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마법사의 힘 (5)
자신감 있게 검을 뻗은 오토.
그러나 상대의 도끼와 부딪친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 시부럴……! 막을 수 있다며……!’
괴력에 밀려난 검날이 오토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투트틋! 분사된 핏물이 한쪽 뺨을 적셨다.
“호오. 막아 낸 건가.”
파비앵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과연 오동나무의 철혈귀검.
‘나의 일격을 막아 낼 수 있는 전사는 결코 흔치 않다.’
그런데 이상했다.
피범벅이 된 어깨를 들썩이며 녀석이 웃고 있지 않은가.
“뭐가 우습지? 철혈귀검.”
“……네놈 모가지가 곧 달아날 테니까.”
“뭐라고?”
그 순간 파비앵은 하늘에서 내리치는 가공할 살기를 감각했다.
빠르게 물러섰지만 한발 늦었다.
‘크읏……!’
짐승과도 같은 본능으로 피도끼를 추켜올렸다.
콰앙! 두 자루 도끼가 부닥치며 불꽃이 튀었다.
‘이자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떨어진 거구의 사내.
그가 입을 열었다.
“끼어들지 마라. 오토.”
“아, 알겠수!”
두 도끼가 다시 충돌했다.
파비앵이 외쳤다.
“네놈이 도살자로구나!”
질풍처럼 피도끼가 휘둘러졌다.
아틸라는 그것을 막아 낸 뒤 자세가 흐트러진 상대를 향해 재차 용아귀를 뻗었다.
그러나 파비앵도 보통의 실력자는 아니었다.
“어림없다!”
파비앵이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으며 공격을 피했다.
아틸라는 감탄했다.
‘역시 피도끼의 파비앵이로군.’
영웅 등급에 속한 인물은 아니지만.
가스코뉴 공국의 세 검호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자.
‘일대일이라면 하인리히나 프레데릭보다도 앞설 테지.’
공국 북남(北南) 수비 총사령관인 하인리히와 프레데릭.
이들은 일대일보다 전략전술에 기반을 둔 다대다 전투에 능한 자들이다.
“아틸라 님! 뒤, 뒤!”
오토의 다급한 외침.
아틸라의 발달된 감각이 측후면에서 발하는 마력의 기운을 포착했다.
‘마법사!’
빠드드듯! 바닥을 뚫고 솟아오른 나무뿌리가 아틸라에게 뿌려졌다.
정면에선 피도끼가 날아왔다.
한순간에 양방의 위협에 노출된 아틸라.
‘그걸 써 볼 때인가.’
파비앵을 향해 포효했다.
그러나.
[ 대상이 포효에 저항했습니다. ]
‘음?’
[ 높은 패기(霸氣) 능력치를 지닌 등장인물일수록 스킬, 포효에 저항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
‘하긴. 패기 하난 배 밖으로 튀어나온 녀석이지.’
일인용병단이라 불리며 홀로 수십의 적을 때려 부수는 놈이니까.
‘포효가 먹히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틸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스킬이 백 퍼센트 통하지 않는 건 트롤과 제롬을 상대하며 이미 경험했다.
‘그렇다면.’
아틸라의 몸이 옆으로 틀어졌다.
파비앵의 눈이 번뜩였다.
‘됐다!’
도살자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제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자신 정도의 전사를 상대해 본 일을 없을 터.
‘게다가 이쪽엔 마법사가 있다.’
뿐만 아니라 마법사 보호에 특화된 최상급 방패병과 창병도 있다.
그런데.
“잠깐 여기 있어라. 파비앵.”
“뭐?”
부웅, 피도끼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도살자가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어디로 갑자기……! 설마 마법인가……?’
파비앵은 당황했다.
‘무슨 생각을. 상대는 전사다. 마법사가 아냐!’
* * *
‘마법사다!’
녹마탑의 마법사 크리스또프는 당황했다.
‘순간 이동 마법!’
사각으로 사라졌기에 파비앵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코앞으로 확대된 도살자의 신기를 크리스또프는 똑똑히 보았다.
‘아니다. 그것과는 달라.’
순간 이동 마법은 말 그대로 순간 이동.
시전자의 좌표가 한순간에 바뀐다.
그러나 도살자가 보인 움직임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빠르게 달려온 건가? 하지만 저런 게 가능할 리가……!’
길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도살자가 휘두른 도끼질 한 방에 방패병 셋의 몸뚱이가 하늘을 날았으니까.
“크허억……!”
“끄아아아아아!”
‘무슨 괴력이!’
그 모습을 보며 크리스또프는 다시 한번 경악했지만.
마법사답게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의 입에서 마법이 영창 됐다.
“뭘 또 주절거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정면을 가드하던 방패병의 소멸로 크리스또프는 맨몸이 노출된 상태.
“마법사를 지켜라!”
창병들이 창을 뻗었다.
아틸라는 기다렸다는 듯 도끼를 내리쳤고, 네 자루 창이 성냥개비처럼 부러졌다.
“찔러! 어서!”
한 박자 늦게 두 자루 창이 날아들었다.
하나는 맨손으로, 다른 하나는 겨드랑이로 잡아 꺾었다.
그렇게 여섯 명의 창병이 무기를 잃었다.
“막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마법사를 지켜야 한다!”
방패병들이 방패를 밀치며 들어왔다.
그 사이 창병들이 여벌 창을 집어 들었다.
아틸라는 그들을 무시하며 빙글 몸을 돌렸다.
“새끼. 잠깐 거기 있으라니까.”
파캉! 쇄도하는 피도끼를 용아귀가 막아 냈다.
두 도끼의 크기와 무게는 거의 같았지만 중요한 것이 달랐다.
‘피도끼에 버금가는 저 커다란 도끼를 한 손으로 휘두른다고?’
그것이 갖는 의미는 컸다.
나머지 한 손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아틸라의 주먹이 파비앵의 복부를 강타했다.
“크헉……!”
흡사 바윗덩이에라도 가격당한 충격.
그러나 파비앵은 다리를 후들대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제법이군.”
아틸라의 맹공이 시작됐다.
하체에 힘이 풀린 파비앵은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소나기처럼 공격이 쏟아졌다.
‘빌어먹을……! 내가…… 이 피도끼의 파비앵이……!’
비두킨트가 당한 게 납득되는 순간이었다.
파비앵은 자신의 추리를 전면 수정했다.
‘머릿수로 비두킨트를 쓰러뜨린 게 아니다.’
전투 방식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로 옆에 철혈귀검이 있는데도.
놈의 동료들이 속속들이 성벽을 오르고 있는데도 도살자는 이 많은 무리를 홀로 상대하고 있다.
확신에 가까운 가정이 파비앵의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비두킨트와 부하들은.’
도살자, 단 한 명에게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콰앙!
용아귀의 강타를 막아 낸 파비앵의 몸이 주르르 밀려났다.
입가의 피를 훔치며 파비앵이 말했다.
“……도살자. 네놈은 나와 같은 일인용병단이로군.”
“그런 거창한 이름 따위 관심 없다.”
“제의 하나 하지. 어떤가. 나와 함께 용병단을 꾸려 보는…….”
“거절.”
콰앙! 쾅! 콰아앙! 두 도끼가 불티를 날리며 몸을 섞었다.
파비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방패병과 창병들은 감히 끼어들 엄두도 못 내는 상황.
“크헉……! 컥……! 흐윽……!”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건만 파비앵은 녹초가 됐다.
강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왜냐.’
도살자는 몇 번이나 자신을 끝장낼 기회가 있었다.
크리스또프 역시 마음만 먹었다면 진즉 모가지가 날아갔을 터.
그런데.
‘왜 마무리를 짓지 않는 것인가!’
용기 있게 달려들던 방패병 하나가 아틸라의 발길질에 성벽 너머로 떨어졌다.
시큰둥한 목소리로 아틸라가 말했다.
“쯧. 왜 이렇게 안 와.”
파비앵의 추측대로, 아틸라는 일부러 파비앵과 크리스또프를 죽이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이 정도 놈들이라면 카스피와 펀치에겐 상당한 경험치가 된다.’
물론 기여도가 없는 탓에 그리 많은 경험치를 가져가진 못하겠지만.
‘아예 없는 것보단 낫지.’
그때 크리스또프가 영창을 끝냈다.
광채를 발하는 그의 손이 성벽 밖의 거대한 나무를 향했다.
“미천한 고기방패 주제에. 끝장을 내주마!”
크리스또프의 손길에 나무를 둘러싼 넝쿨들이 촉수처럼 뻗어 나왔다.
그것 중 몇 개는 성벽에 꽂혔고.
하나는 오토에게 날아왔으며.
“으히이익!”
나머지 대부분은 가까스로 몸을 굴려 피한 오토 뒤편의 아틸라에게 쏘아졌다.
파비앵의 눈이 빛났다.
‘지금이다!’
이유는 몰랐지만 도살자는 여유를 부렸고.
그 덕에 마법사는 새로운 마법 영창에 성공했다.
‘마지막 기회다.’
파비앵은 달렸다.
그의 눈에 비친 도살자는 비처럼 날아드는 촉수를 절단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피도끼를 뻗었다.
그 순간 아틸라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 환수, 펀치가 함께 싸우길 원합니다. ]
[ 동료, 카스피가 함께 싸우길 원합니다. ]
[ 파티를 맺으시겠습니까? Y/N ]
아틸라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늦었잖아.”
그의 어깨가 흐릿해졌다.
이어 화산이 폭발하듯 용아귀가 솟구쳤고, 파비앵의 양팔이 몸에서 분리됐다.
“어, 어어어?”
절단된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주인의 몸에 붙어 있을 때처럼 여전히 도끼를 움켜쥔 채였다.
“으어? 으어어……! 으어어어어!”
파비앵의 입에서 어린아이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양팔에 이어 머리통마저 잘려 나간 뒤엔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털썩, 파비앵의 시체가 무릎을 꿇었다.
“피도끼의 파비앵이……!”
크리스또프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파비앵이 저리도 순식간에 당할 줄이야.
“방패병들! 날 보호해라!”
크리스또프는 계속 촉수를 끌어내 아틸라를 공격했다.
“나, 나를 업어라! 빨리! 도살자와 거리를 벌려!”
마법에 집중하려면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것을 간파한 우두머리 병사가 서둘러 크리스또프를 업었다.
“후진!”
방패벽이 뒤로 물러났다.
도살자와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크리스또프의 얼굴은 침착으로 되돌아왔다.
‘가장 먼 곳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으로 타격한다.’
그것이 마법사의 싸움.
그런데.
[ 사거리를 확보했습니다. ]
“오. 알아서 사거리를.”
[ 목표물에게 스킬, 돌진을 시전할 수 있습니다. ]
쌔애애앵! 아틸라의 신형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크리스또프는 확실히 보았다.
역시 저건 순간 이동이 아니었다.
‘부, 분명 달려왔다! 그렇다면 저건 이동 속도를 극한으로 증가시키는 마법인 것인가!’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영창 시간이 없다니!’
대포알처럼 날아든 용아귀에 방패병들이 날아갔다.
크리스또프는 촉수를 조종해 아틸라의 뒤를 치려 했지만.
[ 포효(咆哮) ]
짐승처럼 포효하는 그의 괴성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으오어어어어……!’
의지를 잃은 촉수가 갈 곳을 잃고 늘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포효의 공포가 전염됩니다. ]
크리스또프를 수호하던 병사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이 미친 새끼들 왜 도망가고 지랄이야……!’
전염되지 않은 병사들은 차례로 용아귀에 절단됐다.
크리스또프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건…… 빙결 마법인가……!’
조금만 생각해도 그럴 리 없었지만 공포에 질린 크리스또프는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도살자가 히죽 웃으며 도끼를 세워들었다.
“마법사에겐 잘 통하는 편이로군.”
크리스또프의 목이 반듯하게 절단됐다.
* * *
한편 오토는.
“네, 네놈들 왜 아직도 거기 있냐!”
성벽 밑을 내려 보며 버럭버럭 소리치고 있었다.
“으아아아! 대장!”
“나, 나 좀 살려 주쇼!”
크리스또프의 죽음과 동시에 나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무를 오르던 오토의 부하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버렸다.
“빠, 빨리 올라와! 이놈들아!”
“이렇게 흔들리는데 어떻게 가란 말이오!”
“으아아아! 떨어진다!”
오토가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기다려라 우라질 놈들! 내가 간다!”
그런 오토를 세 기사가 붙잡았다.
“미친! 뭐 하는 거요!”
“뭐 하긴! 쟤들 구해야지!”
“대장마저 죽으려는 거요!”
“그럼 쟤들은 죽게 놔두라는 거냐!”
그때였다.
촤르르륵! 하는 금속음과 함께 기다란 사슬이 성벽 아래 드리워졌다.
“후우……. 늦진 않은 모양이네 영주 나리.”
“사, 살쾡이 암살자! 대체 왜 이리 따로따로 오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