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지구로 돌아갈 방법
“아틸라 님. 거 며칠 좀 쉬다 움직여도 되는 거 아니었수?”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하루도 안 쉬고 바로 떠날 수가 있어. 진짜 피로가 한 개도 안 풀렸다고. 안 그래? 영주 나리.”
“아이고 내 말이 그 말이오! 변경백께서 친히 술과 고기를 대접하겠다고 며칠만 머물러 달라 간청하는데. 에잉, 인정머리 없기는.”
“내 길고 늘씬한 다리 퉁퉁 부은 것 좀 봐. 제때제때 안 풀어 주면 이게 다 살이 된다고!”
오토와 카스피의 투정에 아틸라가 말했다.
“말 타고 가는 주제에 다리가 붓기는 개뿔. 게다가 술과 고기라면 잔뜩 받아왔잖아.”
“아이고 아틸라 님. 육포가 어디 고기요! 이건 그냥 말라비틀어진 나무뿌리 씹는 거나 진배없소!”
“안 먹을 거면 이리 내.”
아틸라가 손을 뻗자 오토가 기겁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아, 안 먹겠단 말은 안 했수!”
“줏대 없는 새끼.”
아틸라는 쯔쯔 혀를 찼다.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머지 일행이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갈 생각인 게냐. 야만전사야.”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오토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매혹적인 음성.
“사, 사람 맞소?”
카스피도 눈을 동글게 뜨며 바토리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큼큼, 목을 가다듬은 뒤 그녀의 목소리를 작게 흉내 냈다.
‘어디로 갈 생각이야? 아틸라.’
“북쪽.”
“북쪽이라. 북쪽에 무어가 있다고 가려는 게냐.”
“말장난은 집어치워 관음쟁이. 크리엘도라 대륙에 네가 모르는 곳이 있기나 했던가?”
“……그런 말이 아니지 않느냐.”
풀 죽은 목소리로 답하는 바토리를 보며 아틸라는 자신이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물론 속으로만.
“거 귀한 집 아가씨인 거 같은데 너무 막말하시는 거 아니요? 아틸라 님.”
오토의 속삭임에 아틸라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귀한 집 아가씨? 야. 너 저 관음쟁이가 몇 살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
“딱 봐도 갓 스물을 넘겼을 거 같은데. 많이 봐야 스물셋? 참, 그러고 보니 아틸라 님 열여섯 아니오. 누님이라 불러야…….”
“뭐, 뭐뭐? 아틸라가 열여섯 살이라고?”
카스피가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어머나 세상에! 저 얼굴이!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야!”
아틸라의 인상이 구겨졌다.
겉늙어 보인다는 말.
현실 세계에서도 가장 듣기 싫던 말이다.
“이런 썅.”
“아이고 아틸라 님!”
끼아옹!
용아귀를 뽑아드는 아틸라를 오토와 펀치는 온몸을 날려 막아야 했다.
* * *
그날 밤.
아영 준비를 마친 아틸라 일행은 노릇노릇 익어 가는 노루를 보며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틸라에게 크게 당할 뻔한 카스피는 홀로 먼 곳에서 고양이처럼 눈치를 살폈고.
“하지만 아틸라 님. 전쟁 소식은 아직 들리는 게 없지 않수.”
오토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비두킨트가 말했던 대로, 툴루즈 백작령과 가스코뉴 공작령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스테판 변경백에게 소식이 들려왔어야 한다.’
그러나 지구와 달리 이곳엔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다.
하싸씬의 별책 같은 특별한 수단이 없는 한.
‘아무리 다급한 연락이라도 수 일, 길게는 한 달 이상 걸릴 수도 있지.’
“잔말 말고 따라오든가, 아니면 집에 가서 영주질이나 해라.”
“참나. 자꾸 그리 섭섭하게 말하기요? 좀 물어볼 수도 있지. 오늘따라 진짜 드럽게 예민하시네.”
오토는 진심 서운하다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보며 아틸라는 깨달았다.
자신의 기분이 이렇게 좋지 않은 이유를.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라 했느냐.’
‘미안하지만 나로서도 아는 것이 없구나. 야만전사야.’
‘빌어먹을.’
아틸라는 노루를 쥐어들었다.
뒷다리 한 짝을 뜯어내자 뽀얗게 익은 살결이 먹음직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에 오토, 카스피, 바토리마저 꿀꺽 군침을 삼켰고.
“먹어라.”
아틸라는 그것을 오토에게 던졌다.
“으앗! 뜨거! 엇! 흐악! 학!”
온갖 오두방정을 떨다 뒷다리 뼈를 잡는 데 성공한 오토는 아틸라에게 히죽 웃어 보인 뒤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내 지금껏 먹어본 고기 중 제일인 거 같소! 하하하!”
남은 뒷다리는 카스피에게 뜯어 줬다.
그제야 카스피도 배시시 웃으며 모닥불 앞에 마주 앉았다.
“펀치.”
끼아옹! 답하는 펀치에게 두 앞다리를 내어준 아틸라는 으적으적 몸통을 씹었다.
바토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만전사야. 내 건…….”
“육포나 처먹어.”
“…….”
관조자는 인간과 신의 중간쯤 되는 존재.
식사는 취미 생활 정도로 여길 만큼 그들은 음식 섭취 없이도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바토리는 이제 반신(半神)이 아니다.
“……조금만이라도 나누어 줄 수 없겠느냐. 인간이 된 후로 아무것도 먹질 못했구나.”
그녀가 다시 물었지만 아틸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가만히 펀치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펀치는 바토리를 두려워했다.
제 어미를 병들게 하고, 태아였던 자신의 생명마저 위험에 빠뜨렸던 저주의 기운을 느낀 것이겠지.
한편 카스피와 오토는.
‘내 거라도 좀 나눠 줄까? 영주 나리.’
‘주,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있는 게 나을 거요!’
이윽고 아틸라가 마뜩잖은 얼굴로 육포 한 조각을 내밀었다.
바토리는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다.
“고맙구나 야만전사야. 그런데 물은…….”
아틸라는 바닥에 있던 수통을 발로 툭 밀었고, 그것을 쥐어든 바토리는 앉은 자리에서 한 병을 비웠다.
그러자 반신이었을 때의 자신만만했던 얼굴이 절반쯤 되돌아왔다.
“흐응…….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나.”
볼에 홍조까지 띠며 바토리가 미소했다.
그 달아오른 목소리와 표정에 덩달아 얼굴이 빨개진 오토는 어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기 씹는 것에 집중했다.
* * *
깊은 새벽.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아틸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 불침번을 서겠다 말한 그는 동료들을 깨우지 않은 채 홀로 긴 밤을 보내는 중이었다.
머릿속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빌어먹을.’
다시금 마음속에서 욕설이 떠올랐다.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토리 정도의 관조자라면 지구로 돌아갈 자그만 단서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론은 역시나였다.
‘괜한 기대를 해 가지고.’
이 세계에 진입하기 전, 그러니까 지구에 살던 시절의 그는 매주 복권을 구입했다.
당첨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복권을 손에 쥐면 한 주 동안 내심 행복한 기대감에 젖어들곤 했다.
물론 당첨된 적은 없다.
‘이번에도 그런 거다. 난 가능성 희박한 복권을 샀고, 당첨되지 않았을 뿐.’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패영전 세계에 진입한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다.
‘만약 이곳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이 동일하게 흘러간다면.’
어머니의 병원비는.
고양이 녀석 밥은.
그리고 완결을 내지 못한 채 무기한 연중 상태에 접어들었을 ‘소설 패왕영웅전기’는.
‘가만.’
모처럼 깊은 사색에 잠겼기 때문일까.
아틸라는 지금껏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에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소설은 완결되지 않았다.’
444화.
소설 패영전의 최신 회차.
마침내 크리엘도라 남부 대륙을 통일한 패왕, 샤를 아인하르트가 북부 대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는 내용.
‘나는 크리엘도라 대륙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울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자신이 그때까지 이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이후엔 어떻게 되는 거지?’
예상치 못한 가정에 사고가 정지했다.
아틸라는 이내 생각을 털어 냈다.
해답 없는 고민에 빠져 있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대로라면 샤를은 요정섬을 찾을 터다. 거기서 방법을 찾으면 돼.’
물론 바토리조차 알지 못하는 일을 요정들이 안다는 확신은 없다.
하지만.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다.’
아틸라는.
아니 김도현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일이라면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릴 적 홀연히 집을 떠난 아버지.
이후 시름시름 병을 앓다 수 년째 입원을 지속 중인 어머니.
그 사이에서 홀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김도현은 그렇게 살아야만 했으니까.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로 포기할까 보냐.’
오랜만에 그 빌어먹을 꼬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인간 같지도 않은 표정으로 입을 찢어 웃던 건방진 얼굴.
패영전의 게임화 계약서를 보여 주던 놈의 또 다른 얼굴 역시도.
녀석의 정체는 뭐였을까.
아틸라는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호오. 나의 속박을 맨몸으로 풀어내다니, 이거 정말 믿어지지가 않네요. 설마 ‘그 힘’이 벌써 발현되기라도 한 건가요?’
그 힘이라면.
아마도 용력과 심안 같은 원작자 권능을 말하는 것이겠지.
‘광폭(狂暴)의 권능이라. 역시 ‘그분’의 말씀대로 당신은 재밌는 인간이에요. 김도현 씨.’
광폭의 권능이 무언지는 확실치 않다.
아직 발현하지 않은 원작자 권능 중 하나일 거라 짐작할 뿐.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궁금한 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꼬마의 정체와.
꼬마가 말한 ‘그분’의 정체.
‘확실한 건 꼬마도, 놈이 언급한 ‘그분’이란 존재도 패영전 등장인물은 아니다.’
등장인물이라면 원작자인 자신이 모를 리 없다.
이 몸의 주인인 아틸라나 오토의 경우처럼 이름 없는 엑스트라일 가능성은 배제했다.
자신을 이 세계로 보낼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이들이 그런 비중 없는 인물일 리는 없으니까.
그때였다.
[ 원작자의 깊은 상념이 잊힌 기억을 되살립니다. ]
그 순간 뇌리를 관통하는 새로운 기억.
꼬마의 알 수 없는 힘에 강타당해 낭떠러지로 추락하던 때.
메아리처럼 사방을 울리던 웃음 사이로 섞여 들렸던.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아무쪼록 그때까지.’
‘즐겜요. 김도현 씨.’
아틸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그랬다.
소년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는 건.
‘녀석도 등장인물이라는 말인가? 패영전 세계관 속의?’
“잠을 좀 자야 하지 않겠느냐.”
불현듯 들려온 바토리의 음성이 아틸라의 상념을 깨웠다.
바토리가 다시 말했다.
“아무리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한들 인간 아니더냐. 인간은 잠을 자야 한다.”
“육포도 먹고, 물도 마셔야겠지.”
생각을 방해받은 아틸라가 빈정대듯 말했다.
바토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궁금하지 않는 게냐.”
“뭐가.”
“나와 리베르가 널 계속해서 시험에 빠뜨린 이유 말이다.”
“안 궁금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다른 세계로 떠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더냐.”
“떠나고 싶다고?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는데.”
돌아가고 싶은 거야.
“그럼 어찌하여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을 궁금해하는 것이냐.”
아틸라는 묵묵히 술병을 들이켰다.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오늘은 밤새 술이나 홀짝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런데 바토리가 단서를 던졌다.
“혹시 ‘그녀’라면 알지도 모르지.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