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44화 (44/425)

044. 사령술사 (2)

“혹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더냐.”

대답 없는 아틸라를 보며 바토리가 끄응 기지개를 켰다.

“꿈자리가 뒤숭숭한 것이 영 몸이 찌뿌둥하구나.”

“늙어서 그런 거야.”

“……내 아니라 말하지 않았느냐.”

바토리가 입술을 비죽이며 아틸라를 흘겨봤다.

그 모습을 아틸라는 못 본 척했다.

뭐야. 요즘 저게 왜 자꾸 귀여운 척을 하는 거지.

제롬이 끼어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지난밤은 정말 부엉이 새끼 한 마리 울지 않는 깊고 고요한 밤이었지요.”

아틸라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제롬의 입장에선 그럴 만도 했다.

제롬은 매일 밤 시체처럼 잤다.

‘육체노동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놈이 이런 강행군을 이어 가고 있으니.’

낮에는 말을 타고 계속 이동했다.

시간이 날 때면 어김없이 바토리에게 마법 수업을 받았고.

여행에 필요한 온갖 잡다한 일 역시 제롬의 몫이었다.

“흐응. 그렇단 말이더냐.”

그러나 바토리는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믿는 눈치였고.

그 모습에 아틸라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제자다 이거로군.’

지난밤 야영지를 습격했던 건 좀비 떼였다.

복장으로 판단하건대 죽은 툴루즈 병사들이 분명했다.

‘사자(死者)들은 이유 없이 좀비가 되지 않지.’

그들의 몸에 사악한 마력을 불어넣어 소생시킨 자가 있다.

아틸라는 놈의 정체를 예상할 수 있었다.

‘사령술사 할리.’

분명 라시드의 실종도 녀석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결국 다른 관조자들이 냄새를 맡았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관조자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

인간이 되었어도 다른 관조자들이 자신을 관조하는 것쯤은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었을 거다.

왼팔이 아작나기 전까지는.

‘아무튼 귀찮게 됐군.’

요정들은 ‘관조자’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통칭하지만.

사실 관조자들 사이엔 몇 개의 파벌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난밤 좀비를 파견한 놈들이라면.

‘파우스트.’

고위악마(高位惡魔), 메피스토펠레스를 추종하는 흑마술사 집단.

아틸라는 바토리의 옆얼굴을 흘끗 바라봤다.

‘정말 눈치채지 못한 건가.’

지난밤, 좀비들은 제법 먼 곳에서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상 습격을 당한 건 좀비들 쪽.

‘진짜라면 상태가 아주 많이 안 좋은 건데.’

세 마리 말은 북서 방향으로 쉼 없이 달렸다.

이대로 며칠만 더 가면 아스투리아 국경.

지금의 아스투리아는 전(前) 툴루즈 백작령에서 넘어오는 여행객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 * *

피떡이 된 좀비들의 사체를 내려 보며 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야……?”

좀비 같은 하급 언데드로 어쩔 수 있을 거라 생각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머리를 죄다 터뜨려놔선 기억을 읽어 낼 수가 없잖아.”

지난 며칠 동안 할리는 지속적으로 아틸라 일행에게 좀비를 보냈다.

그러나 정찰이라기엔 상당한 거리를 두어 좀비들을 운용했는데.

바토리의 무서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할리였기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결과는.

‘바토리의 감지력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일행에서 좀비의 기척을 느낀 건 오직 도살자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렇듯 한 마리의 예외도 없이 머리통을 으깨 놨다는 것은.’

자신의 의도가 상대에게 파악되고 있다는 의미.

‘설마 바토리가 눈치를 챈 건가. 그렇다면 왜…….’

좀비의 사체에서 마법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그 핏빛의 마녀, 바토리.

할리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 * *

“발루아 국경을 넘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스승님.”

제롬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했다.

지난 삶의 대부분을 녹마탑 안에서 보낸 제롬으로서는 충분히 감격스러울 만한 일.

그러나 바토리는 그런 것엔 관심이 없었다.

“야만전사야.”

“왜.”

“조금 전 나의 미인계가 어떠하였느냐.”

“…….”

아틸라의 예상대로 국경의 경비는 삼엄했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말을 되돌리기 일쑤였다.

그때 바토리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경비병에게 다가갔던 것.

“미인계는 개뿔. 할망구의 눈웃음 따위에 누가 넘어가겠냐.”

“……할망구라니. 차라리 관음쟁이라 불러 주는 편이 억만 배는 낫겠구나.”

바토리가 은근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대답을 회피하지 말거라 야만전사야. 어떠하였느냐. 경비병의 느슨하게 풀어진 얼굴에 혹 질투감이라도 피어나진 않았더냐.”

정말 이 할망구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만든 바토리라는 등장인물은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저도 보았습니다 스승님. 경비병 녀석, 분명 오늘 밤잠을 설칠 것입니다. 스승님의 미모가 머릿속에 콕 찍어 박혀…….”

“조용히 좀 하거라. 내 너에게 묻지 않았거늘.”

“네넵.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롬 역시 저런 바보 캐릭터가 아니었다.

위대하고 지고한 대마법사 제롬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여관이나 찾자. 오늘은 걍 질펀하게 술이나 마시고 싶군.”

아틸라는 말고삐를 당겼다.

그런 아틸라에게 말머리를 붙이며 바토리가 말했다.

“무정한 사내 같으니. 내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느니라.”

“그거 잘했군.”

“활기찬 마을이로구나. 분명 축제라도 벌어진 게야.”

바토리의 말대로.

국경에 인접한 이 마을은 축제가 한창이었다.

“뭐, 활기차긴 하군.”

패영전 원작자인 김도현.

그리고 검은늑대 부족의 야만인 아틸라로서도.

이런 이국의 활기는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그러하구나. 역시 네가 보기에도 그러한 것이로구나.”

소녀처럼 맑게 웃는 바토리의 얼굴.

왼팔을 다친 이후의 그녀는 전보다 활기차 보였다.

‘왜 이래. 대체.’

수해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바토리.

생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기에 아틸라는 약간의 반가움마저 느꼈었다.

이후 인간이 되어 일행에 합류한 바토리는 다소 풀 죽은 모습이었고.

그런데 지금은.

‘노망이라도 난 건가.’

아틸라는 바토리에게 심안을 시전해 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어쨌든 오늘은 따뜻한 물로 씻은 뒤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 * *

그런 아틸라의 계획을 바토리가 방해했다.

“야만전사야. 밖은 지금 심야 축제가 한창이더구나.”

“고작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무슨 술을 그리 마시는 게냐.”

“제롬은 이만 재우고 우리끼리 축제 구경이라도 가는 게 어떻겠느냐.”

제롬은 이미 탁자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알코올 분해 능력이 쓰레기 급인 녀석의 뒤편엔 겁에 질린 펀치가 웅크리고 있었고.

‘아직 바토리가 무서운가 보네.’

그런 펀치의 마음도 모르는지 바토리가 헤실댔다.

“흐응. 펀치야. 어서 네 주인을 졸라 보거라. 아니면 너도 함께 갈 테냐?”

“뭐가 그렇게 신이 났냐.”

“신이 나? 내가 말이더냐.”

“너 말고 누가 있냐 여기.”

“그렇구나. 신이 나 보이는 게로구나.”

바토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지만 잠시였다.

“내일 바로 출발할 생각이더냐.”

“글쎄. 어쩔까.”

“며칠만 더 머무르면 안 되겠느냐. 인간들의 축제란 걸 꼭 한 번 즐겨 보고 싶구나.”

술병을 쥔 아틸라의 손이 멈칫했다.

먼 옛날 궁중 마법사 시절의 바토리가 화려한 축제 위를 거니는 모습을 떠올렸다.

‘심안.’

자신을 응시하는 바토리의 시선을 보며 아틸라는 심안이 통하리라 예감했고.

예감은 들어맞았다.

의자를 밀치며 아틸라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는 게냐?”

“축제 구경하러.”

“뭐라?”

“안 오면 혼자 간다.”

아틸라는 문을 열고 여관 밖으로 나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바토리가 서둘러 뒤를 따랐다.

“저, 정말이더냐!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가, 같이 가자꾸나 야만전사야!”

눈부신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 * *

사흘 뒤.

태양의 머리끝도 아른대지 않는 이른 새벽.

축제가 파한 거리 위를 바토리가 걷고 있었다.

쉼 없이 움직이던 그녀의 발이 광장 한가운데서 멈췄다.

“내 욕심이 화를 부른 게로구나.”

씁쓸히 웃었다.

저만치 보이는 검은 그림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내 옷깃 한 자락만 봐도 두려움에 떨던 어린 것이, 어인 일로 여기까지 온 것이더냐.”

경직된 표정이던 할리의 얼굴 근육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호오……?”

할리의 입술이 길게 늘어났다.

이내 귀밑까지 찢어졌다.

“이거…… 정말로 몰랐던 모양이잖아?”

깔깔대며 웃었다.

“아하하하하! 그 천하의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고작 하급 언데드에 불과한 좀비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할리의 웃음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네 옷깃 한 자락만 봐도 두려움에 떨던 어린 것이라. 그래.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지.”

“카스피의 아비를 해치운 것도 네 짓이더냐.”

“그럴 리가. 너에게 리베르 파테르가 있듯, 내게도 ‘그’가 있는걸.”

할리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아니지 아니지. 이제는 리베르 파테르가 ‘있었듯’ 이라 표현해야 하나?”

대꾸 없는 바토리의 몸을 찬찬히 훑는다.

“가여운 구슬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야.”

시체처럼 늘어진 왼팔.

분을 참지 못한 듯 움켜쥔 오른 주먹.

이전까지 알던 바토리와 사뭇 달라진 그 모습에 할리는 아찔한 만족감을 느꼈다.

“걱정 마 바토리. 늙은 살수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다행이로구나. 카스피.

“날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애송이 할리.”

할리의 얼굴이 구겨졌다.

“애송이 할리? 아…… 하하하하……? 지금 네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광장 한가운데 마주 선 두 여인.

어느새 나타난 수십 마리 좀비가 그런 둘을 에워싸고 있었다.

할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도살자는 어디 두고 혼자 왔을까?”

“글쎄. 어디 있을까.”

바토리는 축제 거리에서 구한 몇 가지 재료에 마력을 불어넣어 어떤 비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밤 아틸라의 술잔에 몰래 집어넣었다.

아틸라는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할리를 쓰러뜨릴 때까지.

혹은.

“뭐야? 이거 뭐야? 인간의 삶을 살더니 인간의 나약한 감정이라도 배운 거야? 너 정말 바토리 에르제베트 맞아? 전성기의 ‘파우스트’를 단신으로 괴멸 직전까지 몰아넣은 그 핏빛의 마녀가 맞는 거냐고! 아하하! 아하하하하하!”

바토리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카스피는 어쩔 셈이더냐.”

“카스피? 아아, 그 살수 계집. 물론 해치울 생각이지.”

할리가 키득대며 말했다.

“처음엔 네놈들의 전력을 흩트릴 생각뿐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계집. 보통 것이 아니었더군.”

결국, 눈치채고 만 것인가.

“그 계집이 이대로 성장하면 우리 계획에 방해가 될 것 같거든. 그러니 어쩌겠어? 처리해야지.”

“카스피는 내버려 두거라.”

“이미 늦었는걸?”

할리의 눈꼬리가 비웃듯 추켜올려졌다.

“지금쯤, ‘노이어’가 그년의 목젖을 잡아 뜯고 있을 테니까.”

“지금이라 했느냐.”

“그래. 너도 알다시피 노이어와 난 동시에 움직이는 걸 좋아하거든.”

바토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고맙구나.”

“뭐?”

“애송이 할리야.”

바토리의 낯빛이 서늘해졌다.

그녀의 얼굴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내가, 네깟 것이 따라붙은 걸 몰랐으리라 생각했더냐.”

“뭐라고?”

“또한 정말로 카스피가, 노이어 따위 잡스러운 것에게 당할 거라 생각했더냐.”

늘어진 바토리의 왼팔에서 열기가 피어났다.

할리의 눈이 부릅떠졌다.

“너……! 그 왼팔은……! 어떻게……!”

화르륵! 소매가 타오르며 붉은 문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토리의 왼팔이 할리의 얼굴을 겨눴다.

“네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그녀의 입술 끝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렸다.

“지금 보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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