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길잡이와 사기꾼 (1)
수많은 경외의 시선과 하나의 의구심에 아랑곳없이 아틸라는 타란툴라의 머리 꼭대기에 섰다.
용아귀를 추켜올렸다.
“그러게 대가리 너무 굴리지 말고 힘으로 밀어붙였어야지.”
아틸라의 말대로.
눈앞의 타란툴라가 오직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만 움직였다면.
아틸라는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너는. 대체. 무. 엇…….”
그러나 아틸라는 믿었다.
녀석이 새끼를 아끼는 마음과.
그 새끼를 죽인 자신에게 향해질 지독한 분노와.
그래서 더욱 자신을 고문하듯 괴롭히다 죽이려 할 것이라는, 기행귀 특유의 잔혹함과 영악함을.
근거는 있었다.
“내가 널 만들었다. 이 새끼야.”
내리쳐진 도끼가 피조물의 머리를 쪼갰다.
* * *
반으로 갈라진 타란툴라의 머리에서 진득한 수액이 흘러나왔다.
그중 일부가 보석 모양 결정이 되어 아틸라의 손에 쥐어졌다.
[ 타란툴라의 수액(x2) ]
쟝과 그의 부하들은 공동 안의 상황을 파악했다.
아틸라의 손에 죽은 거대한 거미, 머리가 으깨져 널브러진 그보다 작은 거미.
바닥에 뿌려진 열여섯 개의 거미 다리.
그리고.
더 이상 인간이라 볼 수 없는 행색으로 변한 숙주들의 시체.
그들을 내려 보던 쟝이 아틸라에게 다가와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틸라 공.”
쟝은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숙주로 변한 인간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이들 역시 아틸라 공께 감사하고 있을 겁니다.”
아틸라는 대강 고개만 끄덕였다.
바토리와 제롬이 달려와 말을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 기행귀 타란툴라의 목(1/1) ]
[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
[ 보상이 주어집니다. ]
임무를 완료하고 주어진 보상이.
[ 새로운 스킬이 개방됩니다. ]
‘오. 나이스!’
서리나무 엘프들을 만나려 할 때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스킬이었기 때문.
‘좋아좋아.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군.’
그제서야 아틸라는 바토리와 제롬을 돌아봤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바로 출발한다.”
미련 없이 떠나려는 아틸라를 쟝이 붙잡았다.
“아, 아틸라 공!”
로돌프 성주 사건에 이어 타란툴라 사건까지 말끔히 해결한 아틸라.
그런 뛰어난 실력의 전사를 탐내는 건 브뤼노 백작령의 후계자인 쟝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툴루즈의 새로운 군주가 된 샤를 아인하르트. 그의 패도를 막으려면 아틸라 공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낙관적인 생각만 하는 아스투리아 왕국 내 대부분의 지배자들과 달리.
쟝은 다가올 전쟁에 강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문만 들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샤를 아인하르트라는 사내가 결코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게다가 쟝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는 또 있었다.
‘좀비에 이어 다크웜, 그리고 타란툴라. 마귀의 등장이 이것으로 끝이라는 보장이 없다.’
아인하르트와의 전쟁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 마귀들의 출몰이라니.
마치 신들이 아스투리아 왕국의 멸망을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 쟝은 더욱더 아틸라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쟝의 청을 아틸라는 단칼에 거절했다.
“가야 할 곳이 있소.”
“그럼 잠시라도 백작성에 들르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께서 분명 후사하실 겁니다.”
후사라는 말에 아틸라는 솔깃했지만 그뿐이었다.
도롱뇽을 환수로 얻기 위해 예정에 없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젠 엘프의 숲으로 가야 한다.
“다음에 들르겠소.”
“……어쩔 수 없군요.”
쟝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면서까지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건 소인배들이나 하는 미련한 행동이었으니까.
‘지금 함께할 수 없다면 최대한 배려한다. 그래야 혹시 모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쟝에게 아틸라가 넌지시 물었다.
“다음에 들러도 그 후사라는 건 받을 수 있는 거요?”
쟝이 반색하며 외쳤다.
“무, 물론입니다! 아틸라 공께서 와 주시기만 한다면!”
언제든 백작성에 들러 달라고 재차 당부한 쟝은 가문의 인장이 찍힌 증표를 내주었다.
“앞으로의 여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소지한 동전을 탈탈 털어 포상금 명목으로 건넸다.
잔돈처럼 내준 동전은 놀랍게도 금화였다.
아틸라의 눈에 즐거움이 맺혔다.
고맙다. 금수저 새끼.
“……가진 동전이 별로 없어서. 아 그렇지! 이 녀석을 받아 주십시오, 아틸라 공!”
자신의 애마마저 넘기려는 쟝에게 아틸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화려한 말로 눈에 띄고 싶지는 않군.”
“야만전사야. 그래도 주는 건 받는 게 좋지 않겠…….”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
바토리가 흠칫하며 제 머리를 감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틸라의 심중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지금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왠지 지구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떠오르게 하는 눈이었던 것이다.
‘오래오래, 아끼면서 타고 다녀야지.’
그러나 마을 입구로 돌아온 아틸라는 일행의 말이 도망쳤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제 어쩔 셈이더냐 야만전사야.”
“…….”
기다렸다는 듯 쟝은 발 빠르고 건강한 말 세 필을 선별해 아틸라에게 선물했다.
은근히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브뤼노 백작성엔 더 좋은 말이 많습니다.”
발랑스 마을로 되돌아가며 쟝은 수시로 고개 돌려 손을 흔들었다.
아틸라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서쪽을 향했다.
그런 아틸라를 바토리가 예기 어린 눈으로 주시했다.
* * *
아틸라의 레벨업에 대해 바토리가 처음 의구심을 느낀 건 가스코뉴 공작령과 아키텐 백작령과의 전쟁, 즉 아틸라와 샤를의 첫 대결 때였다.
그날 아틸라는 그리즐리를 상대할 때보다 한층 강화된 무력을 선보였다.
이유는 야만 숲(튜토리얼)을 벗어나며 레벨업했기 때문이지만 바토리가 그 사실을 알 리는 만무했고.
다만 바토리는, 그 짧은 시간에 놀랄 만한 성취를 이룬 아틸라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수해의 트롤을 상대했을 때.’
세 마리의 트롤.
그중 두 번째 트롤을 쓰러뜨리며 아틸라는 레벨업을 했다.
물론 그전에 다섯 마리의 다이어울프를 상대하면서도 그는 레벨업을 했었고.
그래서 바토리의 예상치보다 더욱 강력해진 모습으로 수해의 몬스터들을 섬멸한 뒤, 리베르를 구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날의 아틸라는 바토리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의심 가는 정황은 있었지만.’
예를 들자면 크라켄을 상대했을 때.
그러나 그때의 바토리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지려 했을 정도로 복잡한 심중이었고, 그래서 아틸라의 주시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바토리는 단서를 잡았다.
‘타란툴라.’
기행귀 타란툴라를 상대하며 아틸라는 또 한 번의 레벨업을 했다.
바토리는 보았다.
성장하는 아틸라의 몸에서,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어떤 신묘한 기운이 발산되는 것을.
바토리는 그와 유사한 능력을 지닌 또 다른 사내를 떠올렸다.
‘샤를 아인하르트.’
바토리는 알고 있었다.
‘샤를 아인하르트의 몸 안엔 두 개의 상반된 피가 흐르고 있다.’
바토리는 생각했다.
샤를의 몸속에서 양립하는 거대한 두 힘.
‘그중 하나가.’
아틸라의 몸 안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허면 나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한단 말인가.
* * *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이 실감 났다.
말을 세운 아틸라는 눈앞의 진풍경을 바라봤다.
‘수가 상당하군.’
생각보다 많은 군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을마다 숙소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 모습.
“난 야영도 상관없단다 야만전사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할망구. 실망한 기색이 한가득이다.”
그 말에 도롱뇽이 끼어들었다.
“할망구? 아하하하하! 그야말로 네게 딱 어울리는 이름……!”
퍼억! 펀치에게 얻어맞은 도롱뇽이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용아귀를 늘어뜨리며 아틸라가 말했다.
“서커스단 같은 데 팔려가고 싶지 않으면 사람 많은 데선 입 다물고 있어라.”
도낏자루를 타고 재빠르게 올라온 도롱뇽이 아틸라의 옷 속에 숨었다.
“그런데 괜찮겠느냐. 이번 전쟁은 아무리 사자왕 샤를이라도 쉽지 않을 게다.”
바토리의 말대로.
샤를은 제법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며칠 전 아틸라는 도적떼를 만난 기병 한 명을 우연히 구해 주게 됐는데.
알고 보니 그는 브뤼노 백작령의 병사로, 수도에 전갈을 전하려는 길이었다.
‘아, 아틸라 님이 아니십니까!’
그는 전선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지리적으로 샤를의 첫 번째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브뤼노 백작령.
놀랍게도 그곳은 일말의 병력도 잃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유는.
‘마귀들이 나타났습니다.’
브뤼노 백작령과 아인하르트 백작령 사이, 즉 아틸라가 할리를 쓰러뜨렸던 ‘국경 마을’ 근방으로 마귀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귀들은 브뤼노가 아닌 아인하르트를 공격했다.
‘출몰한 마귀중 상당수가 다크웜이었다고 하니, 놈들도 보다 강한 숙주 후보 쪽을 선택한 거겠지.’
그 숙주 후보들의 대장이 얼마나 강한 줄도 모르고서.
하여간 멍청한 것들이다.
아틸라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바토리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만전사야. 다크웜들은 사자왕이 아니라 널 피해 동쪽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겠느냐.”
바토리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아무튼 결론은.
샤를은 그 정도 마귀들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거다.
‘오히려 마귀들을 섬멸하며 더욱 강해지겠지.’
브뤼노 백작의 병사들, 아니 아스투리아 왕국의 병사들은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
저 동쪽에서 몰려드는 사나운 바람을 마귀들이 잠재워 줄 거라고.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잠시 주춤했던 바람은 머지않아 더욱 매섭고 강력한 폭풍이 되어 왕국을 덮칠 테니까.
“쓸데없이 샤를 녀석 얘기하지 마라 할망구.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넌 꼭 샤를, 그 아이 말만 나오면 핏대를 세우더구나.”
“내가 언제.”
한편 제롬은 전선의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다.
‘샤를 아인하르트가 위험하다면.’
자신이 도와야 한다.
그러나 아직 스승에게 배워야 할 것들이 남아 있다.
제롬은 고민했다.
‘지금 스승님의 곁을 떠난다면, 다시 제자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롬은 아틸라와 샤를이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격돌할 것이라는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자신은 아마도.
‘스승님의 적이 되어 있겠지.’
그때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제롬의 상념을 깨웠다.
“저기요.”
봄날의 잎새처럼 싱그러운 음성.
사냥꾼 차림의 여자가 맑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숙소 찾으세요?”
* * *
잠시 후, 일행은 어느 숲속의 나무집 안에 앉아 있었다.
“마을 외곽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을 줄이야. 더구나 숙박료가 무료라니요!”
고민하던 것도 잊은 채 제롬이 떠들었다.
바토리는 목욕을 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갔고, 이번에도 아틸라는 술과 식사가 먼저였다.
사냥꾼 여자가 내다 주는 음식을 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공짜는 아닐걸.”
그 말에 여자가 싱긋 웃었다.
“어떻게 알았대?”
시커먼 날붙이가 아틸라에게 쏘아졌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틸라가 그것을 붙잡았다.
여자의 눈이 커졌다.
‘내 검을 맨손으로 잡았다고?’
의자를 박차며 일어선 아틸라가 여자의 복부에 주먹을 꽂고, 걷어찼다.
쿠당! 탕! 탕! 의자와 탁자를 깨부수며 날아간 여자가 벽에 처박혔다.
“크흐윽……! 어떻게……!”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는 여자.
그녀의 외모는 조금 전과 다소 달라져 있었다.
“왜 갑자기 공격하고 지랄이야.”
뾰족해진 귀 끝을 노려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엘프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