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길잡이와 사기꾼 (3)
서리검.
서리나무 엘프의 보물이자 상징.
그것을 몰래 들고나갔다가 잃어버린 게 바로 슈시아다.
‘원래는 샤를이 찾아주는 거였지만.’
원작에서 슈시아를 만나고, 그녀의 부탁으로 서리검을 되찾아 서리나무숲으로 입장하는 건 샤를이다.
그래서 아틸라는 바토리를 서리나무숲으로 데려가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했었다.
이대로 자신이 서리나무숲에 입장한다면.
‘샤를에게 예정된 미래를 가로채는 행위가 될 테니까.’
게다가 샤를이 슈시아를 포함한 서리나무 엘프들과 맺게 될 인연은, 훗날 그가 파우스트를 말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아틸라는 샤를의 미래가 바뀌는 것보다 바토리의 존재감에 무게추를 기울였다.
원작에서는 이 시점에 제대로 된 등장조차 하지 않는 바토리.
그런 그녀가 단순한 등장을 넘어 인간이 됐고, 크라켄과의 전투에서 왼팔을 혹사한 탓에 본래 지녔던 힘의 대부분을 잃었다.
‘지금은 바토리의 치유가 더 중요하다.’
원작에서 ‘바토리 에르제베트’라는 걸출한 관조자의 존재는 파우스트에게 강력한 억제력이 된다.
바토리가 힘을 잃은 것이 앞으로의 패영전 역사에 더 큰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
그래서 아틸라는 결정을 내렸다.
‘샤를의 역할을, 여기선 내가 한다.’
원작에서 샤를은 카스피, 제롬, 피핀, 그리고 슈시아와 팀을 꾸려 서리검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이후 서리나무숲에 입장한 샤를은 서리나무의 수장을 만나며 파우스트의 존재를 알게 되고.
대륙의 거대한 위협이 될 그들을 막기 위해, 슈시아를 포함한 일행과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엘프의 종족 특성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복구시키는 데 성공하지.’
바로 그 힘이.
훗날 샤를이 파우스트를 쓰러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는 동안 샤를은 이전보다 몇 단계 강해지고.’
그런데 그 역할을 이젠 아틸라가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샤를의 무력을 강화시킬 중요 이벤트 하나가 사라지는 셈.
그러나 아틸라는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샤를은 이미 예정된 실력을 뛰어넘었다.’
원작에서는 없던 문주크와의 대결.
아틸라와의 승부.
상급 마귀 크라켄과의 혈투.
거기에 더해, 때 이른 아스투리아 정복 전쟁까지.
‘샤를이 너무 강해지는 것도 문제가 된다. 지금은 이벤트 하나를 가로채더라도 성장을 억제하는 편이 나아.’
확신은 없다.
필요에 따른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렇게 믿고, 행동하기로 했다.
지금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미지(未知)에 대한 두려움을 핑계로 선택을 유보하는 것이야말로 미련한 짓이니까.
‘어차피 지금의 샤를은 서리검을 되찾을 수 없다.’
샤를은 이제 막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녀석이 아스투리아 왕국을 집어삼키는 선에서 잠시 쉬어 갈지, 아니면 여세를 몰아 북쪽 왕국들까지 추가로 점령하려 할지는 아틸라로서도 알 수 없는 일.
따라서 샤를이 서리나무숲 이벤트를 수행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
바토리의 위태로운 현 상황과, 그 틈을 노리고 시시각각 마수를 펼칠 파우스트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느긋하게 기다릴 시간은 없다.
게다가.
‘샤를이 지금 당장 서리나무숲을 향한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서리검을 보호하고 있는 존재.
그들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
또한 그것이야말로.
서리나무 엘프들이 서리검을 여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물론 나라도 쉽진 않겠지.’
최근 꽤나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만 제롬은 아직 애송이고, 바토리는 마법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슈시아 역시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결국 실질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건 자신뿐.
게다가 놈들은 무리 지어 움직인다.
‘정공법으론 서리검을 찾을 수 없어.’
그러나 아틸라에겐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한 보험도 있었다.
[ 타란툴라의 수액 ]
두 마리의 어미 타란툴라를 쓰러뜨리며 획득한 수액과.
[ 기행귀 타란툴라의 목(1/1) ]
[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
[ 새로운 스킬이 개방됩니다. ]
시나리오 임무를 완료하고 받은 보상.
[ 야수 사냥꾼의 외침 ]
그래서 아틸라는 슈시아의 물음에.
“어떻게 서리검을 되찾을 생각이지?”
피식 웃으며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잠자코 보기나 해.”
* * *
깊은 밤.
불침번을 서던 슈시아가 바토리를 깨웠다.
바토리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러고는 슈시아를 따라 후미진 곳으로 이동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줄 알았느니라.”
“네 짓인가.”
앞뒤를 잘라낸 슈시아의 물음에 바토리는 무언으로 답했다.
슈시아가 다시 말했다.
“넌 알고 있겠지. 저 전사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녀석의 정체가 뭐지?”
“나 또한 알고 싶구나. 저 아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장난을 할 생각인가?”
슈시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 난 길잡이를 그만둘 생각도 있다.”
“그리하려무나.”
“……뭐?”
“저 아이와 달리, 난 서리나무숲에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단다.”
“날 떠볼 셈인가.”
슈시아의 동공에 보랏빛 광채가 어렸다.
그 상태로 한동안 바토리를 노려보던 슈시아가 눈빛을 되돌렸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군.”
바토리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신비로운 힘을 지닌 엘프 아이.
분명 제 어미로부터 물려받은 힘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겠지.
“저자는 내 이름과 길잡이 숲, 거기에 더해 서리검까지 알고 있었다. 그런 정보를 대체 어디서 손에 넣은 거지?”
“그건 나도 알 수가 없구나.”
“왜 저 위험한 사내와 함께하는 거냐.”
“그것이 궁금하더냐.”
“왜 그의 몸에 마력장(魔力帳)을 두른 거지?”
바토리의 눈빛이 변했다.
“호오?”
“저자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
슈시아가 이어 말했다.
“저 사내는 다크웜의 기운을 머금은 드래곤이 내뿜는 마기였노라 말했었다. 그건 분명 사실이지. 허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바토리의 눈에 진한 흥미가 담겼다.
“다시 묻겠다. 마력장으로 저자의 기운을 감춘 이유가 뭐냐.”
바토리의 입술이 기다랗게 찢어졌다.
“흐응. 눈치채고 있었더냐.”
* * *
아스투리아 왕국을 강물처럼 가로지르는 길잡이 숲.
엘프의 신 ‘에르윈’의 숨결로 만들어진 이 숲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했다.
그리고 길잡이와 함께하는 길잡이 숲 여행은 지극히 효율이 높았기에.
“저것이 칼날 산맥이다.”
일행은 생각보다 빠르게 산맥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춥구나. 야만전사야.”
은근슬쩍 몸을 기대는 바토리의 이마를 아틸라가 밀어냈다.
“……춥단 말이다 야만전사야.”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쳐다보는 바토리를 못 본척하며 아틸라는 펀치를 어깨에 올렸다.
주인의 마음을 읽은 펀치가 목도리처럼 아틸라의 목을 감쌌다.
높은 체력 수치 덕분에 바토리보단 덜할 테지만, 매서운 추위를 느끼는 건 아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강원도 최전방 부대보다 더 춥다!’
“스승님. 마법으로 불을 피우면 되지 않습…….”
눈치 없이 말하는 제롬을 바토리가 휙 노려봤다.
그 사나운 눈빛에 제롬이 움찔 몸을 떨었다.
슈시아가 말했다.
“불을 피우는 건 자살행위다. 온기를 감지한 괴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 테니까.”
“……그, 그렇군요.”
“긴장을 늦추지 마라. 칼날 산맥의 괴수들은 수해의 몬스터보다 약하지 않다.”
슈시아의 눈이 아틸라에게 돌아갔다.
“인간 전사. 네가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녔다 해도 산맥의 괴수들에겐…….”
“알았으니 1절만 해.”
아틸라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그는 슈시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대륙의 인간들이 바다를 접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
바로 칼날 산맥의 괴수들 때문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드래곤조차 넘지 못할 만큼 산맥이 높기 때문이지만.’
“어릴 적부터 늘 궁금했었지. 저 드높은 산맥 너머엔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 걸까.”
산맥을 올려보며 슈시아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칼날 산맥 너머의 세계에 대해 아는 필멸자는 없다.
심지어 패영전 세계관에서 반신이라 불리는 존재들, 이를테면 드래곤, 관조자, 정령왕 등 신기에 가까운 마력을 지닌 그들조차.
칼날 산맥 너머를 비롯한 크리엘도라 대륙 바깥의 세계는 미지의 영역이다.
머지않아 들풀로 가득했던 바닥이 흰 눈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어이. 할망구.”
듣기 싫은 호칭에 바토리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느니라.”
그녀의 손이 엷게 빛났다.
그러고는 일행 모두에게 어떤 ‘잡기술’을 시전했다.
“당분간 우리 냄새와 소리가 놈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게다.”
“좋군.”
일행은 다시 발을 움직였다.
품 안에서 콩알만 한 녹빛 조각을 꺼낸 아틸라가 입안에 넣고 삼켰다.
제롬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아틸라 님. 요즘 매일같이 뭘 그렇게 드시는 겁니까.”
리모즈 마을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제롬은 보았다.
아틸라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저 녹빛 조각을 삼키는 것을.
‘그것도 거의 정해진 시간에.’
그러나 아틸라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간간이 들리던 짐승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이윽고 완전히 사라질 때쯤.
제롬이 속삭였다.
“……갑자기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호랑이굴 근처엔 다른 동물이 접근하지 않는 법이지.”
아틸라의 말에 제롬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
“우린 서리곰의 영역에 완전히 진입한 거다.”
“저곳이다.”
슈시아가 발을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그녀의 등 너머 저만치로 커다란 동굴이 보였다.
“할망구.”
“제발 그 호칭 좀…….”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토리는 서둘러 펀치에게 잡기술을 시전했다.
스스스슥……. 펀치의 털이 흰빛으로 바뀌었다.
‘영락없는 북극곰 새끼네.’
아틸라가 펀치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겠지? 저 안에 섞여 들어가 상황을 지켜보다 꿀꺽 서리검을 삼키는 거야.”
끼아옹!
“그러고 나면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오는 거야. 할 수 있겠지?”
끼아옹!
힘차게 답한 펀치가 방방대며 달려갔다.
펀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틸라가 불현듯 품 안을 뒤졌다.
“이 미친 도롱뇽 새끼가!”
* * *
‘어이 곰탱이. 넌 앞만 보며 가는 거다. 좌우는 이몸이 알아서 살펴 줄 테니.’
펀치의 입안에서 도롱뇽이 속삭였다.
펀치와 달리 얼굴 양옆에 눈이 달린 도롱뇽은 좌우 경계를 하기 좋았다.
‘흐……. 서리곰 새끼들. 나 없는 사이 아주 열심히도 번식했네. 뭐 이리 쪽수가 많아.’
도롱뇽이 혀를 내둘렀다.
바토리의 마법이 뛰어났던 것인지, 아니면 펀치의 연기가 좋은 것인지, 두 환수는 아무런 문제 없이 굴 안을 지나고 있었다.
‘아무튼 내 말 잊지 마라 곰탱이. 서리검 삼키고 나서 안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는 거야. 알았……, 뭐라? 사기? 사기는 무슨 사기! 이게 다 네 주인에게도 득이 되는 거라니까 그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