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칼날 산맥의 괴수 (2)
서리곰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가장 먼저 달려온 녀석의 머리가 용아귀에 절단됐다.
측면을 기습한 놈의 정수리엔 무휼이 찍혔다.
몇 마리의 서리곰이 추가로 바닥을 굴렀다.
퍼억!
서리곰의 앞발이 아틸라를 가격했다.
아틸라의 몸이 휘청였지만 상대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가격 당한 힘을 이용해 힘차게 허리를 회전한 아틸라가 놈의 앞발을 잘라 버렸으니까.
우어어어!
피분수를 뿜어내며 서리곰이 울부짖었다.
그 표정 그대로 놈의 얼굴이 머리에서 분리됐다.
얼굴을 잃고 부들대는 녀석의 가슴을 걷어찬 아틸라는 발판처럼 그것을 밟고 뛰어올랐다.
“하아아아압!”
공중에 떠오른 용아귀가 날카로운 빛의 선을 그었다.
그 동작에 세 마리의 서리곰이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
바닥에 착지한 아틸라는 무력화된 곰의 몸뚱이를 방패 삼아 다른 서리곰들의 공격을 막았다.
쏟아지는 핏물이 아틸라의 얼굴을 적셨다.
시야도 방해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아틸라는 무기를 휘둘렀다.
신들린 춤을 추었다.
[ 스킬, 학살의 보답이 발동되었습니다. ]
어둠에 물든 공간.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날붙이의 빛.
뜨거운 입김.
치솟는 피와 땀.
[ 체력을 2% 회복합니다. ]
[ 체력을 2% 회복…… ]
아틸라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학살의 보답이 틈틈이 2퍼센트의 체력을 회복시켰지만 놈들은 스켈레톤 따위 약체가 아니었다.
채워지는 체력에 비해 소모되는 체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빌어먹을. 아직 우두머리 얼굴은 보지도 못했는데.’
다행인 것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은 동굴 안이었기에, 용아귀의 손상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아틸라는 웃었다.
‘이 세계로 떨어진 이래 최악의 위기 상황 같은데.’
주인의 영역을 사용해 펀치를 불러들일까 생각하던 아틸라는 그만두었다.
펀치와 함께 사라졌던 도롱뇽을 불러들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이유.
자칫 펀치가 위험해질 수 있다.
‘가만.’
아틸라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돌진의 힘을 이용하면.’
전방을 주시했다.
빽빽하게 몰려드는 서리곰들 사이에서 사거리를 확인했다.
아틸라는 적절한 타깃을 찾았다.
돌진이 가능한 사거리 안에 있으면서, 자신과 가장 먼 곳에 있는 녀석.
‘저놈이다.’
아틸라는 지체 없이 돌진을 시전했다.
퍼퍼퍽! 퍼퍼퍼퍼퍽!
돌진 경로에 서있던 서리곰들이 볼링핀처럼 흩어졌다.
그 와중에 아틸라의 체력도 다소 줄었지만 무시했다.
덕분에 아틸라 앞엔 두 마리의 서리곰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까.
우어어?
그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녀석은 아무런 방어도 해보지 못하고 용아귀에 목이 잘렸다.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새끼가.”
남은 서리곰 역시 같은 신세가 되었다.
뻥 뚫린 굴속을 향해 아틸라는 달렸다.
쿵쿵대는 발소리가 등 뒤를 울렸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질주했다.
이윽고 떠올랐다.
[ 환수, 펀치가 함께 싸우길 원합니다. ]
[ 환수, 도롱뇽이 함께 싸우길 원합니다. ]
[ 파티를 맺으시겠습니까? Y/N ]
“당연히 예스지!”
알림음과 함께 두 환수의 썸네일이 생성됐다.
아틸라는 곧장 펀치의 스킬을 시전했다.
[ 스킬, 거대화가 활성화됩니다. ]
우어어어어어!
우렁찬 포효가 동굴 안을 울렸다.
그제서야 아틸라는 한시름을 놓았다.
거대화한 펀치는 그리 쉽게 당하지 않을 테니까.
상태창을 통해 펀치의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좋았어! 서리검 삼켰구나! 펀치!’
아틸라의 눈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왔다.
‘응?’
인벤토리에 못 보던 것이 들어 있었다.
때마침 들려오는 도롱뇽의 메시지.
- 야 이 미친 곰탱이 새끼야! 뱉어! 뱉어내라고!
- 이놈은 갑자기 왜 또 커진 거야!
아틸라는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도롱뇽이 몰래 펀치를 따라갔던 이유.
우두머리에게 정체를 들킨 펀치가 바깥이 아닌 안으로 도주했던 이유까지도.
‘도롱뇽, 이 또라이 새끼.’
머지않아 펀치의 뒷모습이 보였다.
펀치가 상대 중인 서리곰에게 돌진한 아틸라는 놈의 몸을 동강 낸 뒤 펀치의 인벤토리를 뒤졌다.
그리고 꺼냈다.
[ 불정령의 반지 ]
사방에서 밀려드는 서리곰의 파도를 보며 아틸라는 웃었다.
‘서리곰들아.’
[ 사용 시, 일정 시간 착용자의 무기에 화(火)속성을 부여합니다. ]
[ 빙(冰)속성 대상에게 20퍼센트의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
죽었다고 복창해라.
* * *
엘프는 눈이 좋다.
빛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웬만한 사물은 충분히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동굴 속을 달리는 슈시아는 아틸라가 만들어 낸 전투의 흔적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었다.
‘뭐, 뭐야 이게!’
‘헉! 저기도!’
‘여기 또 한 무더기가……!’
바토리의 부탁으로 슈시아는 아틸라를 향하는 중이었다.
‘도와줄 수 있겠느냐. 나와 제롬이 들어갔다간 정말 불같이 화를 낼 것 같구나.’
바람 걷기를 시전한 슈시아의 발은 빨랐다.
그래서 금세 아틸라와 조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서리곰의 시체뿐.
‘이게 말이 돼……?’
인간의 수준이 아니다.
아니, 엘프나 드워프 최상급 전사 중에도 이 정도 무력을 가진 이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미친……. 군신(軍神) 아레스가 현신하기라도 한 건가.’
아무리 바토리의 도움이 있었다곤 해도.
인간 전사 한 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심지어 불길 뒤의 사체는 모두 아틸라 혼자만의 작품이 아닌가.
‘정말 터무니없는 괴물을 만났어.’
서리곰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보였다.
‘빛?’
동굴 안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태양처럼 투명한 빛이 아닌.
붉은 기운을 머금은 저것은.
퍼거거걱!
아틸라의 도끼질에 서리곰이 장작처럼 쪼개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체의 단면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화, 화속성 무기였어?’
그럴 리가.
속성 마법이 깃든 무기는 결코 흔하지 않다.
아니, 그보다 아틸라의 전투는 지금 처음 보는 것이 아니다.
길잡이 숲의 마귀를 소탕할 때도.
조금 전 동굴 밖의 서리곰들을 도륙할 때도.
그의 무기엔 아무런 속성도 담겨있지 않았다.
게다가.
우어어어어!
거대한 회색곰이 아틸라를 도와 싸우고 있다.
저 낯익은 털빛은.
‘설마.’
슈시아의 동공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이내 슈시아는 저 커다란 곰이 펀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 맙소사! 뭘 먹고 저렇게 커졌어!’
머리에 주먹만 한 혹이 달린 채 기절한 도롱뇽도 보였다.
‘아틸라에게 맞은 거군.’
슈시아는 섣불리 전투에 끼어들 수 없었다.
아틸라와 펀치의 연계는 훌륭했고, 자신이 끼어들었다간 도리어 망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돕긴 해야 하는데.’
그때였다.
‘……응?’
슈시아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활력이 몸 안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뭐, 뭐야 이건……?’
* * *
[ 동료, 슈시아가 함께 싸우길 원합니다. ]
‘나이스 타이밍.’
아틸라는 얼른 수락했다.
‘확실히 심경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군.’
그동안 슈시아는 아틸라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아틸라 역시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유는.
‘지금의 슈시아에겐 내가 필요하다.’
슈시아는 서리나무숲으로 귀환하길 원한다.
또한 자신의 실수로 빼앗긴 일족의 보물을 되돌려 놓길 원한다.
그러려면 아틸라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원작에서 샤를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오늘 슈시아는 처음으로 아틸라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파티를 맺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길잡이 숲의 마귀들을 처리하는 동안, 슈시아에게선 단 한 번도 파티 요청이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파티원이 된 슈시아의 종족 특성은.
지금의 아틸라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 치유의 바람이 활성화됩니다. ]
치유의 바람.
마력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륙의 모든 엘프가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종특.
재밌는 점은 이게 파티원에게도 적용된다는 거다.
‘좋아. 회복되고 있다.’
많은 양은 아니다.
그러나 한숨 돌릴 정도로는 충분하다.
슈시아가 오기 전, 체력은 거의 바닥에 가까웠으니까.
‘위험했지. 상당히.’
그래서 아틸라는 체력 수치를 확인하며 다소 소극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서리곰들도 대부분 쓰러져, 학살의 보답 버프도 추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던 중 슈시아가 도착한 것이다.
[ 펀치의 거대화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
메시지와 함께 펀치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물러나있어! 펀치!”
끼아옹!
주변을 둘러보던 펀치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기절한 도롱뇽을 꿀꺽 삼키고는 구석진 곳에 웅크렸다.
그때 서리곰 한 마리가 슈시아를 발견했다.
우어어! 사나운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간 서리곰이 슈시아에게 앞발을 휘둘렀다.
퍼걱!
슈시아의 무릎이 지면까지 굽혀졌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쌍수로 단검을 들어 막았다.
다만 힘에 밀려 주저앉았을 뿐.
슈시아의 눈이 커졌다.
‘내가, 막아 냈다고?’
슈시아는 이전에도 서리곰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그녀는 수차례 겪어 봤다.
그러나 지금처럼 피해 없이 방어에 성공한 건 처음이었다.
‘힘이…… 강해졌어?’
일족에서 쫓겨난 뒤 슈시아는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분명 이전보단 강해졌을 터다.
그러나.
전신을 휘돌듯 감싸는 지금의 활력은 무언가 이상했다.
‘설마, 아틸라의 이능(異能)인가!’
길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공격을 막아 낸 상대에게 더욱 분노한 서리곰이 2차 공격을 감행했으니까.
“빌어먹을!”
슈시아는 몸을 굴려 그것을 피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슈시아는 저 한 마리라도 붙잡아 두어 아틸라를 도와야겠다 생각했다.
단검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쿵쿵쿵쿵쿵!
순식간에 달려온 곰의 앞발이 그녀의 시야를 잠식했다.
그녀의 동공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서리곰의 공격 동선을 확인하며 하체를 구부렸다.
팔 하나쯤 부러질 각오는 해두고서.
그때였다.
[ 도발의 외침 ]
슈시아를 공격하려던 서리곰이 빙글 몸을 돌렸다.
이어 측후면을 난입한 아틸라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슈시아의 눈이 커졌다.
‘방금, 분명히……!’
때마침 ‘직관(直觀)’을 시전한 슈시아는 볼 수 있었다.
아틸라의 몸에서 불그스름한 빛이 발산되며, 서리곰이 내뿜는 살기의 방향을 강제로 돌려 버리는 것을.
‘저런 이능이 있다고?’
듣도 보도 못했다.
아니, 저런 게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퍼거거걱!
아틸라가 휘두른 용아귀가 서리곰의 몸을 갈랐다.
갈라낸 것을 넘어 폭파시켰다.
슈시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 직전까지 없던 화속성 공격에 이어……!’
강해졌다.
동굴에 들어오기 전보다 아틸라는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슈시아는 아틸라의 몸에서 또 다른 기운이 발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저건 또 뭐야……!’
아틸라의 입가가 길게 찢어지는 것이 보였다.
노림수를 적중시킨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자신만만한 표정.
이유는 있었다.
[ 타란툴라의 맹독을 이겨 낸 육체가 한 단계 진화합니다. ]
[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
[ 이 효과는 10분 동안 지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