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금기 (1)
핏빛 칼날과 보호막이 거두어졌다.
그녀의 왼팔을 덮었던 붉은 문양도 자취를 감췄다.
사위는 여전히 정적으로 가득했다.
그것에 상관없이 물끄러미 성문 너머를 응시하던 바토리가 입술을 열었다.
“저쪽도 마무리가 된 것 같구나.”
그녀의 눈이 오토와 카스피에게 돌아갔다.
“마중하러 가자꾸나. 카스피, 철혈귀검아.”
둘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왔다.
그렇게 세 사람은 햇빛 쏟아지는 성문의 틈새를 나섰고, 프레데릭과 병사들도 홀린 듯이 뒤를 따랐다.
쿠웅.
성 밖을 울리는 무거운 소음.
프레데릭의 눈이 커졌다.
“저, 저것은……!”
성벽 위로 솟아올랐던 거대한 나무.
파비앵과 크리스또프를 인도해 난공불락의 성문을 함락시키는 데 일조했던 그것이.
장작처럼 토막 난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저게 뭐야!”
“적들이……!”
수십 명에 달하는 툴루즈 병사들이 쓰러진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시체의 산 가운데 홀로 선 우람한 덩치의 사내.
“야만전사야.”
그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때맞춰 끝낸 모양이군. 관음쟁이.”
아틸라는 파티 메시지를 통해 바토리가 근처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2급 목마종과의 전투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했다.
[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
[ 보상이 주어집니다. ]
꽤나 쓸 만한 보상도 받았고.
“……보는 시선이 이렇게나 많은데, 굳이 그런 호칭으로 불러야겠느냐.”
“바라는 게 많군.”
끼아옹! 펀치가 달려가 아틸라의 어깨에 올랐다.
아틸라는 부드럽게 미소하며 펀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머진 알아서 처리해라.”
바토리의 어깨를 스치며 아틸라가 말했다.
그제야 병사들은 볼 수 있었다.
“투, 툴루즈 녀석들이……!”
성문이 격파된 것을 확인한 툴루즈의 후열 부대가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전위를 맡은 세 마법사와 파비앵이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바토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가히 불길 속으로 날아드는 부나방 떼로구나.”
전투태세를 갖추던 브누아 병사들은 바토리의 등장에 뒤로 물러섰다.
총사령관 프레데릭 역시 마찬가지.
그들 모두는 바토리의 가공할 마법을 코앞에서 목도한 자들이었다.
“남김없이 처리하면 되겠느냐. 야만전사야.”
아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토리가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의 영창은 보통의 마법사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저거 뭐라는 거요?”
“나도 모르지 영주 나리. 외국어 아닐까?”
바토리의 팔에 붉은 광채가 어렸다.
왼팔의 문신은 발현되지 않았다.
주문 없이 시전 되던 성 안에서의 신기와는 결이 다른 마법.
그것이 그녀의 손에서 펼쳐졌다.
“아 돌레비츠 쿠엣 에바니테!”
허공에 투명한 균열이 생성됐다.
그 안에서 뻗어 나왔다.
화르륵! 화륵! 화르르르르륵!
인간의 머리통만 한 불의 구체들.
그것이 툴루즈의 병사들을 향해 쇠뇌처럼 쏘아졌다.
“저, 저건 무슨……!”
기세 좋게 달려오던 적병들이 쏟아지는 화염구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크헉……! 부, 불이야!”
“끄아아아악……!”
활활 타오르는 자.
그 모습을 보고 도망치는 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달려드는 자.
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엄청난 마법이다.’
프레데릭은 인정했다.
눈앞의 여인은 지금껏 만나본 마법사 중 독보적인 강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엄청난 마법사를 부하 부리듯 하는 사내, 도살자.
아니.
‘트롤 학살자.’
프레데릭은 하인리히에게 트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말로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괴물.
그런 트롤을 저자는 세 마리나 제압했다.
그 외 수많은 몬스터들이 그의 먹잇감이 되었다.
“끝난 것 같구나.”
바토리의 음성이 프레데릭의 상념을 깨웠다.
타오르는 시체의 파도.
그것을 역류하며 도주하는 적병들.
살아서 꿈틀대는 지옥불의 바다.
“저, 저것이…….”
“마법사의 힘……!”
다리에 힘이 풀린 브누아 병사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공포와 경외로 가득한 눈으로 바토리를 바라봤다.
* * *
그날 밤.
프레데릭을 비롯한 지휘관들과 아틸라 일행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이대로 툴루즈로 진격하자는 말씀이오?”
아틸라의 말에 프레데릭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휘관들도 앞다퉈 입을 열었다.
“위험한 생각입니다.”
“브누아 성의 존재 의의는 공격이 아닌 방어.”
“이곳의 병사들 또한 수성전에 익숙한 자들이오.”
“방어와 공격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아틸라가 말했다.
“모두 참전할 필요는 없습니다. 궁병대 한 부대만 빌려주시면 충분합니다.”
“그게 무슨…….”
“가스코뉴 공작의 허가는 받아 두었습니다.”
아틸라는 이곳으로 오기 전 작센을 만나 어떤 청을 했고.
아틸라에게 마음의 빚이 남아 있던 작센은 신중한 고려 끝에 그것을 승낙했다.
“읽어보십시오. 브누아 총사령관.”
가스코뉴의 인장이 찍힌 서신.
그것을 뜯어읽은 프레데릭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뜻을 따르겠소.”
* * *
“근데 말이오 아틸라 님.”
“왜.”
회의가 끝난 뒤, 아틸라는 프레데릭이 내준 방의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브누아 궁병대는 뭐 하러 빌린 거유?”
“뭐 하러 빌리긴. 필요하니 빌렸지.”
“아니 저 어마어마한 마법사 아가씨가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소? 아까도 보지 않았소! 그 많은 적병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을!”
“네가 보기엔 무슨 마법사가 기름 없이 달리는 스포츠카 같냐?”
“……그건 또 무슨 괴상한 소리요.”
바토리는 오늘 상당한 힘을 썼다.
왼팔 소매가 사라진 걸 보니 ‘그것’ 역시 사용한 모양이고.
‘진짜 아주 마음껏 힘을 뽐내셨구만.’
관조자 시절의 그녀라면 그다지 부담 가는 마력 소모는 아니었을 테지만.
지금의 바토리는 인간이다.
‘인간의 몸으로 반신의 힘을 빌려 쓰는 중이지.’
그것이 몸에 가져올 부담은 상당하다.
반복되었을 시 찾아올 후유증 역시 심각한 것이었고.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바토리는 훗날 인간의 몸으로 전락하고 마니까.
‘당분간은 자제시켜야겠군.’
“뭐요.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요. 설마 눈뜨고 자는 거요?”
“시발 진짜. 너 그냥 나가서 자라.”
“거참 뭘 물어보기만 하면 저러시네! 우린 함께 사선을 넘은 동료 아니었소? 정말 섭섭하우 아틸라 님!”
오토가 시무룩한 얼굴로 제 가슴을 두들겼다.
아틸라는 그 표정이 꼴 뵈기 싫었다.
“활잡이는 화살이 있어야 활을 쏠 수 있는 거다.”
“갑자기 당연한 소릴 하고 난리요. 어디 그거뿐이요? 활도 있어야지.”
“그래. 마법사의 주문이 활이라면, 관음쟁이는 지금 화살이 떨어진 상태다. 그럼 보충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오. 진즉 그렇게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실 것이지.”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이오. 지난번 ‘그놈’이라도 데려오는 건 어떻소?”
“걘 아직 안 돼.”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돌아누우며 아틸라가 말했다.
“걱정 마라. 더 무시무시한 놈이 오고 있으니까.”
* * *
며칠 뒤 오토는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으힉! 저 기생오라비처럼 재수 없는 낯짝은!”
새하얀 군마를 타고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며 적을 섬멸하는 사내.
금사자 용병단의 단장.
샤를 아인하르트!
“그, 금사자는 오동나무의 적 아니오! 저자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요!”
“왜긴. 우리가 데려왔으니까 있지, 영주 나리.”
“그, 그럼 지난번 따로 움직였던 게 저놈 꼬시러 간 거였수?”
“그렇단다. 철혈귀검아.”
“시, 시부럴.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거 같은데.”
오토는 불안한 눈으로 아틸라를 돌아봤다.
“뭘 봐.”
“아, 아무것도 아니우.”
무심한 아틸라의 표정에 오토는 안심했다.
‘하긴 저 괴물 같은 양반이 사자왕 따위에게 질 리가 없…….’
“오토.”
“으힉! 왜, 왜 그러슈!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수!”
“뭔 개소리야. 아무튼 넌 지난번처럼 바토리 수호를 맡아라.”
“제, 제가요?”
오토는 당황한 얼굴로 바토리를 돌아봤다.
그런 오토에게 바토리는 매력적인 미소를 선사했고.
“또 부탁을 해야겠구나. 철혈귀검아.”
“나, 나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수.”
“금사자와 합류한다.”
아틸라가 힘차게 말을 달렸다.
“지금부터 적의 측면을 타격한다!”
“우와아아아!”
그 뒤를 카스피가, 세 기사가, 전 오동나무 용병들이.
마지막으로 브누아의 궁병들이 쫓았다.
“우리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 그럼 가겠수.”
오토가 흐느적흐느적 말을 몰았다.
바토리가 물었다.
“지난번처럼 멋진 구호는 없는 게냐. 아름다운 공주를 지키는 백마 탄 기사 같은 우렁찬 외침 말이다.”
“내, 내, 내가 그랬수?”
“내 또렷이 기억이 나는구나. 흐응. 그때의 넌 제법 멋졌었는데 말이야.”
“나, 난 기억이 잘…….”
“뒤로 쳐졌으니 어서 가자꾸나. 철혈귀검의 가공할 살기라면 툴루즈 병사들도 함부로 접근하지는 못할 터.”
“…….”
“왜 아무 말이 없느냐.”
“……크흑! 내, 내가 잘못했수!”
도망치듯 오토가 말에 박차를 가했고, 그 뒤를 쫓으며 바토리가 소리 내 웃었다.
* *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쿵! 탁자를 내리치며 툴루즈 백작이 소리쳤다.
“3인의 마법사면 충분할 거라고, 파브리스, 당신이 분명 말하지 않았소!”
녹마탑의 탑주 파브리스는 백작의 노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침묵을 일관했다.
이 다혈질 사내와 대화하는 것은 참으로 인내심을 요구한다는 것을 다시금 머릿속에 새기며.
잠시 후 파브리스가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믿을 수 없는 일이오. 그들 3인은 녹마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였으니까.”
아울러 제롬 역시도.
“그런데 어찌 그리 허무하게 당한단 말이오.”
“상대 진영엔 마법사가 있었소.”
“그래 봐야 한 명 아니오! 이쪽은 셋이었고!”
툴루즈 백작이 재차 탁자를 내리쳤다.
“붉은 옷의 여자 마법사. 보고에 따르면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초심자처럼 보인다더군!”
그 말에 파브리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갓 스물을 넘긴 듯 보이는 붉은 옷의 여마법사.
그에겐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으니까.
‘설마. 그녀일 리 없지.’
“빼어난 자질을 가졌을 경우, 젊은 나이에 고위 마법사가 되는 건 종종 일어나는 일이오.”
“뭐요? 그렇다면 그 여자가 정체를 숨긴 어느 왕국의 고위 마법사라도 된다는 말이오?”
“게다가 가스코뉴 쪽엔 트롤 학살자와 철혈귀검이 있소. 얼마 전엔 아키텐의 사자왕, 샤를 아인하르트마저 합류했고 말이오.”
“내 그래서 녹마탑에 그런 거금을 갖다 바친 것이 아니오! 당신네들이 언제고 말하지 않았소! 전사들은 마법사의 고기방패에 불과하다고!”
그렇게까지 말하자 파브리스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하싸씬 암부의 의뢰 역시 당면한 과제였고, 더 이상 마법사를 잃을 순 없다.
“걱정은 해소시켜 드리겠소 백작. 내 그동안 준비해 온 일도 있는 터이니.”
“호오. 그렇다는 것은.”
무언갈 직감한 백작의 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금기를 범할 생각이시군.”
“놈들의 발악도 여기까지요.”
파브리스의 눈동자가 칼날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