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61화 (61/425)

061. 무적자 (1)

“어라? 발트.”

슈시아의 얼굴.

생각지도 못한 슈시아의 등장에 발트는 놀랐다.

일족에서 추방당한 그녀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서리곰의 동굴 안에서.’

그럼에도 발트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긴장을 풀었다.

둘은 어릴 적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슈시아. 네가 어떻게.”

그때 슈시아의 등 뒤에서 두 명의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아 보이는 아름다운 여자와.

그 여자를 안아들고 선 호리호리한 남자.

“애송이 제롬. 네놈 때문에 아틸라가 화가 나지 않았더냐.”

“그, 그게 무슨……! 스승님께서 도저히 못 기다리시겠다며 굴 안으로 들어가자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흐응. 글쎄다. 난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

둘의 대화를 들으며, 그리고 서리곰들의 시체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발트는 생각을 정리했다.

‘상당수의 서리곰이 화속성 마법에 당했다.’

그것도 보통 강력한 마법이 아니다.

빙속성의 서리곰을 쓰러뜨리는 데 가장 효율이 높은 마법이라면 단연 화속성이지만.

웬만큼 강력한 화속성 마법이 아니라면, 극한의 빙속성을 지닌 서리곰에게 자그만 화상조차 입히지 못한다.

‘그런데 저 곰들은.’

마법을 맞자마자 즉사했다.

시체만 봐도 알 수 있다.

발트는 서리곰과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러본 전사장이었으니까.

‘슈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발트의 눈이 인간 남녀를 향했다.

‘그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란 말인가. 저 둘은.’

그것만이 아니다.

마법에 당해 쓰러진 곰들 사이로, 날붙이에 절단돼 죽은 곰들이 보였다.

‘인간 전사의 솜씨인가.’

이제 보니 마법사에게 당한 곰보다 전사에게 당한 곰이 더욱 많아 보였다.

‘무기 한 자루 들고 서리곰들을 쓸고 다녔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 순간 발트의 머릿속에 어느 위대한 엘프 전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타리엘 페살라스.’

그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리엘 페살라스는 이곳에 없다.

방랑 생활을 즐기는 그가 서리나무 일족의 숲을 방문하는 일은 십수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었다.

그때 동굴 안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발트는 시력에 감각을 집중했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도 상대의 모습이 또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한 손엔 이가 빠진 거대한 도끼를, 다른 한 손엔 짤막한 검을 든 인간 전사.

그의 어깨 위엔 자그만 회색곰이 위풍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끼아옹!

새끼곰의 울음에 전사의 눈이 앞을 향했다.

그의 시선과 발트의 시선이 부딪쳤다.

발트는 움찔 몸을 떨었다.

‘무슨 살기가……!’

인간 수명의 몇 배나 되는 세월을 살아온 발트였지만 저런 눈을 한 전사는 본 적이 없었다.

어둠을 뚫고 나온 전사가 걸음을 멈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 칠갑을 한 모습.

그것이 저 전사가 눈앞의 수많은 서리곰들을 학살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전사가 물끄러미 발트를 응시했다.

등 뒤에서 무언갈 꺼내 바닥에 던졌다.

쿵.

서리곰의 머리.

그것도 다른 서리곰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저, 저건……!”

발트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 머리의 정체에 대해 발트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우두머리!”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었지만.

진정 경악할 일은 따로 있었다.

“바, 바바 발트 전사장!”

“저걸 보십시오!”

등 뒤에서 또 하나의 물건을 꺼내드는 전사.

핏물 낭자한 얼굴 속에서 야수의 송곳니가 번뜩였다.

“너희들. 마중 나온 건가.”

전사의 손엔 서리검이 들려 있었다.

* * *

대륙 서부를 길게 북남으로 가로지르는 칼날 산맥.

하늘의 왕 드래곤조차 그 너머를 알 수 없다는 대자연의 경이(驚異).

아스투리아 왕국과 면하는 그곳, 칼날 산맥의 어느 초입부에.

서리나무숲으로 통하는 틈새가 있다.

“이제 위치를 알았으니 다음부턴 길잡이가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제롬의 속삭임에 바토리가 답했다.

“엘프의 영역으로 통하는 틈새는 공간 상의 절대적 좌표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니란다.”

엘프의 숲으로 향하는 틈새.

그것은 엘프의 신 ‘에르윈’의 가호를 받는다.

그래서 아틸라에겐 반드시 길잡이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 길잡이가 슈시아여야만 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만.’

슈시아의 인도에 따라 일행은 틈새를 통과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렇게 틈새를 통과한 일행의 눈앞에 등장한 것은.

“오오……!”

시야를 메우는 아름다운 풍경에 제롬이 감탄사를 뱉었다.

바토리의 입에도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제롬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스승님.”

바토리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라진 녹마탑의 탑주이자, 제롬의 첫 번째 스승인 파브리스.

파브리스는 오랜 시간 엘프의 마력을 갈구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제롬이 마침내 엘프의 숲을 방문했으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 멋진데.’

놀란 건 아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틈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엘프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흩날리는 담홍빛 잎새.

하늘 높이 솟은 새하얀 나무들.

같은 빛깔의 풀과 흙.

풀벌레 소리.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틸라를 놀라게 한 건.

‘내 머릿속 상상과 완전히 동일하다.’

아틸라는 그것이 가장 신기했다.

마치 패영전을 읽은 어느 절대적인 존재가 소설 속 묘사를 그대로 이곳에 옮겨 놓은 것 같지 않은가.

혹은.

‘나 자신이 직접 이곳을 경험한 뒤 소설로 옮긴 것처럼.’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따라오시오.”

발트가 낮게 말했다.

그러고는 일행을 숲 깊숙한 곳에 우뚝 솟은 성으로 안내했다.

- 서리나무 엘프의 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 같았다.

아틸라는 원작의 문장을 기억했다.

지나온 숲의 모든 풍경과 마찬가지로, 눈앞의 성은 자신의 상상 속 세계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잠시 기다리시오.”

문지기와 대화를 나눈 발트가 돌아왔다.

그 사이 서리나무 장식이 유려한 곡선으로 양각된 아치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앞장서는 발트의 뒤를 따라 일행은 한동안 걸었다.

넓은 성 안엔 또 하나의 숲속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아름답군.’

아틸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순백색 숲을 바라봤다.

제롬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종종 감상을 방해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꿈결 속을 거니는 듯한 몽환의 숲.

그것을 지나 마침내 일행은 알현실에 도착했다.

맑은 울림의 목소리가 일행을 맞이했다.

“절 만나고 싶다 하셨습니까.”

서리나무 일족의 수장.

일명, ‘서리왕’이라 불리는 그녀는 바토리 못지않은 신비로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틸라가 답했다.

“그렇소.”

“서리검을 되찾아 오셨다고요.”

“그 역시, 그렇소.”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그대와 함께하고 있군요.”

그 말에 슈시아가 놀란 눈으로 바토리를 돌아봤다.

서리왕은 슈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엘프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자리엔 아틸라 일행과 서리왕만이 남았다.

바토리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아이리스 호어프로스트, 서리의 왕아.”

“오랜만입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핏빛의 마녀여.”

바토리의 입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직설적으로 말했다.

“넌 내가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그러합니다.”

아이리스 역시 돌려 말하지 않았다.

슈시아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서리왕과 바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엷게 미소했다.

“그러나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대는 우리에게 서리검을 되찾아 주셨군요.”

“전사 아틸라의 힘이었다.”

바토리가 이어 말했다.

“너 역시 찾으려고만 했다면 언제든 되찾을 수 있었을 터.”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그리했다면 일족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해야 했겠지요.”

“에르윈의 성물보다 그것이 더욱 중요했더냐.”

“제겐 그렇습니다.”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바토리의 왼팔을 향했다.

그것을 응시하던 그녀의 동공이 아주 잠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팔이 큰 손상을 입었군요.”

“그렇게 되었구나.”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일 테고요.”

바토리는 답하지 않았다.

“전 그것을 치유할 능력이 없습니다.”

“알고 있는 일이다.”

바토리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제롬은 흠칫 놀랐다.

바토리를 향했던 제롬의 시선이 아틸라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아틸라 역시 무심한 표정을 고수할 뿐이었다.

아틸라가 입을 열었다.

“아이리스 호어프로스트. 당신의 마력으로 바토리의 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소.”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대는 서리검을 되찾는다는 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내게 온 것입니까.”

“내가 원하는 건 당신에게 바토리를 치유해 달라 부탁하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생명의 보석이 필요하오.”

아이리스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불가합니다. 외부인에게 그것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서리검은 이미 오랜 시간 다른 곳에 있었소.”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서리검을 드리겠소.”

묵묵히 아이리스를 응시하던 아틸라가 말했다.

“보석의 소유권을 넘기라는 뜻이 아니오. 빌려주는 것이면 족하오.”

“전사 아틸라. 생명의 보석엔 핏빛의 마녀를 치유할 힘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하겠소.”

아틸라는 서리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이리스는 한참 동안 그것을, 그리고 아틸라를 바라봤다.

“제가 생명의 보석을 빌려드릴 거라 확신하시는 겁니까.”

“당신은 슈시아의 귀환을 원하고 있고,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하오. 보석을 빌려준다면 그 ‘명분’을 만들어 드리겠소.”

“제 딸아이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와 서리검을 되찾아왔다 하여 무마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파우스트.”

아틸라의 말에 아이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놈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서리왕,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흑마술사는 죽은 자를 깨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자들.

자연의 힘을 숭배하는 엘프와는 상극인 존재다.

“파우스트가 다시금 마수를 펼치려 하고 있소. 먼 옛날 그랬었던 것처럼. 그러나.”

아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날, 파우스트를 저지했던 바토리는 힘을 잃었소.”

아이리스는 바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행과의 면담을 허한 것은 바토리가 이전에 파우스트를 섬멸한 일이 크게 작용한 결과다.

“놈들을 막으려면 바토리의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소. 그건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될 거요.”

“그대가 직접 그녀를 관조자로 되돌리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지금의 그녀는 치유에 성공한다 해도 이전과 같은 마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역시.’

서리왕은 알고 있었다.

바토리와 리베르가 처한 상황을.

여유롭게 입가를 올리며 아이리스가 말했다.

“그런 반쪽짜리 힘을 지닌 핏빛의 마녀가 파우스트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그건 걱정 마시오.”

“이유를 듣고 싶군요.”

아틸라는 무심하게 답했다.

“그녀의 곁엔 내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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