시아가 결투를 한다고?”
“전사장들이 요구했고, 슈시아가 받아들인 모양이던데.”
“그렇지만 슈시아는 아직 정식 복귀한 것도 아니지 않나.”
“왕께서 허하셨다더군.”
“왕께서?”
연무장 앞엔 많은 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리스가 도착하자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자애롭게 미소하며 손 흔드는 서리왕을 향해 아틸라는 헛웃음을 뱉었다.
‘자기가 꾸민 짓이면서, 하여간 연기도 잘 해.’
원작에서 벌어진 결투는 슈시아를 자극해 샤를의 실력을 가늠하려 한 아이리스의 술수였다.
오랫동안 인간 세계에서 지내온 슈시아는 전사장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자연스레 단체전 양상으로 번질 걸 예상했던 것.
‘실력을 보여 주십시오. 전사 아틸라.’
아이리스는 기대에 찬 눈으로 아틸라를 바라봤다.
서리곰을 몰살하고 에르윈의 성물을 되찾아온 사내.
그것만으로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으나.
아이리스는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없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보일 수 있을까.’
서리나무 일족의 단체전은 3 대 3이 기본.
그러나 일행에서 전사는 아틸라와 슈시아뿐이었기에 수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발트가 합류했다.
“그대처럼 용맹한 전사와 함께 싸우게 돼 영광이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발트는 아이리스의 첩자.
물론 그가 아틸라를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발트는 우직한 녀석이지. 그래서 서리왕도 놈을 선택한 거고.’
발트의 임무는 아틸라와 같은 편에서 싸우며, 보다 가까이서 아틸라를 관찰하는 것.
아틸라가 말했다.
“물러나 있어라. 슈시아.”
“무슨 소리냐. 나도 한 명쯤은 맡을 수 있다.”
“네가 이길 상대는 없어.”
서리나무의 전사장들은 강하다.
그러나.
아틸라는 더욱 강하다.
‘이참에 서리왕에겐 본때를 보여 주는 편이 좋겠지.’
아틸라는 손도끼를 꺼냈다.
어차피 저들은 몸풀기용 상대.
도낏자루가 부서지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하며 쓰러뜨리는 편이 낫다.
‘괜히 죽이기라도 했다간 귀찮아질 테니.’
“뭐야. 그런 장난감으로 우릴 상대하겠다고?”
“그 커다란 도끼는 장식이었나?”
“혹시 방패 아냐? 와하하하하!”
상대들이 아틸라를 보며 비웃었다.
아틸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개시 신호가 울리자마자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