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봉인의 날개 (1)
시공추적의 반지는 다시 바토리의 손에 들어왔다.
얼마간 반지에 정신을 집중하던 바토리가 아틸라를 보며 미소했다.
“철혈귀검과 라시드 모두 무사한 것 같구나.”
아틸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은 좀비와 스켈레톤의 시체로 가득했다.
그것들을 헤치며 바토리는 걸었다.
할리의 잘린 몸뚱이들을 지나, 얼굴 앞에서 멈췄다.
“애송이 할리야.”
부릅뜬 눈의 할리는 대답이 없었다.
“네가 원한 삶이 이런 것이었더냐.”
쪼그려 앉아 눈을 감겼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틸라 님! 스승니이이임!”
끼아옹! 펀치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둘의 모습에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헉! 이, 이 많은 놈들을 전부 스승님께서 처리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 난 별로 한 것도 없느니라.”
“그렇다면……!”
휘둥그레진 제롬의 시선이 아틸라를 향했다.
‘사, 사람 맞아……?’
수북이 쌓인 시체의 산을 돌아보며 제롬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 더욱더 아틸라의 말을 잘 들어야겠다고.
* * *
“할리와 노이어가 소멸했다.”
“한낱 인간의 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강력하단 말인가 그녀는.”
“바토리에겐 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것이 그녀의 마력을 위력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도살자의 힘 역시 우린 모르는 것이 많다.”
“여전히 바토리의 관조는 불가능한 것인가.”
“노이어 쪽은 관조가 가능했다.”
“바토리의 반지가 무언가 역할을 한 것 같더군.”
“시공추적의 반지.”
“오랜 시간 바토리가 공들여 만들어 낸 귀물(鬼物).”
“그것이 인간의 손에 들어갔다는 건가.”
“탈취하려면 지금뿐.”
“불가하다. 우린 짧은 동안 인간 세상에 필요 이상의 개입을 했다.”
“할리가 많은 일을 저질렀지.”
“새로운 귀살자의 탄생 또한 주목해야 한다.”
“단주의 눈은 더욱 집요하게 그들을 주시하겠지.”
“당분간 추이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군.”
* * *
달칵달칵,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한때는 아스투리아 제일가는 행상인을 꿈꾸었던 남자, 알랭은 옆자리를 흘끗대며 마차를 몰고 있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팔짱을 끼고 앉은 우람한 덩치의 사내.
이 땅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외모.
‘발루아 왕국 쪽에서 온 것 같긴 한데.’
그러나 발루아에서도 흔한 얼굴 생김새는 아닐 듯했다.
‘떠돌이 용병인가.’
수 시간 전.
품질 좋은 과일을 한가득 싣고 국경 마을을 찾은 알랭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맞닥뜨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늘비한 피웅덩이.
그 위로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들.
“도, 도적 떼라도 들이닥친 건가……!”
알랭은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콰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무언가 마차 옆에 꽂혔다.
“흐에에엑! 사, 살려……!”
알랭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것을 돌아봤다.
도끼.
어마어마한 크기의 도끼였다.
세상 누구도 들어 올릴 자가 없어 본연의 역할을 영원히 수행하지 못할 것 같은,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도끼.
‘이, 이게…… 날아왔다고……?’
알랭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도끼의 주인이 저벅저벅 걸어와 그것을 뽑아낸 뒤, 옆자리에 걸터앉을 때까지.
“어디서 오셨소.”
젊은 남자의 목소리.
“바, 발랑스 마을에서 왔습니다.”
“발랑스 마을이라.”
남자는 무언갈 생각하는 듯하더니 알랭의 손에 동전 몇 개를 쥐여 주었다.
“발루아 왕국 금화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도 통용되겠지.”
“이, 이걸 왜……?”
“가시는 곳까지 태워 주었으면 하오. 보다시피 마을이 이 꼴이 나는 바람에 말이 모두 죽어 버렸거든.”
“그, 그런…….”
“이름이 뭐요.”
“아, 알랭이라 합니다.”
“아틸라요. 이쪽은 내 일행이고.”
그제서야 알랭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옆에 앉은 거구의 남자.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호리호리한 남자가 여자 한 명을 등에 업고 서 있는 모습을.
“마차 뒤엔 뭐가 있소.”
“과, 과일이 들어 있습니다.”
수레의 포장을 들춰본 아틸라가 말했다.
“얼마요.”
“그게 무슨…….”
“내가 사겠소. 전부.”
아틸라는 정말로 알랭에게 과일값을 내주었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밖으로 던져 버린 뒤 일행이 쉬어갈 자리를 마련했다.
“출발하시오.”
이후 알랭은 쉬지 않고 마차를 몰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랭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 국경 마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원래의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발랑스 사람들은 그곳을 국경 마을이라 불렀다.
“좀비 떼가 나타났소.”
“조, 좀비라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알랭이 물었다.
“그건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괴물이 아닙니까?”
“그 전설이 사실이거든.”
“그럼 좀비들은…….”
“처리했소. 발랑스 마을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요.”
‘물론 영주 놈은 가만있지 않을 테지만.’
발랑스 마을.
그리고 국경 마을.
모두 아스투리아 왕국의 브뤼노 백작령에 속한 곳이다.
그리고 국경 마을은 발루아 왕국의 아인하르트 백작령과 맞닿은 곳.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이 좀비의 습격으로 전멸했다.’
더욱이 국경 마을은 사시사철 많은 사람이 오가는 덕에 짭짤한 세금을 징수하던 도시.
브뤼노 백작이 그냥 보아 넘길 리 없다.
분명 철두철미한 조사를 통해 원인을 추적할 터.
‘귀찮아지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겠군.’
“발랑스엔 쓸 만한 말이 있소?”
“얼마 전까진 괜찮은 놈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씨가 말랐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요.”
“성주께서 마을의 말을 모두 차출하셨습니다. 농사일과 운반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말입니다.”
“차출?”
“소문으론 왕께서 전쟁을 준비 중이라 합니다.”
아틸라의 예상대로였다.
아스투리아 왕국은 샤를을 치려 한다.
그것까진 좋았지만.
‘말이 없으면 곤란한데.’
아틸라의 목적지는 대륙 곳곳에 존재하는 엘프의 영역 중, 서쪽 끝단의 칼날 산맥과 맞닿은 곳.
걸어서 간다면 끔찍하게 오래 걸릴 것이다.
게다가 저 상태의 바토리를 계속 걷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을에 도착하면 마차를 내게 팔 수 있겠소?”
“아이고 전사님, 그것만은 봐주십시오! 이게 없으면 저희 식구는 굶어 죽습니다! 게다가 성주님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셈은 두둑이 치러드리겠소.”
아틸라가 주머니를 꺼내 열었다.
안을 들여다본 알랭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세, 세 셈만 충분히 치러 주신다면야…….”
“그건 걱정 마시오.”
역시, 지구나 여기나 돈이면 다 되는구만.
아틸라는 후련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토리와 제롬은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발치에서 펀치가 쭈욱 기지개를 켰다.
* * *
늦은 밤.
발랑스 마을에 도착한 아틸라 일행을 맞이한 건 창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저, 저자입니다! 저자가 국경을 넘어온 뒤 좀비 떼가 나타났습니다!”
아틸라를 가리키며 외치는 병사.
낯익은 얼굴이다 했더니, 바토리에게 홀려 성문을 개방했던 국경 경비병이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놈이 있었군.’
“흐응……. 뭐가 이리 시끄럽느냐.”
때마침 바토리가 얼굴을 드러내자 경비가 바락바락 소리쳤다.
“저, 저 저 여잡니다! 저 요망한 마녀가 좀비를 불러낸 것이 확실합니다!”
“……뭬야? 내가 좀비를 불러내?”
“감히! 이건 스승님에 대한 모독이다!”
발끈한 제롬이 나서려는 걸 아틸라가 제지했다.
대장으로 보이는 기사 차림의 남자에게 말했다.
“좀비를 불러낸 건 우리가 아니오.”
“증명할 수 있나?”
“그럼 반대로 우리가 좀비를 불러냈다는 걸 증명해 보시오.”
“말장난을 하고 싶진 않군. 듣기로 좀비들은 툴루즈 병사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들었다. 그리고 좀비가 나타나기 사흘 전, 툴루즈 방면에서 수상쩍은 세 명이 국경을 넘었고.”
“그게 우리라는 거군.”
자기도 있다는 듯 펀치가 끼아옹! 울었지만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순순히 지시를 따른다면 재판이 열릴 때까지 신변을 보장하겠다.”
“싫은데.”
“뭐라고?”
“우린 바쁘거든.”
‘빌어먹을.’
지금 귀족의 사병을 건드릴 순 없다.
그건 저들의 주인인 브뤼노 백작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스투리아를 벗어날 때까지 끊임없는 추격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작센이나 샤를의 입김이 닿지 않는 이국의 땅.
어디에도 도움 받을 곳은 없다.
‘이대로 튀어 버릴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이따위 마차를 몰아 도주해 봐야 금세 따라잡힌다.
오히려 도주죄까지 더해져 귀찮은 일만 늘어나겠지.
“야만전사야.”
바토리가 속삭였다.
“저들의 말대로 하자꾸나.”
아틸라의 눈이 바토리의 늘어진 왼팔을 향했다.
할망구. 또 연기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시간 없어.”
“마을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묘한 기운?”
“내 말대로 하자꾸나. 그러지 않으면 더욱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게야.”
* * *
“이거 완전 죄인 취급이 아닙니까 스승님! 다짜고짜 감옥에 처넣다니요!”
“그럼 어떤 대접을 기대했더냐. 우린 좀비 떼를 불러 마을 하나를 전멸시켰다 의심받는 마녀 일행이거늘.”
“너와 제롬은 충분히 수상쩍어 보이지만 난 무슨 고생이냐.”
“수상쩍어 보이는 걸로 따진다면 아틸라 님이 제일입니다.”
“지금 벽 부수고 그리 갈까?”
“흥분 말거라 야만전사야. 제롬이 원래 좀 모자라니라.”
“모, 모자라다뇨 스승님! 녹마탑의 마법 신동이라 불리던 저, 제롬입니다!”
“흐응. 그런 녀석이 내 설명을 그리 못 알아먹는 것이더냐.”
“스승님의 마법 세계가 너무 대단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요.”
“시끄럽고. 이제 그만 가자.”
바토리와 제롬의 감옥 창살을 차례로 잡아 벌리며 아틸라가 말했다.
제롬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어, 언제 탈출하신 겁니까?”
“수상쩍어 보이는 걸론 내가 제일이라 말했을 때.”
“……담아 두고 계셨던 겁니까.”
“그리 속 좁은 아이는 아니니 걱정 말거라.”
세 사람과 펀치는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곳곳에 잠들어 쓰러진 병사들이 보였다.
“음흉한 할망구 같으니. 벌써 손을 써 두었군.”
“……부탁이니 그 할망구 소리는 그만하면 안 되겠느냐.”
“내 맘인데.”
시무룩한 표정의 그녀에게 아틸라가 말했다.
“성 안에 들어오니 느껴지더군. 네가 말한 ‘묘한 기운’이라는 게 말이야.”
“흐응. 너도 느낀 게로구나.”
“성주인가.”
“그런 것 같구나.”
지하를 벗어나자마자 잠들지 않은 보초들을 조우했다.
“네, 네놈들이 어떻게!”
“죄수들이 탈옥했다!”
“어서 대장님께……!”
아틸라는 손쉽게 그들을 제압했다.
“끄흐엑……! 헤엑……!”
“가서 네 대장이나 불러와.”
퍼억! 퍽! 콰당! 갖은 소란을 피우며 2층에 도달한 아틸라가 중앙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 있었다.
탐욕스러운 눈으로 무휼을 매만지는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가.
“으응? 어떻게 너희들이 여기까지 왔느냐?”
“걸어서.”
“뭐라?”
“내 검이나 내놔라. 빌어먹을 자식.”
귀족이라면 크게 성을 낼 법한 모욕이었지만 성주는 히죽 웃기만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말아 올린 그의 입술 끝이 두 귀를 지나 뒤통수까지 찢어졌던 것.
킬킬킬킬킬킬…….
“저, 저게 뭡니까 스승님!”
“사악한 힘에 지배당한 인간의 보잘것없는 말로.”
부드득, 주먹을 움켜쥐고 아틸라가 성주에게 다가갔다.
바토리가 속삭였다.
“살살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