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마법사의 힘 (2)
바토리 에르제베트.
오랜 세월 관조자로 지내 온 그녀는 길고 긴 삶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종종 인간의 삶을 살았다.
그런 그녀가 어느 왕국의 궁정 마법사로 활동하며 제작했던 것이 그리즐리를 제압할 때 쓰인 ‘이멸(理滅)의 화살’.
통칭 바토리의 화살이다.
‘유흥 삼아 세상에 풀어 놓은 화살 한 발이 돌고 돌아 멋쟁이 야만전사를 만나게 해 주다니.’
‘운명이란 참으로 재미지구나.’
아틸라와 카스피가 상대 중인 괴물들.
녹마탑 마법사들의 굳건한 믿음과 달리, 정령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심연의 사역마.
‘목마(木魔).’
그러나 전투 능력만은 제법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가씨는 이 철혈귀검 오토가 목숨을 걸고 지켜드리겠소!”
“……알았으니 그만 말해도 된다.”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오토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바토리로서는 그 과장된 동작이 아틸라와 카스피를 가리는 탓에 짜증이 치밀었고.
“그런데 철혈귀검아. 이쪽으론 적들이 오지 않는 것 같구나.”
“크하하하! 이제야 아셨소! 그게 다 이 오토가 놈들을 향해 가공할 살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오!”
시끄러운 시야 가리개를 전장의 한복판으로 밀어내려던 바토리는 말문이 막혔다.
‘대체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무어란 말이더냐!’
바토리는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너머로 전황을 살폈다.
‘녹마탑의 애송이들. 내버려 둔 사이 제법 성취를 이룬 모양이구나.’
그 얄팍한 성취 속에 무시무시한 대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비록 하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폐물일지언정, 상대는 마귀(魔鬼).’
바토리의 눈빛이 깊어졌다.
‘카스피와 둘이서 상대할 수 있겠느냐. 야만전사야.’
그러나 바토리의 염려가 무색하게.
아틸라와 카스피는 순식간에 목마 하나를 쓰러뜨렸다.
* * *
‘응? 벌써 하나가 죽었어?’
어두운 공간 속에서 감각을 집중하던 녹마탑 서열 8위 마법사 제롬은 자신이 부리던 목마 하나가 소멸한 것을 감지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얼마 전 마탑에 의뢰가 들어왔다.
내용인즉슨, 하싸씬을 탈주한 2급 살수 하나를 처리해 달라는 것.
‘하싸씬이 자신들의 살수를 폐기처분하는 일에 다른 조직의 손을 빌린다고?’
의아한 일이었다.
게다가 의뢰자는 무려 단주의 직속 살수부대, 암부.
‘함정인가.’
본래 마탑은 마법을 연구하는 곳.
녹마탑에서 이런 의뢰를 수행한다는 게 외부에 알려져선 곤란했다.
모두가 고민하는 가운데 제롬이 나섰다.
‘이번 의뢰는 제게 맡겨 주시지요.’
‘오오. 탑주의 제자께서 직접.’
암부의 도움으로 제롬은 별다른 곡절 없이 가스코뉴 공작령에 도착했고.
타깃의 위치를 특정한 암부는 연기처럼 자취를 감췄다.
‘기분 나쁜 자들이군.’
제롬은 자신의 특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숲을 골라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둥지와 함께 이동해 타깃을 습격했다.
부릴 수 있는 목마는 모두 열둘.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목마는 웬만한 상급기사 이상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강력한 방어력은 덤!
설령 수해의 몬스터 무리를 상대하더라도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도살자를 조심하라고? 어이가 없군. 그래 봐야 조금 강할 뿐인 전사가 아닌가.’
암부의 충고는 제롬에게 별달리 와닿지 않았다.
전사를 조심하는 마법사라니.
‘웃음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일이다.’
마법사에게 전사란, 자신의 마법 위력을 확인하는 고기방패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제롬은 목마의 죽음에 당황했다.
그리고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군. 녀석들 말대로인가.’
암부는 카스피의 실질 등급을 1급으로 보는 것이 좋을 거란 말을 했었다.
‘그렇다면 가능하지.’
하싸씬의 1급 살수.
대륙의 그 어느 전장에 내놓아도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실력자 중의 실력자.
게다가 살수의 주특기는 은신과 기습이 아니던가.
‘은신으로 시야에서 사라진 뒤 기습으로 처리한 거군.’
제롬이 알기로, 은신이 풀린 살수가 재은신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나머지 목마들이 놈을 찾아 사지를 뜯어내기 충분할 만큼의 시간이.
그런데.
‘또 죽었다고?’
목마 하나의 신호가 또 사라졌다.
궁금증이 일었다.
‘전황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이 술법의 최대 단점.’
목마를 부리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제 스승과 달리 제롬은 이 특별한 공간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타깃 특정은 확실히 해 두었으니.’
술자와 의식이 연결된 목마는 타깃이 쓰러질 때까지 결코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집중력만 유지하면 된다.’
그런데 또.
뒤이어 또다시 목마의 신호가 끊겼다.
제롬은 호기심을 넘어 강렬한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말도 안 되는……!’
타깃 제거를 최우선 목표로 각인시킨 목마들이.
타깃을 내버린 채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제롬은 정신을 집중해 목마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렇게 알아낸 것은.
‘고, 공포의 저주?’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전사 둘, 살수 하나, 마지막으로 아무런 능력도 없어 보이는 연약한 여자 하나.
그러나 아무리 다시 확인해 봐도 목마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제롬의 눈이 커졌다.
‘그, 그렇다면 저쪽에…….’
마법사가 있다!
* * *
“이상해! 정말 이상하다고!”
“뭐가.”
“왜 아틸라, 너와 함께 싸울 때면 몸에서 힘이 넘치는 거지?”
왜긴. 전사의 외침 때문이지.
“호, 혹시……!”
“혹시?”
“아, 아니야! 아니라고!”
카스피가 얼굴을 붉히며 부정했다.
그 모습을 무시하며 아틸라는 두 번째 목마를 향해 돌진했다.
[ 목표물이 돌진의 효과에 저항했습니다. ]
‘또?’
첫 번째 목마도 저항했다.
이번에도 저항했다는 것은.
‘마귀에겐 돌진 디버프가 먹히지 않는 건가.’
모습은 닮았지만, 눈앞의 적들은 엘프의 환수 ‘나무 정령’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
바토리가 알고 있는 것을 원작자인 아틸라가 모를 리 없다.
녹마탑의 마법사들.
그들은 엘프의 힘을 갈구하다 금기를 저질렀다.
‘젠장. 방어력이 상당하군.’
돌진 디버프 중 하나인 방어력 20퍼센트 감소.
그것의 유무가 크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해에서 리베르를 추격할 때도 통하지 않았었지.’
물론 그땐 리베르 정도 되는 마법사이기에 그러려니 했었다.
‘나중에 생각하자.’
아틸라는 용아귀를 휘둘렀다.
퍼걱! 목마의 몸통에 생겨난 흠집 안으로 카스피가 사슬낫을 휘감았다.
“아틸라!”
아틸라는 사슬낫을 손에 쥐었다.
저만치 보이는 또 다른 목마를 향해 힘차게 돌진했다.
“아하하하! 좋아좋아!”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아틸라의 돌진에 사슬낫에 매여 있던 목마의 허리가 절단됐다.
이로써 쓰러뜨린 마귀는 둘.
“아직 멀었냐! 카스피!”
“이제 다 됐어!”
퍼엉, 카스피의 연막술이 펼쳐졌다.
연막술은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할 때 상당히 유용하다.
‘이전보다 정교해졌군.’
펀치와 마찬가지로, 카스피 역시 아틸라와 함께하는 동안 레벨이 올랐다.
“어어 이상하다! 연막술이 전보다 찰지게 펼쳐지는 거 같은데!”
놀란 목소리로 아틸라를 돌아보던 카스피는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쟨 자꾸 왜 저러는 거야.’
향상된 연막술은 아틸라와 카스피가 한두 마리의 목마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펀치도 동분서주하며 둘을 도왔다.
그렇게 두 마리 목마가 추가로 쓰러졌다.
‘좋아. 이대로만 가자.’
사실 바토리의 힘을 빌렸으면 더욱 손쉽게 놈들을 쓰러뜨렸을 테지만.
아틸라는 자신과 펀치, 그리고 카스피의 성장에 초점을 맞췄다.
‘카스피를 샤를에게 보내려면 빨리 키워야 하니까.’
아쉬운 것은 모든 막타를 자신이 날리고 있다는 것.
전투 방식의 특성상, 카스피와 펀치는 저 육중한 체구의 마귀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하기 부적합했다.
‘뭐, 내가 강해져서 나쁠 것 없지.’
바토리를 동료로 받아들였기에, 아틸라는 더욱 빠르게 성장해야 했다.
‘혹여라도 뒤통수를 치면 위험할 테니.’
물론 리베르의 구슬이 있는 한 쉽게 딴마음을 먹진 못할 것이다.
게다가 아틸라의 성장은 바토리 역시 바라는 일이기도 했고.
‘그래. 성장해 주마. 네 목표의 끝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낼지도 모르니까.’
그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아앗! 내 연막술이!”
카스피의 연막술이 급격히 옅어지더니,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어떻게 된 거야.”
“나, 나도 몰라! 이게 갑자기 왜 이러지!”
‘빌어먹을. 혹시!’
아틸라는 몸 안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지난번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짐작대로라면 분명 근처에 있을 것이다.
‘저기다.’
아틸라의 눈이 하늘 위로 고정됐다.
그곳에 있었다.
‘단주의 눈!’
연막을 제거한 건 하싸씬의 단주였다.
‘미친. 아무리 넘사벽 강자라지만 원격으로 술법을 해제할 줄이야.’
물론 카스피의 연막술이 아직 완성에 접어들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하늘 위의 까마귀에게 무휼을 던질까 생각하던 아틸라는 그만두었다.
‘놈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다는 걸 알려 봐야 좋을 게 없지.’
적당히 방심하게 둬야 한다.
그래야 단주가 직접 출동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다.
그때였다.
아틸라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으르렁대듯 말했다.
“왜 온 거냐.”
“흐응. 알고 있었던 게냐.”
등 뒤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단주의 눈이로구나.”
아틸라는 고개를 돌렸다.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잠든 오토가 보였다.
카스피의 연막이 해제되자마자, 바토리는 마법으로 오토를 재운 뒤 이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아앗! 바토리! 언제 온 거야!”
카스피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바토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펀치는 꼬리를 말고 도망쳤고.
“도와주러 왔단다. 야만전사야.”
아틸라는 사나운 눈으로 바토리를 노려봤다.
“닥치고 구경이나 하랬지 관음쟁이.”
“말이 심하구나 야만전사야. 난 도와주러 온 게다.”
바토리의 독단적인 행동에 아틸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기선 확실히 선을 그어놓아야 한다.
“한 번만 더 명령 없이 움직이면 두 다리를 잘라 버리겠다.”
“…….”
“대답해.”
“……알겠다. 장난삼아 놀래 줄 생각으로 온 건데, 그만 네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구나.”
바토리가 풀 죽은 얼굴이 되었다.
“미안하구나. 야만전사야.”
아틸라는 나머지 목마들을 돌아봤다.
바토리는 자신이 위기에 빠졌다 생각해 도우러 왔고, 그건 사실이었다.
“……정말로 내가 돕지 않아도 되겠느냐.”
지금 바토리의 도움을 받을 순 없다.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단주에게 그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군.’
아틸라는 새로운 스킬을 꺼낼 때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
‘여기서 보일 생각은 없었지만.’
수해의 괴물 시나리오.
[ 임무 완료 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그 두 번째 임무를 완료하고 받았던 보상.
[ 트롤의 목(3/3) ]
[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
[ 새로운 스킬이 개방됩니다. ]
[ 포효(咆哮) ]
길게 찢어진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닥치고 똑똑히 보기나 해. 관음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