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31화 (31/425)

031. 마법사의 힘 (1)

아틸라의 몸이 멈칫했다.

“그녀?”

“그래. 나와 리베르를 반신으로 만들었던 힘이라면…….”

시발.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만.

“오르피나 말인가.”

바토리의 눈이 충격으로 휩싸였다.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왜. 어느 망국의 애송이 견습기사에 대한 이야기도 해볼까?”

바토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너…… 너는……. 대체…….”

리베르의 구슬을 위로 던졌다 받았다 하며 아틸라는 바토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알았으면 잠이나 처자라 관음쟁이. 술 마시는 거 방해하지 말고.”

날 선 면박에 바토리는 주섬주섬 자리에 누웠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 관음쟁이라는 말은 그리 어감이 좋지 않구나. 이제 틈새에 진입할 수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고.”

“맞고 잘래. 그냥 잘래.”

“흐응……. 불현듯 졸음이 쏟아지는구나.”

이후 바토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틸라는 그녀의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뭐, 전혀 가능성 없는 소린 아니지만.’

달은 서서히 제 위치를 바꿨다.

술병을 홀짝이던 아틸라는 문득 등 뒤를 울리는 고른 호흡을 느꼈다.

고개를 돌렸다.

패영전 세계관 최강의 관조자 중 하나였던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녀가 자신의 힘 대부분을 잃고 한낱 인간의 몸이 되어 먹고, 마시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녀가 조금도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잃었어도 웬만한 인간 마법사는 처바를 테니.’

리베르의 구슬이 바르르 진동했다.

* * *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가장 기뻐한 건 바토리였다.

“드디어 따뜻한 물로 목욕할 수 있겠구나.”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바토리와 카스피는 목욕을 하겠다며 사라졌고.

아틸라와 오토는 당연히 술과 식사가 먼저였다.

“쟤들 둘이 왜 친해 보이지?”

“같은 여자 아니오. 시커먼 사내들보단 통하는 게 많겠지.”

아틸라는 어이없는 웃음을 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에서 카스피와 바토리는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앙숙이었으니까.

‘이 미쳐 돌아가는 역사를 바로잡을 수나 있을까.’

그러려면 먼저, 카스피를 샤를의 동료로 편입시켜야 한다.

그동안 아틸라는 그것에 대해 고민했고, 나름의 해답을 찾아 놓았다.

‘일단은 더 강하게 키워야겠지.’

원작에선 사바흐가 그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해야 한다.

방법은 있다.

‘파티 시스템.’

파티를 맺어 사냥하면 경험치가 분배된다.

물론 막타를 때리거나, 공헌도가 큰 파티원이 보다 많은 경험치를 가져가는 건 당연한 일.

‘당분간 카스피를 신경 써 볼까. 흠. 펀치도 빨리 키우고 싶긴 한데.’

잠시 후 관음쟁이와 살쾡이 콤비가 한결 뽀얘진 얼굴로 식당에 들어섰다.

“흐응. 따뜻한 물의 감촉이 이렇게나 좋은 것이었는데, 그동안 잊고 살았구나.”

“아하하하 농담도! 그렇게 희고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안 씻는 척하고 그래.”

“네 피부도 아름답더구나. 카스피.”

“헤헤헤헤. 그래? 전보다 많이 상한 건데.”

함께 목욕을 하더니 둘은 어째 더욱 가까워진 모습이었다.

아틸라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앉아서 밥이나 먹어라.”

4인용 탁자에 마주 앉은 아틸라와 오토를 보며 두 여인은 어느 자리에 앉을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중 바토리가 먼저 아틸라 옆에 앉았다.

무언가 아쉬운 기분을 느끼며 카스피는 오토 옆에 앉았다.

“술 한 잔 하시겠수?”

“당연하지. 영주 나리.”

잔 두 개를 추가 주문한 오토가 술잔을 채웠다.

쭈욱, 술을 들이켠 카스피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캬아아아! 좋다!”

바토리는 아틸라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술잔에 손을 가져갔다.

곧 그녀도 두 손으로 잔을 들어 홀짝홀짝 입술을 적셨다.

“이런 것도 참 오랜만이로구나.”

바토리의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술기운 때문인지 오토의 얼굴은 점점 더 불콰하게 변했고.

“크하하하! 그래서 말이오! 내가 아틸라 님과 처음 만났을 때……!”

카스피가 탁자에 엎어져 잠들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 주위 손님들도 모두 사라져 버릴 때쯤.

자리에서 일어난 아틸라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눈앞은 짙은 안개로 부옇게 변해 있었다.

용아귀를 꺼내들었다.

“나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도살자.”

“하긴. 네놈이 제 손으로 카스피를 죽일 리 없지.”

아틸라는 도끼를 갈무리했다.

안개 속에서 사바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막을 펼친 건 단둘이 이야기할 게 있어서다.”

“말해.”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런 우라질.

애새끼 하나 덥석 맡겨 놓고 찾아와 하는 말이 뭐?

상황이 심각해져?

“계속해 봐.”

“단주가 손을 쓰려는 것 같다.”

왜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도살자. 너는 잘 모르겠지만, 하싸씬의 단주는 위험한 자다.”

나도 알아.

“한 마디로 너네 대장이 직접 온다는 거 아냐. 카스피를 제거하려고.”

“오해한 거 같군. 단주는 그리 쉽게 움직이는 자가 아니다. 상대가 카스피 같은 애송이라면 더더욱.”

아.

초특급 살수 카스피로 착각했다.

그래. 지금의 카스피는 애송이 맞지.

“그럼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건데.”

“암부가 의뢰를 넣었다.”

암부(暗部).

일곱 마스터와 달리, 오직 단주의 명령만을 받아 움직이는 단주 직속의 살수부대.

“살수가 광전사(狂戰士)에게 좋은 상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단주는 잘 알고 있다.”

“광전사라.”

아틸라는 그 호칭이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광폭의 권능이란 건.’

“단주는 인정한 거다. 네놈이 ‘용병왕 카르타고’의 뒤를 잇는 버서커(Berserker)라는 걸.”

이거 제대로 눈도장 찍혀 버렸군.

피식 입가를 올리며 아틸라가 물었다.

“의뢰처는?”

“툴루즈 백작령의 녹마탑(綠魔塔).”

“그거 잘 됐군.”

“뭐라고?”

사바흐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가. 전사는 마법사와 상성이 좋지 않다.”

“가스코뉴 공작성에서의 싸움을 잊었나.”

“그날 네가 마법사를 쓰러뜨린 건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를.”

강조하기는.

그래. 그렇게 말해야 네 체면도 좀 살겠지.

“그러나 녹마탑 마법사들 또한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제아무리 네놈이라도 그때와 같은 승리를 장담하는 것은…….”

“난 버서커라며.”

아틸라의 무심한 말에 사바흐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눈치껏 도와줄 테니 한시름 놓으라는 둥.

마법사 잡는 게 살수라는 걸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보여 주겠다는 둥.

그러나 단주의 눈이 있을 땐 별수 없이 빠져 있어야 한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아틸라는 전부 한 귀로 흘렸다.

그저 웃었다.

‘왜냐하면 그걸 대비해.’

바토리를 잡아 놓은 거니까.

* * *

“엥? 진짜요? 진짜 전쟁이 벌어졌단 말이우?”

“그렇다고 몇 번을 말하냐.”

“아틸라 님은 하룻밤 새 그걸 어찌 아셨소! 아, 혹시 라시드가 까마귀로 알려 준 거요?”

“아빠는 이제 은퇴했잖아. 하싸씬의 별책 같은 건 쓸 수 없다고.”

“응? 뭐? 아빠?”

무언갈 생각하던 오토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뭐, 뭐요! 라시드 딸이었수?”

“그걸 여태 몰랐냐.”

“아이고 아틸라 님! 아무도 말을 안 해 주는데 내가 어찌 알겠소!”

카스피의 얼굴을 요모조모 훑던 오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 산적 같은 작자에게 이런 딸이 태어나다니.”

“내가 좀 예쁘지?”

“흐응. 그 말이 실로 합당하구나 카스피.”

“아잉 뭐야. 바토리가 더 예쁘면서.”

“시발. 토할 거 같다. 닥치고 그냥 가자.”

아틸라가 말고삐를 당기며 앞서나갔다.

지난 새벽, 사바흐는 툴루즈 백작이 가스코뉴 공작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는 사실도 알렸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졌다면.

“흐엑! 꼼짝없이 참전해야 하잖수!”

오토는 작센과 봉신의 계약을 맺은 영주.

영주는 전쟁이 벌어졌을 시 종군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 이거 꼭 참전해야 하는 거요?”

“네가 더 잘 알면서 뭘 물어보냐. 애초에 그걸 대가로 봉토를 받은 거잖아.”

“빌어먹을. 영주는 괜히 해가지고.”

“배부른 소리하고 앉았네.”

오토가 결심한 듯 물었다.

“아틸라 님도 함께 갈 거요?”

“내가 왜.”

“전쟁을 막아야 된다 하지 않았소! 게다가 지난번엔 내가 아틸라 님을 따라갔으니 이번엔 아틸라 님이……!”

“내가 따라오라 그랬냐?”

“그건 아니지만……!”

“가긴 갈 거다. 전쟁도 막고, 다른 볼일도 있으니까.”

오토의 입이 헤벌쭉 찢어졌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소! 신의를 중시하는 야만전사! 불패의 오동나무 돌격대장 부활이요!”

“아서라. 참전은 하지만 따로 움직일 거니까.”

“뭐, 뭐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그런 정 없는 소릴……!”

“내가 있는 곳이 더 위험할 거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틸라 님이 있는 곳이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할 거요!”

아틸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와 카스피가 있는 곳은 녹마탑 마법사들의 타깃이 된다.’

녹마탑.

자연 속성 주문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의 아지트.

‘자연 마법의 원조는 엘프지만.’

몇몇 인간 마법사들은 엘프가 사용하는 ‘자연의 힘’에 큰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해 냈다.

‘오토 녀석은 알 리가 없지.’

제대로 훈련된 마법사.

그들에게 병사의 무리는 개미 떼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카스피와 따로 할 일이 있다. 일이 마무리되면 합류하지.”

“엥? 나랑? 단둘이?”

“정말이오? 부, 분명 말했소! 꼭 도우러 오기요!”

“야만전사야. 그럼 나는.”

“닥치고 따라와 관음쟁이.”

“전에도 말했지만 그 관음쟁이란 표현은…….”

“닥치라 했지.”

“……알겠다.”

바토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아틸라의 뒤를 따랐다.

노을에 물든 네 마리 말이 오토의 영지를 향해 달렸다.

* * *

이전에도 말했듯이.

패영전 세계관에서 마법사는 희소한 존재다.

마탑이라 하면 그 안에 수많은 마법사들이 득실댈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지.’

정식으로 마법사의 칭호를 받은 자는 극소수.

게다가 대부분 속세에 관심 없는 자들이기에 평범한 사람들은 일생 동안 마법사 한 명을 만나 보기 힘들다.

그래서 오토는.

“시, 시부럴 저게 뭐요!”

마법의 힘으로 날뛰는 시커먼 그림자들의 습격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마, 마법사라고?”

습격은 해 뜨기 직전 벌어졌다.

불침번 임무를 망각한 채 꾸벅꾸벅 졸던 오토는 아틸라의 거친 손길에 정신을 차렸고.

“흐엑! 이게 다 뭐야!”

거대한 나무 형상 그림자들이 접근하는 모습에 경악성을 내질렀다.

“불침번 똑바로 안 서냐. 너.”

“오, 오해 마쇼! 잠시 눈만 감고 있었소!”

“호오. 꿈은 꿨지만 잠은 자지 않았다, 뭐 이런 건가.”

“잠깐! 아주 잠깐 존 거요!”

“말이나 못 하면.”

“저, 저거 나무 아냐? 나무가 막 움직인다!”

카스피의 말대로였다.

십여 개에 달하는 육중한 나무들이 휘적휘적 달려오고 있었다.

“흐에에에엑!”

그 기괴한 모습에 오토와 카스피가 몸을 떨었고.

펀치도 털을 곤두세우며 으르렁댔다.

침착을 유지한 건 아틸라와 바토리뿐이었다.

“흐응. 저급한 마법을 보아하니 녹마탑의 반쪽짜리 애송이로구나.”

자신이 활약할 때가 왔다 여긴 바토리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야만전사야. 내 이제야 육포 값을 할 때가 온 것 같…….”

“닥치고 구경이나 해라 관음쟁이.”

벙찐 얼굴로 돌아보는 바토리에게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네 데뷔 무대는 이런 허접한 곳이 아니니까.”

“……뭐라?”

“오토!”

“왜, 왜 그러슈!”

“놈들이 바토리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해라.”

“마, 맡겨 두쇼!”

차앙! 화려한 동작으로 검을 뽑아든 오토가 바토리 앞에 등을 내보였다.

“아가씨는 이 오토가 지켜드리겠소! 부디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시오!”

아름다운 공주를 지키는 전설 속 기사라도 된 것처럼 오토가 제 의지를 드러냈고.

콧구멍을 벌렁대며 뒤돌아보는 오토의 눈길을 애써 회피하며 바토리가 답했다.

“……그래 고맙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