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금기 (2)
어둠을 향해 불렀다.
“사바흐.”
“……내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도살자.”
흠칫 놀란 사바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알긴.
그냥 불렀는데 얻어걸린 거야.
“너 왜 말이 다르냐. 사바흐.”
“무슨 말이지?”
“단주의 눈도 없는데 왜 참전 안 하냐고.”
사바흐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카스피에겐 더 이상 내 도움이 필요 없는 것 같더군.”
“그럴 리가.”
“겸손할 것 없다. 네가 그 아이의 스승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아아. 파티 시스템.
‘하긴. 녀석이 보기에 카스피는 점점 강해지고 있을 테니.’
그간 아틸라가 경험하고 추론한 바로는, 파티에 속한 동료들은 자신처럼 이 세계에서 ‘플레이어’로 인식되는 듯했다.
‘버프를 공유하고, 경험치를 나눠먹고, 레벨업까지.’
물론 파티가 해제되면 원래의 ‘등장인물’로 돌아간다.
‘파티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은.’
첫째, 전투 상황에 돌입해야 하고.
둘째, 그들이 자신과 함께 싸우길 원해야 하며.
셋째, 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
넷째, 이건 확실하진 않지만.
‘나 자신, 혹은 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스템이 선별한 자.’
참고로 샤를과는 파티가 맺어지지 않았다.
피핀 역시 마찬가지.
‘둘째나 넷째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거겠지.’
어쩌면 확인되지 않은 다섯 번째가 있을 지도 모르고.
“후후. 강해지는 카스피를 보고 있자니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
“심부름 좀 해라 사바흐.”
“뭣이?”
“철혈귀검 성에 다녀와.”
사바흐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네놈은 날 뭘로 보는 것인가. 나는 대륙 최고의 암살교단 하싸씬의 마스터! 사슬낫의 사바……!”
“아님 카스피 데리고 떠나든가.”
“언제까지 다녀오면 되겠나. 철혈귀검 성엔.”
“최대한 빨리.”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급히 운반해 올 게 있거든.”
* * *
“오늘도 난 짐짝 신세인 게냐. 야만전사야.”
“오토. 잘 지켜라.”
“……알겠수.”
호기롭게 전쟁을 시작한 툴루즈 백작.
그러나 지금의 백작령은 가스코뉴 군에 함락될 날이 머지않아 보였다.
“오, 온다!”
“사자왕 샤를 아인하르트!”
“이, 이쪽엔 도살자가!”
“트롤 학살자다!”
아틸라와 샤를의 조합은 파죽지세로 툴루즈 백작군을 섬멸했다.
“도살자. 난 오늘만 벌써 서른 명에 달하는 적의 목을 베었다.”
“그래? 난 서른다섯 명 짼데.”
“……제대로 센 것이 맞는가. 혹 야만인의 셈법은 우리와 다르다던가.”
“헛소리하지 말고. 난 서른여섯 번째 베러 간다.”
그리고.
둘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을 뿐 상당한 실력을 뽐내는 중인 카스피와 피핀.
“오 꼬맹이. 제법이잖아?”
“꼬맹이라고 하지 마라. 살쾡이같이 생긴 주제에.”
“왜 다들 나더러 살쾡이라는 거야!”
금사자와 전 오동나무의 용병들.
“가자! 금사자의 실력을 아낌없이 보여 주자!”
“오동나무도 지지 않는다!”
“어라? 대장이 안 보이는데?”
“그새 까먹었수? 저기 뒤꽁무니에서 공주님 지키는 기사 흉내 내고 있잖수.”
이들은 가스코뉴 군세 속에서 눈부신 활약을 이어 갔다.
“보고만 있으려니 따분하구나. 몰래 난입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 철혈귀검아.”
“아틸라 님이 여기 있으라 했단 말이오. 누구 맞아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러우?”
브누아 성에서의 활약 이후, 바토리가 나서는 일은 없었다.
‘내 후유증을 염려하는 것이더냐. 야만전사야.’
물론 그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녹마탑의 세 마법사를 쓰러뜨린 뒤 마법사의 등장이 없던 탓도 컸다.
설령 마법사가 나타난다 해도 아틸라는 바토리를 써먹을 생각이 없었다.
‘나와 샤를이 격파할 수 있으니까.’
자신의 스킬과 무휼, 그리고 샤를의 신력이라면 웬만한 마법사는 충분히 제압 가능하다.
녹마탑의 탑주 파브리스라도 등장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녀석은 지금 연구로 바쁜 상태.’
그러나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결국 파브리스가 나설 것이다.
아틸라가 노리는 바도 그것이었다.
‘그때까지 바토리는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다.’
파브리스가 진행 중인 대규모 연구.
그것이 가져올 파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
‘녹마탑의 욕심이 낳은 대참사.’
그것은 바로.
마귀의 우두머리 중 하나를 소환하는 의식이다.
‘녹마탑 마법사들은 항상 엘프에 버금가는 힘을 원했지.’
파브리스는 우두머리를 소환해 제어하면 더욱 강한 힘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추측했다.
지금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마귀가 지닌 힘의 일부에 불과했으니까.
‘결국 소환은 성공하지. 그러나.’
우두머리 제어에 실패한다.
그렇게 툴루즈 백작령은 우두머리가 불러들인 마귀들로 잠식될 위기에 처하고.
‘그것을 막아 내는 것이.’
패영전의 주인공, 샤를.
아틸라가 샤를을 이곳으로 인도한 이유 중 하나다.
‘샤를이 사건 해결에 발을 담그는 편이 비틀린 역사를 바로잡기 좋을 테니까.’
아무튼 예정된 참사를 막으려면 바토리의 힘이 필요하다.
이번 사건 해결의 가장 적임자 또한 바토리고.
또한 아틸라에겐 하나의 계획이 더 있었다.
‘다소 이르긴 하지만.’
패영전의 영웅 중 한 명이자, 훗날 샤를의 동료가 되는 인물.
녀석을 이번 기회에 샤를의 동료로 편입시킬 생각이다.
아틸라는 카스피의 오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카스피도 어서 분양해야 하는데.’
끊임없이 피핀과 말싸움 중인 카스피를 보며 아틸라는 만족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원작에 쓰인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니까.
* * *
“남은 건 툴루즈 백작성뿐이로군.”
샤를이 말했다.
아틸라는 백작성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탑을 응시하고 있었다.
‘금기의 녹색 마탑.’
“언제 공격할 생각인가.”
“철혈귀검 성에 보낸 전령이 돌아오는 즉시.”
“백작성이 함락되면 우리의 계약도 끝이다. 제시했던 조건은 기억하고 있겠지, 도살자.”
“물론.”
샤를이 제시한 조건은 아주 황당한 것이었다.
‘이런 미친놈.’
아틸라는 조건을 수락하는 대신 맞조건을 내걸었다.
“뭐? 툴루즈를 점령한 뒤, 그 절반을 내게 주겠다고?”
샤를도 그때만은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옆에 있던 피핀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래. 대신에 급료는 없다.”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는군. 작센 가스코뉴가 그걸 허할 것 같은가.”
“난 설득할 자신이 있는데.”
‘작센 녀석. 배가 아프긴 하겠지.’
그러나 작센은 결국 허가했다.
즉 이번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샤를은 툴루즈의 지배자가 된다.
‘원작에선 아키텐이었지만.’
원작에서의 샤를은 아키텐 백작의 봉신이 된 뒤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다.
사실 아키텐 백작이 욕심을 부리다 자멸한 것에 가까웠지만.
그런데.
‘지금의 샤를은 아키텐의 봉신 제의를 거절했다.’
지난 전쟁에서 자신을 만나고, 패배했던 것이 무언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리라.
그러나 샤를은 어서 빨리 지배자가 돼야 한다.
‘얼른 패왕의 길을 걸으라고 자식아! 요정섬도 좀 찾고!’
그래서 아틸라가 생각한 것이 아키텐 대신 툴루즈였다.
절반짜리 툴루즈.
샤를이 거기서 만족할 리 없으니까.
‘백작이 된 녀석은 스스로 다짐했던 패왕의 길을 떠올릴 테지.’
결국 샤를은 국경을 마주한 아스투리아 왕국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아스투리아 역시 툴루즈에 지원했던 군자금 회수를 위해 샤를을 공격할 테고.
순서는 다소 바뀌었지만 원작의 흐름대로 샤를과 아스투리아 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것.
‘불패의 패왕, 샤를 아인하르트.’
그의 대국적 패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 * *
툴루즈 백작성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린 지 이틀째 되는 날 밤.
사바흐가 돌아왔다.
“단주의 눈을 속이느라 조금 지체됐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바흐는 아틸라의 예상보다 빠르게 임무를 마쳤다.
“응. 그럼 가 봐.”
“고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에게 따뜻한 식사 한 끼 대접하지 않는 것인가.”
뭔 소리야 이건 또.
“뭐가 먹고 싶은데.”
“귀염둥이 카스피와 함께하는 식사라면 뭐든지.”
“후…….”
남몰래 카스피를 지켜보기만 했던 제자바보 사바흐.
그는 카스피와 대화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알았다. 그 대신.”
“뭐, 뭐냐! 또 뭘 시킬 생각인가!”
“카스피에게 ‘소멸’ 좀 전수시켜 놔라.”
하싸씬의 절기 ‘소멸(消滅)’
카스피에게도 슬슬 필요한 시점이다.
“음? 아직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그래. 그리고 혹시.”
“혹시?”
“역용술의 대가를 알고 있나.”
“역용술이라면 단주를 따라올 자가 없지.”
“단주 말고.”
원작에서 카스피에게 역용술을 전수한 이가 바로 단주다.
하지만 이제 그건 물 건너갔고.
‘카스피가 역용술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아틸라는 카스피를 분양하기 전에 원작 이상의 초특급 살수로 키워 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최소한 원작에서 사용할 수 있던 술법들은 모조리 익혀 놔야 한다.
“흠흠 도살자. 나 역시도 어느 정도의 역용술은…….”
“넌 됐고.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네놈이 내 역용술을 본 적이나 있는가!”
“카스피 만나기 싫냐.”
“역용술의 대가라. 한번 알아보겠다.”
그렇게 사바흐는 카스피와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고, 이후 소멸을 전수했다.
한편 아틸라는.
“어이. 일어나 관음쟁이.”
“흐응……. 깨우러 올 줄 알았느니라.”
“알고 있다는 녀석이 침까지 흘리며 자고 있냐.”
“침이라니. 내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자면서 침을 흘린 일이 없느니라.”
도도하고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추켜올리는 바토리.
그녀의 입술 아래를 아틸라가 손바닥으로 슥 닦아 냈다.
“야, 야만전사야……! 이리도 갑자기……!”
“헛소리 주절대지 말고 일어나.”
아틸라는 손에 묻은 침을 대충 옷에 문질러 닦은 뒤 새빨개진 얼굴의 바토리를 천막 밖으로 끌고 나왔다.
으슥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흐응. 이런 야밤에 다 큰 처녀를 어디로 데려갈 셈이더냐.”
대답 없는 아틸라를 바토리는 샐쭉 흘겨보았다.
“야만전사야.”
“왜.”
“넌 나에 대해 어찌 그리 많은 걸 알고 있는 것이더냐.”
내가 널 만들었으니까.
“대답해 주면 안 되겠느냐.”
아틸라는 걸음을 멈추고 바토리를 돌아봤다.
대결하듯 아틸라를 마주 보던 그녀의 시선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내가 졌느니라.”
뭐야. 혼자 눈싸움이라도 한 건가.
“네 심연처럼 검은 눈을 마주하고 있자면 난 마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발가벗겨진 기분이 드는구나.”
뭐야 시발. 야밤에 다 큰 처녀가 뭔 헛소릴 지껄이고 있냐.
바토리를 내버려 두고 아틸라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르며 바토리가 말했다.
“야만전사야.”
“왜 또.”
“모처럼 둘뿐이니 묻고 싶은 게 있구나.”
“묻지 마.”
그럼에도 바토리는 물었다.
“네 정체는 무엇이더냐.”
“멋쟁이 야만전사.”
“네 신력의 주인은 누구이더냐.”
“시스템.”
“……시스템?”
무언갈 골몰히 떠올리던 바토리가 말했다.
“그런 이름의 신은 들어본 적이 없구나. 혹 다른 세계의 신이더냐.”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대던 바토리가 불현듯 손뼉을 쳤다.
“그랬구나. 그런 것이었구나! 넌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신의 가호를 받고 있었던 게야!”
소녀처럼 깔깔대며 말을 쏟아 냈다.
“그래. 이제야 설명이 되는구나! 그래서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을 찾았던 게야! 내 말이 실로 맞지 않느냐 야만전사야!”
“아닌데.”
“뭬야?”
바토리는 허망한 얼굴로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런 그녀의 손목을 아틸라가 덥석 움켜쥐었다.
“흐응……!”
기묘한 신음을 잇새로 흘리는 바토리를 끌고 아틸라는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이런 야밤에, 이런 장소에서, 이런 방식으로 둘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들풀이 사각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기분 좋은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총총한 별의 장막이 눈발처럼 하늘을 수놓았다.
그렇게 말없이 두 사람은 숲의 속삭임과, 바람의 노랫말과, 별무리의 바다를 건넜다.
침묵을 깬 건 바토리였다.
“녀석의 냄새가 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