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사령술사 (3)
바토리의 머리 위에 떠오른 핏빛의 칼날.
그것을 보며 할리는 몸을 떨었다.
‘저…… 저것은……!’
브누아 방백의 성에서 녹마탑 마법사들을 일거에 제압했던 마력.
또한 그 옛날 전성기의 파우스트를 괴멸 직전까지 몰아넣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마력.
그것이 바토리의 손에서 펼쳐졌다.
츠컥! 츠커컥! 츠커커커커컥!
사위가 빨갛게 물들었다.
바토리를 둘러쌌던 수십 마리 좀비가 갈가리 찢겨 분해되고 있었다.
‘미, 미친……! 저게 힘을 잃은 거라고……?’
경악할 시간 따윈 없었다.
조각 난 육편이 채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목표를 바꾼 칼날이 할리를 습격했으니까.
“너도 참 여전하구나. 애송이 할리.”
츠커커컥! 할리의 몸이 열두 조각으로 분해됐다.
* * *
‘내가 있는 곳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게다.’
샤를의 성에서 바토리가 카스피에게 준 것은 붉은 보석의 반지였다.
원래는 바토리와 리베르가 하나씩 가지고 있던 것으로.
구슬 신세가 되어 버린 리베르의 것을 바토리는 챙겨 두고 있었다.
‘흑마술사 하나가 널 노릴지 모르겠구나.’
‘흑마술사?’
‘그렇단다. 녀석을 만나게 되거든 반지에 의식을 집중하며 날 부르거라.’
그렇게 말한 바토리는 한 마디를 더했다.
‘카스피. 너에겐 특별한 힘이 숨겨져 있단다.’
바토리가 말한 흑마술사를 만나는 일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현장 확인을 위해 카스피와 오토는 가장 먼저 철혈귀검 성으로 돌아왔고.
그곳엔 자신을 ‘노이어’라 소개한 시커먼 로브의 남자가 한가로이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 생각보다 빨리 왔군”
대화의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발밑으로 짐승처럼 포박된 라시드가 죽어 가는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아빠!”
카스피는 무작정 달려들었다.
손가락의 반지에 정신을 집중하며 바토리를 불렀다.
‘놈이야! 놈이 나타났다고 바토리!’
* * *
“크헉……! 크허억……! 크흑……! 젠장……!”
부활한 할리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몸을 매만졌다.
칼날이 관통할 때 느껴졌던 싸늘한 감각.
그것이 소름 끼치는 잔향이 되어 몸 안에 각인돼 있었다.
‘부활했는데도…… 어떻게 아직……!’
“그날, 너희 파우스트 애송이들이 말했었지.”
바토리가 단신으로 파우스트를 초토화시켰던 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파우스트의 수장은 이렇게 말했었다.
불사의 마법사들을 멸하는 칼날.
“마멸(魔滅)의 칼날이라고.”
할리가 다급히 소리쳤다.
“자, 잠깐만…… 바토……!”
츠커억! 할리의 얼굴이 반으로 쪼개졌다.
“끄아아아아!”
지면으로 떨어진 얼굴 반쪽과, 목 위에 붙어 있는 나머지 반쪽이 동시에 울부짖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츠커커커컥! 할리의 몸이 또다시 십여 조각으로 분해됐다.
바닥 위를 벌레처럼 버르적대며 할리가 말했다.
“제발……. 제발…… 그만해…….”
“흐응? 안 들리는구나 할리.”
절단면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할리의 몸을 수복시켰고, 어느새 할리는 두 무릎을 바닥에 붙인 채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이제 와서 말이더냐.”
“날…… 놓아줘. 그냥 돌아가게…… 해…….”
츠캉! 할리의 몸이 쪼개졌다.
분리된 몸이 갓 잡힌 물고기처럼 퍼득거렸다.
“끄으으……. 끄으으으으…….”
마멸의 칼날에 몸이 베일 때마다 할리의 몸엔 더욱 강렬한 잔향이 중첩되고 있었다.
그것이 마법 시전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이것이…… 마멸의…… 저주…….’
세 번의 부활을 마친 할리의 눈에서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제발 바토리…….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그날도 넌,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바토리가 파우스트를 관조자 세계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지 않았던 이유.
그건 바로 할리 때문이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빌었던 네가, 이렇게 날 죽이러 찾아왔구나.”
“아, 아니야……! 이건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토리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할리는 양팔로 얼굴을 가렸다.
“꺄아아악!”
세 차례다.
마멸의 칼날에 연이어 당한 공포.
필멸자였다면 한 번으로 족했을 고통이 아직 네 번이나 남았다.
‘차라리 그냥 죽었으면……!’
불사의 몸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워지는 순간.
그런데 칼날은 할리를 덮치지 않았다.
‘아직이더냐, 카스피.’
바토리의 눈에 옅은 초조가 담겼다.
지금 할리의 눈에 비친 바토리의 모습은 불사자 시절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나.
실상은 달랐다.
‘난 이제, 오래는 버티지 못할 것이야.’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힌 할리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바토리의 육체는 무너지고 있었다.
‘앞으로 많아야 두 번.’
할리를 죽일 수 있는 횟수.
그것이 끝나면.
자신의 왼팔은 완전히 망가질 것이다.
“보내 주는…… 거야……? 바토리……?”
바토리는 모험을 걸었다.
그것엔 몇 가지 조건이 뒤따랐는데.
첫 번째 조건은.
카스피가 노이어를 쓰러뜨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전의 카스피라면 불가한 일이겠지만.’
바토리는 카스피의 숨겨진 힘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각성한다면 한두 차례 노이어를 쓰러뜨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터.
‘그 힘은 결코 주인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야.’
두 번째 조건은.
자신의 몸이 왼팔의 마력을 견딜 수 있어야 했다.
‘생각보다는 잘 견뎌 주고 있구나.’
그것을 위해 바토리는 크라켄과의 전투 이후 왼팔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건 할리를 포함한 파우스트 녀석들을 방심하도록 만들었고.
‘아틸라도…… 속일 수 있었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것을 기대하며 바토리는 카스피에게 반지를 맡겼다.
‘녀석을 만나게 되거든 반지에 의식을 집중하며 날 부르거라.’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내 말 명심하거라 카스피.’
동그랗게 눈을 뜬 카스피에게 바토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놈들을, 동시에 쓰러뜨려야 한다.’
“나 간다……? 나 진짜 간다 바토리……?”
할리가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돌아 달리는 그녀의 몸을 마멸의 칼날이 습격했다.
“끄아아아……! 놔주는 게…… 아니……었어……?”
널브러진 할리의 몸이 부활을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바토리의 눈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번에도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카스피는 노이어를 쓰러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던 도박.
‘앞으로 한 번…….’
바토리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할리가 부활하기 전에 손으로 닦았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모르겠구나. 야만전사야.’
아틸라는 강하다.
실제로 그는 가스코뉴 공작성에서 리베르를 죽인 전적이 있고, 수해 외곽부에선 무려 일곱 번을 죽여 구슬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건 리베르의 본 실력이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구원자를 만난 것인지도 몰라.’
리베르가 말했었다.
그 말대로 리베르는 단 한 번도 아틸라를 죽이려 한 적이 없다.
그가 그러려고만 했다면, 아틸라는 이미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야만전사야.’
파우스트는 다르다.
녀석들에게 아틸라는 구원자가 아닌 최대의 방해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상대를 죽이려 마음먹은 관조자는 아틸라를 죽일 수 있다.
불패의 광전사 카르타고가 그렇게 생을 마감했던 것처럼.
“흐억……! 헉……! 크흑……!”
부활을 마친 할리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세 번의 죽음이 안겨 준 공포.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는 한순간의 안도.
기대를 짓밟은 마지막 고통.
‘바토리……, 네 이년……!’
할리는 이를 갈았다.
복수에 불타는 눈빛이 상대에게 쏘아졌다.
그리고.
할리는 발견했다.
‘……핏자국?’
바토리의 턱 아래 희미한 자국이 있었다.
‘좀비의 피는 아니야. 분명 보호막으로 보호했었다.’
할리의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있다!’
바토리가 흘린 것으로 보이는 바닥의 핏물.
다급히 발로 문질러 지우려 한 흔적까지도.
‘그렇다면 설마……!’
공포가 한 꺼풀 벗겨지자 상황이 또렷하게 인지됐다.
위풍당당하게만 보였던 바토리의 몸.
그것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 그랬어! 바토리년……! 역시 힘을 잃은 거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명하게 빛나던 왼팔의 마법진이 흐릿해져 있었다.
‘그래! 그래서 멈칫하고 있는 거야! 이제 저년에겐 날 세 번 더 죽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 거야!’
할리의 입가가 기다랗게 찢어졌다.
반대로 바토리의 얼굴빛은 어둡게 변했다.
‘결국 눈치를 챈 것이더냐.’
할리가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한 번, 혹은 두 번.
그것만 견디면 된다.
그 고통만 견디고 나면.
‘저 핏빛의 마녀,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릴 수 있다.
짜릿한 흥분이 할리의 몸을 감쌌다.
바토리를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왜 가만히 있어? 바토리.”
대답은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승리감을 만끽하며 할리가 이어 말했다.
“왜? 또 죽여 보시지.”
“그렇게 해 주지.”
퍼걱! 할리의 몸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런데 그건 바토리가 한 것이 아니었다.
“……!”
휘둥그렇게 눈을 뜬 바토리의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럽 좀 다니셨나 봐? 할망구.”
“네가 여길…… 어떻게……?”
“술에 약 타면 모를 줄 알았냐? 대한민국에서 그건 엄청난 범죄라고.”
“그게 무슨…….”
“분명히 말하는데.”
서늘해진 아틸라의 눈이 바토리를 향했다.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면, 그땐 정말 가만있지 않을 거다.”
아틸라는 바토리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었다.
축제의 밤을 함께 보냈던 그날, 심안을 통해.
“그래. 파우스트 놈들이 작정하면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건 인정하지.”
시커먼 연기가 되어 부활하는 할리를 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내가 할리를 죽이면 놈들의 타깃이 될 거라는 것도.”
“야만전사야…….”
“상관없어.”
아틸라가 바토리의 손을 잡았다.
바토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왜, 왜, 왜 넌 매번 이리도 갑자기……!”
아틸라는 바토리의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냈다.
그러고는 왼손에 쥐었다.
“잠깐 빌린다.”
바토리가 카스피에게 반지를 건네줬던 날.
아틸라는 은밀히 카스피를 불렀다.
‘왜 아틸라?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아마 바토리는, 네가 흑마술사를 만나게 될 거라 말했겠지.’
‘흐익! 그, 그걸 어떻게!’
‘그리고 놈을 만나거든 반지를 통해 자신을 부르라는 말도 했을 거다.’
‘어떻게 그걸 알아? 바토리가 말해 준 거야?’
‘바토리가 시킨 대로 해.’
‘무, 물론 그럴 거긴 하지만.’
‘그러고 나서.’
아틸라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게 빛났다.
‘날 생각하도록 해. 아주 절실하게.’
‘뭐, 뭐뭐뭐 뭐야. 지금 나한테 고백하는…….’
‘잊지 마. 날 생각하는 거야. 네 상대가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부활하는 할리를 바라보며, 아틸라는 손안의 반지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권능을 시전했다.
‘심안.’
그러자 떠올랐다.
- 아틸라 아틸라 아틸라 아틸라아아아!
- 이,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아틸라아아!
- 근데 어떡하지! 저 녀석 너무 강하다고!
카스피의 심언(心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