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사령술사 (4)
사실 백 퍼센트 통할 거라 생각진 않았다.
그러나 충분히 기대를 걸어 볼 만했고, 이렇게 성공했다.
- 젠장! 영주 나리!
- 영주 나리가 쓰러졌어!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예상대로 카스피는 고전하고 있었다.
아무리 노이어가 파우스트에서 말단에 불과한 관조자이긴 하나, 지금의 카스피에겐 너무도 강한 상대.
하지만.
‘크라켄을 처리하며 카스피는 상당한 경험치를 획득했다.’
이제 슬슬 ‘그것’을 각성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러나 한편으로 아틸라는 카스피에게 다소 도움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러려면 조건이 하나 충족돼야 하는데.’
다행히도 조금 전 떠오른 ‘어떤’ 상태창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틸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부활한 할리를 향해 질주했다.
“아하하하! 너희들 같은 편 맞아? 바토리가 애써 축적한 살해 횟수를 초기화해 주다니!”
관조자를 구슬로 만들려면 하루에 일곱 번, 동일한 상대가, 연속해서 죽여야 한다.
그런데 바토리의 4연킬 이후 아틸라가 끼어들었고, 아틸라의 1킬로 리셋돼 버린 것.
게다가 초기화한 할리의 몸엔 마멸의 저주마저 사라져 있었다.
쇄도하는 도끼를 보며 할리가 웃었다.
“너, 둥지를 튼 마법사를 상대해 본 적이나 있어?”
물론 있지.
너보다 훨씬 강한 녀석으로.
파캉!
방패 모양으로 솟은 뼈의 군체가 용아귀를 막았다.
마멸의 칼날엔 반응조차 못한 할리였지만.
“고작 전사 따위가 날 상대하겠다고? 아하하하하!”
아틸라에겐 달랐다.
제아무리 아틸라가 전사 중에 적수를 찾기 어려운 강자라 해도.
‘바토리에 비한다면.’
직전까지 바토리에게 호되게 당한 할리로서는 한결 편한 상대임이 분명했다.
그런 줄 알았다.
“상대 못할 건 또 뭔데.”
무휼이 뼈방패를 깨부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상황에 할리는 눈을 부릅떴고, 그 상태로 목이 절단됐다.
핑그르르, 하늘을 날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뭐……, 뭐야……. 이게…….”
“까마귀 새끼 발끝에도 못 오는 게 어딜.”
그제서야 할리는 이상함을 느꼈다.
도살자가 왜 지금 이곳에 있는 거지?
‘분명 여관 앞엔 리치를 풀어두었는데…….’
리치(Lich).
죽은 마법사의 몸에 사악한 마력을 불어넣어 되살려낸 좀비의 일종으로.
마법사의 최대 약점인 허약한 육체가 완벽하게 보완된 중급 마귀종이다.
‘서, 설마 놈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온 건가?’
마법사의 시체는 브누아 방백의 성에서 구했다.
크리스또프와, 바토리에게 제거된 두 마법사.
즉, 인간 중에서 상당히 강력한 축에 속하는 마법사들이었다.
‘하지만 도살자가 이곳에 있다는 건……!’
“뭘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그래. 리치라면 죽여 버렸다.”
부활한 할리를 보며 아틸라가 웃었다.
“나머지 좀비들은 제롬과 펀치가 처리 중이고.”
“정말로 리치 셋을 모두 죽였다고……?”
“두 마리만 죽였다. 한 마린 제롬에게 과제로 남겨 뒀지.”
도살자의 몸엔 핏자국이 있었고 할리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이 생자(生者)의 것이 아닌, 사자(死者)의 피라는 것을.
‘리치를 죽일 수 있는 전사라니……!’
리치는 보통 좀비와 달리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녀석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불사의 몸을 지녔다는 것.’
트롤의 재생력과는 다르지만.
리치는 웬만한 공격으론 절대 죽일 수 없다.
강한 성력이 담긴 무기라도 있지 않는 한.
할리의 눈이 커졌다.
‘저 검!’
뼈방패를 단숨에 부숴 버린 저 검.
‘저걸로 리치를 없앤 건가!’
그제야 도살자가 리베르를 봉인한 게 납득이 갔다.
저 검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군. 과연 바토리가 흥미를 가질 만한 전사…….”
[ 돌진(突進) ]
퍼걱! 할리의 몸이 둘로 분리됐다.
“어……? 어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분명 도살자와 자신 사이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도살자가 코앞으로 근접했고, 자신의 몸은 장작처럼 쪼개졌다.
방어할 겨를도 없이.
‘마, 마법도 쓸 수 있는 거야?’
수해에서 아틸라에게 추격당하며 리베르가 느꼈던 감각.
할리는 그것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젠장. 이런 능력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사실 관조자들은 아틸라의 능력을 거의 알지 못했다.
바토리가 줄곧 다른 관조자들의 관조를 막아 왔기 때문.
‘그래. 나름 한가락 한다 이거지.’
재차 부활한 할리는 자신이 준비한 강대한 마법진을 발동시키기로 했다.
지면이 거친 진동을 시작했다.
이어 광장 바닥을 뚫고 시커먼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아하하하하! 장난은 이제 끝이다! 도살자!”
그것을 보며 아틸라는 웃었다.
계획대로다.
자신이 고대하던 최고의 밥상이 준비됐다.
‘기대해라. 카스피.’
카스피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조건.
조금 전 아틸라의 눈앞에 떠올랐던 ‘어떤’ 상태창.
그것은 바로.
[ 동료, 카스피가 함께 싸우길 원합니다. ]
파티 시스템.
[ 파티를 맺으시겠습니까? Y/N ]
바토리가 카스피에게 준 반지.
‘시공추적(時空追跡)의 반지’라는 이름을 지닌 그것은 문자 그대로 두 착용자가 서로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해 주는 아이템이다.
‘인터넷 같은 거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라 해도, 가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해 주는 장치.
마치 온라인 게임 속 파티를 맺는 것처럼.
‘그래서 심안도 쓸 수 있었고.’
[ 동료, 카스피가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
파티에 합류시킬 수도 있었으며.
[ 스킬, 전사의 외침이 활성화됩니다. ]
[ 모든 파티원의 근력과 체력이 10% 상승합니다. ]
전사의 외침 버프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경험치가 공유됐다.
물론 기여도가 없는 관계로 많은 경험치가 카스피에게 이전되진 않았지만.
‘이런 진수성찬이 차려졌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아하하하하! 도살자! 내 스켈레톤 군단의 압도적인 힘을 느껴 보거라!”
그런 아틸라의 계획도 모른 채 압도적인 경험치 군단을 소환해낸 할리.
‘티끌 모아 태산. 결국 백 원이 모여 수백, 수천, 억 단위의 금액이 되는 거다.’
유료 웹소설 한 편이 백 원이다.
지금쯤 스타 작가 김도현의 통장엔 수천에서 수억, 아니 수십억 원에 달하는 눈먼 돈이 쌓여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떠올리며 아틸라가 절규했다.
“시바아알 내 도오오오온!”
해일처럼 밀려드는 스켈레톤의 벽을 향해 용아귀를 휘둘렀다.
그의 몸에선 이제껏 없던 강렬한 분노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걸 본 바토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야만전사 너는……!’
두 손을 모아 입술을 감쌌다.
‘나의 부상이, 그렇게나 가슴 아팠던 것이더냐!’
“으아아아아!”
퍼거걱! 도끼가 휘둘릴 때마다 대여섯 마리의 해골이 한꺼번에 분쇄됐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박력 넘치는 광경!
그러나 할리는 여유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제아무리 강력한 전사라 해도 결국 인간.’
체력의 한계가 존재한다.
더구나 소환해낸 스켈레톤은 200여 마리.
인간 전사 하나가 어쩔 수 있는 물량이 아니다.
‘게다가 스켈레톤은 아무리 부숴도 계속 부활하지.’
언데드족의 특성, ‘불사(不死)’.
물론 영생(永生)과 불사 그 자체로 불리는 신과 악마라든지.
완성체에 가까운 불사자인 관조자에 비한다면 형편없이 조악한 특성이지만.
그럼에도 언데드의 종특, 불사는 인간에겐 재앙과도 같은 능력이다.
‘도살자. 넌 결국 마르지 않는 샘에서 솟아나는 스켈레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할리의 눈이 바토리를 향했다.
늘어진 왼팔을 부여잡고 선 처량한 모습.
‘멍청한 년. 도살자를 죽이고 구슬을 해방시키면 불사자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을.’
할리는 인간의 몸이 되어 갖은 수모를 겪는 바토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먼 옛날 인간이었을 때의 추억이 남아 있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없지.’
관조자.
그들 중 일부는 한때 인간이었다.
바토리도.
리베르도.
그리고 할리, 그 자신도.
‘나이가 어린 편인 나조차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 대부분이 소실됐다.’
할리가 알기로, 바토리는 고대의 인간.
‘기억의 자그만 편린조차 남아 있을 리 없지.’
바토리는 인간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할리에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리베르도 고대의 인간이었던가.’
관조자 중에서도 바토리와 리베르는 특별한 존재.
‘바토리. 너의 그 고고한 특별함은 오늘부로 주인이 바뀔 것이다.’
핏빛의 마녀,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쓰러뜨린 관조자.
그것이 자신의 예정된 미래였으니까.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스켈레톤을 소환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도살자는 지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게 말이 돼?’
할리는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그것엔 이유가 있었다.
‘이 스킬, 진짜 쓸 만하네.’
크라켄을 쓰러뜨리고 받은 보상.
[ 스킬, 학살의 보답이 발동되었습니다. ]
학살의 보답.
10명의 적을 연달아 쓰러뜨릴 때마다 자동으로 발동되는 패시브 스킬.
[ 체력을 2% 회복합니다. ]
[ 체력을 2% 회복합니다. ]
[ 체력을 2% 회복…… ]
‘2퍼센트라서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약한 놈들 몰아 잡을 땐 이만한 스킬이 없겠어.’
바로 지금처럼.
콰콰콰쾅!
질풍처럼 용아귀가 휘둘러졌다.
지칠 줄 모르는 아틸라의 활약에 할리는 일이 잘못돼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그렇다면…….’
부랴부랴 새로운 마법을 펼쳤다.
세심하게 둥지를 틀어 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물량이 통하지 않는다면 질로 승부를 봐야겠지.’
지면이 갈라지며 검고 커다란 것이 솟아났다.
스켈레톤과 비슷한 생김새.
그러나 크기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맨몸에 검 하나 쥐고 있는 다른 녀석들과 달리 제대로 된 갑옷에 검과 방패까지 착용한 모습.
아틸라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용아병(龍牙兵).’
용의 어금니로 만들어졌다는 특별한 스켈레톤.
한 마디로 스켈레톤의 왕이다.
‘그 수해의 트롤조차 일대일로는 녀석을 상대할 수 없지.’
상당히 강력한 녀석이 등장했다.
아틸라로서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
그러나 트롤과 달리 용아병에겐 커다란 약점이 하나 존재했고.
다행스럽게도.
‘지금?’
아틸라는 녀석의 약점을 파고들 순간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용아병을 향해 달렸다.
[ 돌진(突進) ]
파아앙! 아틸라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그런데 그의 돌진 대상은 용아병이 아니었다.
할리였다.
‘뭐, 뭐야! 또……!’
예상치 못한 도살자의 쇄도.
용아병을 무시하고 달려든 아틸라의 도끼질에 할리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뎅겅, 그녀의 목이 잘렸다.
“빌어……먹을……. 이것으로 네 번째…….”
“네 번째는 맞지만, 다섯 번째는 없을걸.”
아틸라는 용아귀를 갈무리했다.
“그게…… 무슨…….”
“네 부활은 이제 끝났다는 말이지.”
아틸라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할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뭐지……. 왜 수복이…….”
널브러진 할리의 몸뚱이.
그것의 절단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다.
대신.
울컥……. 울커억…….
새빨간 핏물이 쏟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 어어어……?”
200마리에 달하는 스켈레톤들이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조금 전 소환한 용아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무……슨…….”
그것이 할리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 * *
시체가 되어 쓰러진 노이어 앞에 카스피는 멍하니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불현듯 눈앞이 붉게 변하는가 싶더니 피투성이가 된 상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 노이어가 내뱉은 말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각성한…… 건가……. 저주받을…… 귀살자(鬼殺者) 놈들…….’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귀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