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칼날 산맥의 괴수 (1)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일명 ‘죽음의 숨결’이라 불리던 이 미치광이 드래곤에겐 한 가지 재밌는 취미가 있었다.
바로, 대륙의 신비로운 아이템을 수집해 숨겨 두는 것.
‘오. 득템.’
사실 보물을 수집하는 건 드래곤이란 종에겐 흔한 취미지만.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조금 달랐다.
보물을 숨겨두는 장소를 그 자신조차 모르게 했으니까.
‘열려라. 틈새.’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시공의 틈새를 열어 보물을 던졌다.
그렇게 틈새로 흘러들어간 보물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흩어졌고.
‘꼭꼭 숨어라. 지느러미 보일라.’
그 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다시금 잃어버린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불멸의 삶을 사는 드래곤이기에 가질 수 있는 취미.
‘이번엔 어디에 있으려나. 흐흐흐.’
그리고.
아틸라와 함께 칼날 산맥에 도착한 도롱뇽은.
‘응? 여기 보물이 하나 있잖아!’
오래전 틈새에 던져 놓은 보물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 순간 도롱뇽은 깨달았다.
‘그래! 이렇게 야만 미물을 따라다니며 보물을 찾는 거야!’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시절에 숨긴 보물들.
그중엔 잃어버린 힘을 되찾는 데 도움 되는 것들도 꽤 있었다.
‘그래그래. 잘하면 힘을 회복해 도망칠 수 있을 지도! 예전 힘의 반의반, 아니 반의반의반만 돌아와도 야만 미물 같은 건 그냥 콱!’
그때 펀치의 의식이 들려왔다.
- 내 친구 도롱뇽아.
- 저게.
- 서리검?
아틸라가 들었으면 까무러칠 일이었다.
그간 아틸라는 펀치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려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심안도 통하지 않았다.
표정으로 대략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이렇게 언어의 형식으로 말하는 건 경험한 적이 없었던 것.
‘오. 그래그래. 그게 서리검이다. 자자자자 잠깐! 아직 삼키지 마! 우두머리가 깔고 자는 중이잖아!’
- 삼키면.
- 안 돼?
- 왜?
‘저놈이 깨어나면 귀찮아져. 예전의 나였다면 콧김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미물 중의 미물 새끼지만, 지금 우리 중에 저걸 잡을 수 있는 놈은 없다고.’
- 아틸라가 있어.
- 아틸라는.
- 강해.
‘그래그래. 야만 미물…… 아니 우리 주인이 강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저건 그보다 더한 괴물이라고! 얼마 전 봤던 그 커다란 거미 있지? 걔보다 훨씬 더 센 놈이야! 진짜진짜 엄청난 괴물! 알겠어?’
- 아틸라는.
- 우리 엄마도 죽였는걸.
‘응? 엄마를 죽여?’
- 응.
- 우리 엄마.
- 엄청 강했어.
- 저 곰보다 더.
- 하지만 죽었어.
- 아틸라에게.
그 말엔 도롱뇽도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조르르 펀치의 이마 위로 올라간 도롱뇽의 몸이 투명하게 변했다.
후방을 경계하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면 왜 녀석을 따라다니는 거야? 네 어미를 죽인 원수잖아.’
- 우리 엄마.
- 스스로 죽음을 택했어.
- 바토리의 저주 때문에.
‘바토리? 후……. 그 할망구는 진짜 예전부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게 일이라니까.’
- 아틸라.
- 엄마 뱃속에서 날 꺼내 줬어.
- 저주로부터 구해 줬어.
- 날 보살펴줬어.
‘그래서 따라다닌다는 거냐?’
- 엄마가 말했어.
- 우리는 동방에서 왔다고.
- 그리고 우리는.
- 대무신왕의 후예를.
- …….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 서리검 삼켰어.
- 우두머리 깨어났어.
휘둥그레진 도롱뇽의 눈이 뒤로 돌아갔다.
잠에서 깬 우두머리가 펀치를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이, 이런 시발! 달려!’
- 안으로?
- 아니면 밖으로?
그렇게 묻는 펀치는 이미 안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끄아악! 떨어질 뻔했잖아 이 미련 곰탱이 새끼야!’
- 미안.
- 미안해 내 친구 도롱뇽아.
‘곰탱이 미물 새끼가. 뭘 자꾸 친구래!’
성난 우두머리의 포효가 동굴을 울렸다.
도롱뇽이 육성으로 외쳤다.
“빌어먹을! 그대로 달려!”
쿵쿵대는 발소리가 등 뒤를 추격했다.
* * *
“야, 야만전사야!”
우두머리의 포효를 듣자마자 아틸라는 달렸다.
뒤를 쫓으려는 바토리를 제롬이 사력을 다해 붙잡았다.
“놓지 못하겠느냐!”
“아, 안 됩니다! 그럼 전 아틸라 님에게 맞아죽습니다!”
아틸라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제롬에게 당부해 두었다.
바토리를 절대로 전투에 참여시키지 말라고.
“스, 스승님! 제발 저 좀 살려 주십……히엥……?”
바토리의 잡기술에 제롬이 잠들었다.
“야, 야만전사야……! 내가 지금 가겠다……!”
무작정 아틸라의 뒤를 쫓는 바토리를 보며 슈시아가 외쳤다.
“미친! 이렇게 재워 놓고 가면 얜 죽는다고!”
슈시아는 제롬을 둘러업었다.
인간 행세를 할 때 습득한 욕설과 거친 말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염병! 우라질! 이런 정신 나간 새끼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슈시아도 바토리를 따라 달렸다.
바토리는 이미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읊어대고 있었고.
저만치 앞에서는 용아귀를 뽑아든 아틸라가.
콰드득!
문지기 서리곰의 허리를 절단했다.
슈시아가 경악했다.
‘뭐, 뭐야! 한 방에 죽였어?’
일족의 전사들도 서리곰을 상대할 수 있다.
그러나 셋이서 하나를 상대하는 게 기본이었다.
물론 ‘전사장(戰士將)’ 정도의 실력자라면 혼자서도 가능은 했지만.
‘저렇게 한 방에 죽이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이히테 페로 노음니하!”
바토리의 손에서 창날보다 거대한 불화살이 쏘아졌다.
그것은 동굴 밖으로 튀어나오던 서리곰 세 마리의 가슴을 연이어 관통했고.
파캉! 파캉! 파카카캉!
불타는 심장을 부여 쥐며 울부짖던 곰들이 짚더미처럼 무너졌다.
‘저, 저건 또 뭐야!’
슈시아의 입이 대문짝만 하게 벌어졌다.
‘어, 엄청난 마법사였잖아!’
저 정도의 마법사는 결코 흔치 않다.
아틸라의 보호를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미친놈들……! 이거 정말 미친놈들이잖아! 아하하하하!”
슈시아가 깔깔대며 웃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일족의 숲으로 귀환할 수 있을지도 몰라!
퍼거거거걱!
파도처럼 밀려드는 서리곰들을 용아귀가 깨부쉈다.
그러나 동굴 입구는 거대했고, 쉴 새 없이 서리곰들이 튀어나왔기에 아틸라는 좀처럼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슈타그 뉴미 히그니스!”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그것은 아틸라를 급습하려던 서리곰들을 한꺼번에 통구이로 만들었다.
“크흐윽……!”
단 두 차례의 마법을 사용했을 뿐인데 바토리의 얼굴엔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어찌하여 이리도 약해진 것이더냐……. 멸망한 왕국의 철부지 공주야…….”
바토리의 입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몸이 휘청이는가 싶더니 옆으로 넘어갔다.
아틸라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빌어먹을 제롬 새끼. 넌 오늘 뒤졌다.”
아틸라는 바토리를 등에 업었다.
“손으로든 마법으로든 꽉 붙잡아라.”
한 손으로 용아귀를 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바토리의 몸을 지탱하며 동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마나 강력한 마법을 쓴 거냐 너.”
바토리가 시전한 불길은 동굴 안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불타죽은 서리곰의 시체만 스무 마리는 넘어 보였다.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란다…….”
“그 와중에도 자랑질이냐. 너도 이따 제롬하고 같이 뒤지게 처맞을 줄 알아라.”
“……살려다오.”
불길 덕에 내부는 밝았다.
달려드는 서리곰도 없었다.
아틸라는 안에서 벌어진 상황을 짐작해 봤다.
‘서리검을 노리던 펀치가 우두머리에게 들켰고, 굴 안쪽으로 도망쳤다.’
귀를 기울였다.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발소리와 포효.
틀림없다.
우두머리와, 놈의 호출을 받은 나머지 곰들이 펀치를 추격하고 있다.
그때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뒤를 돌아본 아틸라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던 서리곰 무리가 슈시아를 공격하는 광경을 포착했다.
[ 돌진(突進) ]
돌진을 시전한 아틸라의 신형이 놈들의 측면을 기습했다.
순식간에 두 마리 서리곰이 잘린 고깃덩이가 되었다.
문제는 마지막 서리곰을 공격하던 중 벌어졌다.
퍼걱!
둔탁한 소음을 울리며 도끼날이 녀석의 몸에 박혔다.
아틸라의 눈이 꿈틀댔다.
‘박혔다고?’
직전까지 용아귀는 서리곰의 몸을 깨끗이 절단했었다.
점점 강해지는 아틸라의 괴력과 용아귀의 우수한 성능 덕이긴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 야수 사냥꾼의 외침 ]
기행귀 타란툴라를 쓰러뜨리고 받은 보상.
[ 야수(野獸)를 상대로 관통력이 10% 증가합니다. ]
서리곰은 야수에 속하는 괴수다.
그래서 서리곰과의 혈투가 예정돼 있던 아틸라는 보상을 보자마자 쾌재를 불렀었다.
게다가 상승하는 능력은 공격력이 아닌 관통력.
타란툴라의 돌기처럼 단단한 껍질을 지닌 적을 상대할 때 더욱 도움 되는 능력치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무뎌진 것이다.
우어어어어!
괴성을 지르는 서리곰에게 아틸라는 재차 용아귀를 휘둘렀다.
몇 번의 도끼질 끝에 녀석이 쓰러졌다.
아틸라의 눈이 용아귀를 살폈다.
‘날이 손상됐다.’
그동안 용아귀는 상당히 혹사당했다.
수많은 인간을 베고.
다이어울프, 트롤 등의 강대한 몬스터들을 상대했으며.
크라켄과 기행귀 타란툴라를 위시한 마귀들을 수없이 쓰러뜨렸다.
그러던 중 이곳 칼날 산맥의 혹한에 더해, 서리곰의 단단한 몸뚱이를 마구 잘라댔으니.
‘날이 손상될 만도 하지.’
아니, 지금껏 날이 망가지지 않은 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다.
그 정도로 용아귀는 보통의 무기와 궤를 달리했다.
“아틸라.”
슈시아가 아틸라를 이름으로 부른 건 처음이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슈시아가 외쳤다.
“바, 바토리는 내게 맡기고 편히 싸워라!”
바토리가 중얼댔다.
“……난 이대로도 좋단다.”
“닥치고 제롬이나 깨워라 할망구.”
깨어난 제롬은 아틸라를 보자마자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자, 잘못했습니다!”
“이번엔 확실히 지켜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틸라는 매미처럼 등에 달라붙은 바토리를 떼어 냈다.
아쉬워하는 바토리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아틸라는 무휼로 용아귀의 날을 갈았다.
사각사각, 날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만간 수리가 필요하겠군.’
그러나 용아귀 정도 되는 무기는 아무나 수리할 수 없다.
인간 중에서 이 정도의 무기를 수리할 수 있는 자라면.
‘이프리트 사막.’
무뎌진 날을 얼마간 복구시킨 아틸라는 무휼을 갈무리했다.
지금 급한 건 펀치와 서리검이다.
‘약아빠진 도롱뇽 새끼는 알아서 잘 피해 다닐 테지.’
“너흰 여기 있어라.”
아틸라는 굴 안으로 달렸다.
동굴은 깊었지만 아틸라의 발은 빨랐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도 아틸라는 사물의 모습을 대략적으로나마 판별할 수 있었다.
‘감각 능력치의 상승 덕분인가.’
머지않아 곰 무리의 꽁무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펀치!”
콰드드득! 주인의 손을 떠난 용아귀가 곰 하나의 목을 자른 뒤 그다음 녀석의 등에 꽂혔다.
‘좋아!’
임시방편에 불과했지만 무휼로 도끼날을 보수한 건 성공적이었다.
돌진으로 거리를 좁힌 아틸라가 용아귀를 뽑아 세 번째 곰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끼아오오옹!
멀리서 펀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틸라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네 번째 곰에게 달렸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곰이 좌우를 덮쳤지만 하나는 무휼에, 다른 하나는 네 번째 서리곰을 자르고 도달한 용아귀에 숨통이 끊겼다.
우어어어어어!
그제서야 뒤쪽의 위협을 확인한 우두머리가 울부짖었다.
곰들이 뒤돌아 달려왔다.
아틸라의 눈에 비친 그 광경은 마치 설산 아래로 쏟아지는 눈사태처럼 보였다.
아틸라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와라! 곰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