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34화 (34/425)

034. 마법사의 힘 (4)

“영주 나리는 지금쯤 열심히 싸우고 있겠지?”

“벌써 뒈졌을지도 모르지.”

“와. 진짜 너무한다 아틸라. 동료애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거야?”

“괜히 저러는 게다 카스피. 왜인진 몰라도 꼭 저리 밉상으로 말하더구나. 속마음과는 다르게 말이야.”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주절거려? 관음쟁이.”

“서운하구나 야만전사야. 그간 그토록 애정 어린 시선으로 널 지켜봐 왔거늘.”

“애, 애정 어린 시선?”

카스피가 당황한 얼굴로 아틸라와 바토리를 번갈아 보았다.

무표정한 아틸라의 얼굴.

그에 반해 바토리는 만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두, 둘이 무슨 사이지? 설마 아틸라는 나보다 바토리를 먼저 알고 있던 건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바토리가 일행에 합류했을 때부터, 둘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말하고 행동했으니까.

“먼 길을 달려, 드디어 도착했구나.”

바토리의 목소리가 카스피의 생각을 깨웠다.

일행의 말이 멈춰 섰다.

저만치 언덕 위에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역시 나왔군.’

아틸라의 발달된 시력은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을 확실히 알아보았다.

자신감과 기대감이 반반씩 섞인 얼굴.

그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선 호승심 가득한 얼굴까지.

아틸라는 말을 달렸다.

바토리와 카스피도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아틸라가 말을 멈춰 세웠을 때, 기대와 자신에 찬 아름다운 얼굴은 눈앞에 있었다.

“오랜만이다 샤를.”

“도살자.”

샤를이 답했다.

그러고는 카스피와 바토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새로운 동료인가. 용병 일은 이제 그만둔 모양이군.”

“꼭 그런 건 아니고.”

“용무가 있다고?”

사바흐의 도움으로 아틸라는 샤를에게 전갈을 날렸다.

그리고 샤를은 이곳, 가스코뉴와 아키텐의 국경으로 왔다.

“그래. 용무가 있지.”

“승부를 원하는 거라면 좋겠는데.”

“샤, 샤를!”

피핀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샤를이 나지막이 웃었다.

“하지만 그런 용무는 아닐 테지. 도살자.”

“물론.”

“가스코뉴와 툴루즈의 마찰 때문인가.”

역시. 짐작하고 있었군.

“내가 전쟁에 참여하길 원하나?”

“그렇다고 한다면.”

샤를이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난 꽤 비싼데.”

그 말에 피핀은 흠칫 놀란 얼굴이 되었다.

샤를의 귀에 속삭였다.

‘설마 참전할 생각은 아니지? 가스코뉴를 돕는다면 아키텐 백작의 가호는 더 이상 받을 수 없어.’

아키텐과 가스코뉴는 오랜 숙적 관계.

그러지 않아도 샤를은 아키텐 백작의 봉신 제의를 거절해 미운 털이 박힌 상태였다.

즉, 아무리 샤를이 지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해도.

‘가스코뉴의 편에 서서 싸운다면 백작이 좋게 봐줄 리 없지.’

피핀을 돌아보며 샤를은 부드럽게 입가를 올렸다.

그 미소에 피핀은 안심했다.

그런데.

“좋다. 참전하지.”

“샤를!”

피핀의 외침을 제지하며 샤를이 말했다.

“단 조건이 있다.”

“조건?”

이어 말하는 샤를의 얼굴은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았다.

* * *

가스코뉴 공국의 세 검호 중 한 명.

툴루즈 백작령과 면한 북경 수비의 총사령관.

프레데릭 브누아 방백!

“쏴라! 툴루즈의 얼간이들에게 우리의 실력을 똑똑히 보여 줘라!”

화살비가 쏟아졌다.

방패벽을 들어 진군하던 툴루즈 병사들은 옴짝달싹 못한 채 발이 묶였다.

‘어이가 없군. 툴루즈 백작의 머리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결코 툴루즈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브누아 방백은 이곳의 총사령관으로 머무는 동안 단 한차례도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놈들이 다가옵니다!”

“방패벽 일부가 접근 중입니다!”

궁병들이 외쳤다.

조금은 독특해 보이는 방패벽이 성벽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쏴라!”

궁병대장의 외침에 화살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방패벽은 공격을 막아 내며 느릿느릿 거리를 좁혔다.

“다리를 조준사격해! 성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놈들의 방패는 유달리 컸다.

게다가 위에서 아래로 쏘는 화살은 상대의 다리를 맞추기 쉽지 않다.

이윽고 성벽 십여 미터 앞까지 다가온 방패벽이 움직임을 멈췄고.

쿵, 방패의 벽이 지면에 밀착됐다.

“사격 중지!”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묘한 대치 상황.

“대장. 저거 대체 뭐 하는 거요?”

“난들 알겠냐.”

“무슨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지 않소.”

“빌어먹을 똥이라도 누나 보지.”

“아이고 대장. 영주님이 되셨으면 이제 말투도 좀 근엄해져야 하는 거 아니요?”

“이런 우라질 것들. 네놈들이 언제 영주 대접은 해 줬고?”

“것도 그렇네.”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성벽 안을 울렸다.

오토, 세 기사, 그리고 부하들.

전 오동나무 용병단원들은 돌격대로 배정받아 옆문 안쪽에 대기 중이었다.

“슬슬 돌격 명령이 떨어질 것 같지 않소?”

“그러게. 브누아 방백께서 우리 ‘철혈귀검’ 공의 무력을 잔뜩 기대하는 눈치던데.’

“큭큭큭. 철혈귀검이라니. 우리 대장이 이리 출세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러게. 지난 전쟁에서 아틸라 님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던 분이 말이야.”

“이 썩을 놈의 것들이 진짜.”

“근데 대장. 아틸라 님은 대체 언제 오는 거요?”

“난들 아냐! 온다고 했으니 언제가 됐든 오긴 하겠지. 그런 걸로 장난칠 양반은 아니니까.”

“오오?”

“뭐, 뭐요? 이 친근함은.”

“함께 여행하더니만 좀 가까워지셨소?”

“잠깐. 조용히 해봐.”

오토의 눈빛이 변했다.

세 기사와 부하들의 눈빛도 변했다.

“무슨 일이요? 대장.”

“저거 들리냐?”

조그만 창으로 귀를 기울이던 오토의 눈이 부릅떠졌다.

“성문 열어!”

방백의 명령 없이 성문을 개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하들은 지체 없이 문을 열었다.

오토의 뒤를 따라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대장! 갑자기 왜 그러는 거요!”

“빌어먹을! 막아야 돼!”

갑작스레 튀어나온 돌격대의 모습에 브누아 방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쏴! 쏘라고!”

오토의 고함에 활잡이 부하들이 활을 당겼다.

때마침 방패벽이 미세하게 벌어졌고, 운 좋게 그 사이로 쏘아진 화살이 누군가의 옆구리에 꽂혔다.

아니, 꽂힌 줄 알았다.

채앵!

화살이 튕겨났다.

막아 낸 건 용아귀에 버금가는 거대한 도끼.

“호오. 눈치챈 건가.”

도끼의 주인을 알아본 브누아 방백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피도끼의 파비앵!”

* * *

피도끼의 파비앵.

툴루즈 백작령의 일인용병단(一人傭兵團)으로 이름을 날리는 거한으로.

그의 머리 가죽을 벗기려 한 비두킨트와 부하들을 단신으로 괴멸시킨 일화는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형님으로 모시고 싶소.’

그 일로 비두킨트는 파비앵과 의형제가 되었고.

세월이 흐르며 둘은 친형제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비두킨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때, 파비앵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두킨트가 죽었다고?’

비두킨트를 쓰러뜨린 인물은 이름도 생소한 오동나무 용병단의 돌격대장.

통칭, ‘도살자’.

‘재밌는 상대가 나타났군.’

도살자는 오동나무 용병단의 힘을 빌려 비두킨트를 쳤을 것이다.

그건 비두킨트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긴 것과 안 어울리게 녀석은 안전한 싸움을 좋아하니까.’

다만 머릿수가 부족했겠지.

파비앵은 비두킨트의 실력을 인정했다.

‘수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면, 쉽게 쓰러질 녀석이 아니다.’

물론 그 자신은 홀로 비두킨트와 부하들을 압살한 전적이 있었음에도.

‘나와 같은 전사가 또 있을 리 없지.’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그래서 지금도 소수의 병사만을 대동한 채 적병이 득실대는 성 위로 뛰어들려 하고 있지 않은가.

“멀었소? 마법사 양반.”

파비앵의 재촉과 동시에 마법사의 손이 지면을 짚었다.

길고도 긴 영창이 드디어 끝난 것.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대, 대장! 저거 뭐요!”

“뭐긴 뭐야! 마법이지!”

오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빌어먹을. 한발 늦었소! 아틸라 님!’

영지를 떠나기 전 아틸라는 툴루즈 군대에 마법사가 숨어 있을 거라 말했다.

목마의 무서움을 직접 경험한 오토는 참전 이후 누구보다 청각에 집중했고.

마침내 영창 비스름한 소리를 들었던 것.

‘마법사가 영창할 땐 무방비 상태가 된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움직일 수조차 없지.’

‘운 좋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의외로 간단히 뒈질지도.’

“무방비 상태는 맞지만 저런 거한이 버티고 있잖수!”

오토가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이노오오옴! 내가 바로 오동나무의 철혈귀검! 오토 님이시다!”

그 순간 갈라진 땅 위로 거대한 나무가 솟아올랐다.

* * *

“철혈귀검이라고?”

성벽 위로 치솟는 나무에 걸터앉은 파비앵은 저만치 아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그의 눈이 차랑하게 빛났다.

“오동나무 용병단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도살자 역시 이곳에 있을지 모른다.

“도살자로 보이는 자는 없는 듯 하오만.”

녹마탑 서열 6위의 마법사, 크리스또프.

“도살자는 파비앵 공에 버금가는 거한이라 들었소. 그런 자는 보이지 않는구려.”

“그렇다면 성 안에 있을 지도 모르겠군.”

파비앵이 입술을 핥으며 정면을 주시했다.

가까워지는 성벽 위로 당황한 적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게 뭐야……!”

“마법사! 마법사다!”

“쏴! 어서 쏘라고!”

쇄도하는 화살.

그러나 나무 위에서 재편성된 방패벽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막아 냈고.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피도끼가 쳐냈다.

“마법을 영창하는 동안 확실히 지켜 주길 바라오. 그 편이 보다 많은 적을 제압하는 데 효과적일 거요.”

“참고하지.”

부웅, 파비앵의 몸이 공중을 날았다.

성벽 위에 착지한 그의 양팔 근육이 사납게 꿈틀댔다.

“저, 저자는 설마……!”

거대한 도끼가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피, 피도끼의 파비앵!”

도끼가 지나는 자리마다 팔다리가, 머리가, 몸통이 튀어 올랐다.

성벽 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마법사! 마법사를 먼저 잡아!”

그러나 상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왔다.

척, 처척, 척! 툴루즈 백작군에서 고르고 고른 최상급 방패 전사들이 크리스또프를 보호했다.

다가오는 적은 그 안에 도사린 창병들이 맡았다.

“비, 빌어먹을……!”

성벽에 등을 기댄 일곱 명의 방패병.

그 사이로 창을 내뻗는 여섯 명의 창병.

그들의 앞에서 피의 향연을 벌이는 피도끼의 파비앵.

그리고 마지막 한 명, 크리스또프가 또 다른 마법의 영창을 마쳤다.

바닥을 뚫고 솟은 나무뿌리가 수십 개의 창날이 되어 부챗살처럼 뻗쳤다.

콰득! 콰득! 콰드드드득!

단 하나의 마법으로 반경 십여 미터 안 모든 적병이 꼬치가 되어 쓰러졌다.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마법사를 지키던 병사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고.

파비앵이 이죽거렸다.

“입만 산 주문쟁이는 아니었군.”

그때였다.

“으랴아아아아!”

마법사의 뒤편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새처럼 떠올랐다.

파비앵의 눈이 커졌다.

“철혈귀검?”

그림자의 정체는 오토였다.

나무를 타고 오른 그가 성벽 안으로 힘차게 난입하고 있었다.

“마법사 잡는 귀검! 그 이름도 유명한……!”

그 아래에는.

“대, 대장! 같이 진입해야지!”

“미친 거 아니요!”

세 기사와 나머지 부하들이 목이 터져라 오토를 부르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 본 오토가 기겁해 소리쳤다.

“힉! 너, 너희들 왜 그렇게 밑에 있냐!”

“대장이 너무 빠른 거요!”

“같이 올라가야지!”

오토는 아틸라와 파티 플레이를 하며 이전보다 강해졌다.

세 기사, 더구나 기사도 아닌 일반 병사들이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리 없었다.

어이없는 얼굴로 파비앵이 웃었다.

“도살자 이전에 너부터 죽여주지.”

“흐에에에엑!”

피도끼가 벼락처럼 쇄도했다.

성벽 위에 착지한 오토는 서둘러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막을 수 있을 만한 공세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이번엔 진짜 죽었다……!’

그 순간 낯익은 외침이 공기를 울리는가 싶더니.

‘어? 어어……?’

충만한 감각이 오토의 전신을 휘감았다.

오토는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뻗어 오토! 막을 수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

오토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씨부럴 왜 이제 온 거요오오오!”

파카아앙! 그의 검이 피도끼와 부닥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