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침공
압바스를 죽여 버린 일 때문에 아틸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빌어먹을. 역사를 바꾸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더 바뀌는 것 같네.’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단주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정말 끝장이다.
한편.
아틸라의 몸에서 뿜어지는 가공할 기운을 감각한 아르노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무슨 살기가……!’
그는 이런 종류의 살기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수해의…… 몬스터……!’
방벽의 병사들은 알고 있다.
수해에 서식하는 괴물들의 강력함을.
극한으로 단련된 병사들도 놈들이 내뿜는 살기에는 절로 오금이 저려 온다.
‘저것이 정녕 인간의 몸에서 발하는 살기란 말인가……!’
그것만으로도 저 사내의 강력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살육 현장을 묵과할 수는 없는 일.
이 마을은 스테판 가문의 직영지였으니까.
“무기를 버려라. 정당한 판결이 이뤄진 후 너희의 처우를 결정하겠다.”
“처우를 결정해? 네가 뭔데.”
아틸라의 빈정거림에 기사들이 외쳤다.
“무엄하다!”
“감히 아르노 경께!”
“이분은 방벽 수비 총사령관이신 하인리히 스테판 변경백의 후계자, 아르노 스테판 경이시다!”
……응? 아르노?
아틸라는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정말 아르노잖아.’
그리고 오토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큰일 나겠는데.’
상대는 귀족.
게다가 스테판 변경백의 아들이라니.
‘죽이기라도 했다간 사달이 난다.’
하필 아틸라는 더없이 크게 화가 난 상태.
‘이놈의 주둥이! 이놈의 주둥이 때문에! 내가 종자라고만 안 했어도!’
오토는 아틸라의 분노가 자신 때문이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데.’
자신이 남작이고 영주라는 신분만 증명할 수 있다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인장이 없지 않은가.
“빌어먹을. 인장만 있었어도.”
“인장?”
카스피가 물어 왔다.
“그렇소. 알진 모르겠지만 난 영주요.”
“알고 있어. 영주 나리.”
“안다고?”
“응.”
카스피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무언갈 꺼내 오토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필요할 일이 있을 거 같아 훔쳐 왔지.”
손안을 확인한 오토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어때. 이거면 날 동료로 끼워 줄 수 있겠어?”
영주의 인장이었다.
* * *
“지난 전쟁의 영웅이신 철혈귀검 오토 남작을 몰라보다니. 힘껏 꾸짖어 주십시오!”
오해를 푼 아르노와 아틸라 일행이 한자리에 모였다.
“허허허허. 꾸짖긴 이 친구. 이제라도 알아봤으니 된 것이 아닌가.”
“깊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오토 남작께선 이 먼 곳까지 무슨 일로…….”
“아아. 도살자라는 이명을 지닌 무패의 전사이자, 내 둘도 없는 친우인 아틸라…….”
오토는 흘깃 아틸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님과 세상을 둘러보는 중이네. 그러던 중 얼마 전엔 괴물 늑대 네 마리도 처치했고.”
아르노의 눈이 커졌다.
“괴, 괴물 늑대라 하셨습니까!”
“그렇네. 다섯 마리가 우릴 습격했지. 네 마리는 죽였지만 한 마리를 그만 놓치고 말았네.”
아르노의 입이 쩍 벌어졌다.
풀리지 않던 의문이 해결되는 순간.
그런데.
“다, 다이어울프 네 마리를 처치하셨단 말입니까! 대체 어느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오셨던 겁니까 오토 남작께서는!”
“병력? 나와 아틸라 님이 전부일세. 아, 저 새끼곰도.”
“난 왜 빼먹어. 영주 나리.”
카스피의 퉁명스러운 말에 오토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늑대 잡을 땐 없지 않았수.”
“있었어. 구경만 해서 그렇지.”
“뭐, 뭐요! 있었는데 도와주지도 않았단 말이오!”
“어차피 도살자가 전부 죽여 버렸잖아. 뭐, 한 마린 도망쳤지만.”
멍하니 대화를 듣던 아르노의 얼굴이 점점 더 경악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들의 이야기는……!’
도살자 한 명이 다이어울프 네 마리를 학살하고, 남은 한 마리마저 꽁지를 말고 도망치게 만들었다는 게 아닌가!
‘다이어울프를 한 마리도 아니고……, 네 마리를 홀로 쓰러뜨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믿지 않기엔 모든 정황이 너무나 완벽히 들어맞는다.
게다가 도살자의 무용담이라면 아르노 역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저자가 정말 혼자서 네 마리의 다이어울프를 쓰러뜨렸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께 모셔 가야 한다.
아르노는 얼마 전 아버지의 전갈을 받았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며, 2차 침공의 조짐이 보이고 있음.
바로 방벽으로 귀환하고 싶었지만 다이어울프 처리 임무가 우선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한 마리만 처리하면 돌아갈 수 있다.
“아아. 그렇지. 이걸 보면 우리 말을 믿을 수 있을 거네.”
오토가 무언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걸 보자마자 아르노는 헉! 신음을 내뱉었다.
‘다이어울프의 가죽!’
아르노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그는 결심했다.
“도살…… 아니, 아틸라 님.”
오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스코뉴 공작도 결코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변방의 강자, 하인리히 스테판 변경백.
그의 후계자가 귀족도 아닌 일개 용병에게 존칭을 쓰고 있었다.
자신을 응시하는 아틸라를 향해 아르노가 말했다.
“함께 방벽으로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 * *
“아르노 경께서 돌아오셨다!”
“피해 상황은?”
“확인하고 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기병대의 수를 헤아리던 망루 위 병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뭐가.”
“출발할 땐 20기였는데, 왜 23기가 돌아오는 거지?”
“뭐? 수가 줄어든 게 아니고 늘어나?”
옆의 병사도 눈가를 좁히며 기병대를 응시했다.
“하나. 둘. 셋. 넷…….”
정말이었다.
펄럭이는 스테판 가문의 깃발 아래 23기의 군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 * *
가스코뉴 공국의 세 검호 중 한 명.
공국에서 가장 위험 지역으로 꼽히는 수해 방벽 수비의 총사령관.
가스코뉴 공작 다음가는 위세를 지닌 권력가.
‘과연 포스 넘치네.’
그것이 하인리히 스테판 변경백의 첫인상이었다.
‘야만전사 느낌도 나고. 뭐, 내가 그렇게 만들긴 했지만.’
아르노는 변경백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하인리히는 선뜻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다섯 마리 분의 다이어울프 가죽이 바닥에 깔리자 즉시 눈빛을 바꿨다.
“이것은……!”
아틸라는 결국 우두머리 암컷을 찾아냈다.
그리고 단독으로 상대해 쓰러뜨렸다.
그 믿기 어려운 광경을, 아르노와 그의 병사들은 똑똑히 목격했다.
“……과연. 전쟁 영웅의 소문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군. 오히려 한없이 축소되지 않았는가.”
변경백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잘 와 주었네. 오토 영주. 야만전사 아틸라. 그리고 그의 동료 카스피.”
펀치가 자신도 있다며 끼아옹! 존재감을 알렸다.
변경백이 웃으며 정정했다.
“그래그래. 너도 있었구나.”
아르노가 물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두 차례 공습이 있었다.”
“이번에도 다이어울프입니까.”
“그래. 하지만 두 번째 공격엔 다른 놈들도 섞여 있었지.”
“다른 놈들이라면…….”
“고블린. 놀.”
아틸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블린과 놀.’
놈들을 여타 판타지 세계관의 잡몹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수해의 고블린과 놀은 그 생김새와 덩치, 전투력에서 타 세계관의 몬스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고블린과 놀이라……. 다이어울프보다 강력한 놈들이 추가된 것이군요.”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하인리히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트롤도 목격됐다.”
정적이 찾아왔다.
아르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트, 트롤이라 하셨습니까. 하지만 놈들은 지금껏 한 번도 방벽 근처로 다가온 일이 없지 않습니까.”
이번만은 아틸라도 크게 놀랐다.
트롤은 다이어울프, 고블린, 놀과 마찬가지로 수해 외곽부에 서식하는 몬스터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적수가 없는 최상위 포식자.’
다시 말해.
‘굳이 먹이를 찾으러 방벽에 접근할 이유가 없는 존재다.’
그런 몬스터가 움직였다면.
결국 외부의 힘이 작용했다는 거다.
‘리베르 이 새끼 진짜.’
방벽으로 가자는 아르노의 제안을 아틸라가 수락한 이유.
그건 무휼이 가리키는 곳 역시 방벽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새에 진입한 지금 이 시간에도.
‘무휼은 남쪽을 가리키고 있다.’
리베르가 수해 어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
‘하지만 외곽부가 한계일 테지. 심층부와 최심부는 제아무리 녀석이라도…….’
그때였다.
땡땡땡땡땡땡땡.
땡땡땡땡땡땡땡.
땡땡땡땡…….
빠르게 일곱 번 울리는 종소리가 날카롭게 반복됐다.
하인리히와 아르노의 안색이 변했다.
아틸라도 표정을 바꿨다.
[ 수해의 괴물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
‘놈들이 왔다.’
[ 두 번째 임무 ]
[ 방벽으로 달려드는 몬스터 무리를 막아 내고, 그들의 우두머리를 처치하십시오. ]
[ 트롤의 목(0/3) ]
‘뭐, 뭐야. 목 세 개라고?’
트롤은 보통 혼자서 움직인다.
혼자서도 웬만한 몬스터 무리를 압살할 수 있는 전투력을 지녔기 때문.
그런 트롤이 세 마리나 오고 있다니.
‘리베르 이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냐!’
아틸라는 다이어울프 가죽을 오토와 카스피에게 하나씩 넘겼다.
“이, 이건 갑자기 왜.”
“잔말 말고 죽기 싫으면 몸에 둘러. 웬만한 갑옷보다 튼튼한 거다.”
오토는 서둘러 가죽을 몸에 둘렀다.
카스피는 벌써 준비 완료.
아틸라는 하인리히와 아르노에게도 그것을 넘겼다.
이들은 지금 죽어선 안 된다.
“놈들의 공격을 막는 데 효과적일 겁니다."
두 사내도 가죽을 몸에 둘렀다.
그들은 그동안 몬스터를 격퇴한 일이 많았지만 가죽을 확보했던 적은 없었다.
‘몬스터는 동족의 시체를 내버려 두는 일이 없으니까.’
먹어치우거나, 못 쓸 정도로 갈가리 찢어 버리거나, 아니면 가지고 후퇴했다.
놈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몬스터 가죽을 갖게 된 인간은 이전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는 것을.
‘사실 가죽의 희소성을 높이기 위한 설정이었지만.’
아틸라 일행은 하인리히와 아르노를 쫓아 성벽 위를 달렸다.
검푸른 하늘엔 노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 아래로 보였다.
콰드득. 콰직. 쿠웅.
방벽을 기어오르는 고블린과 놀.
성문을 부수려 달려드는 다이어울프.
그리고.
수해의 그늘에 느긋이 자리 잡은 거대한 그림자.
‘트롤.’
아틸라의 눈이 세 개의 그림자를 향했다.
녀석들 뒤 어딘가 도사리고 있을 음흉한 마법사를 떠올렸다.
‘후우…….’
지금의 자신이 트롤 세 마리를 상대할 수 있을까.
게다가 놈들에게 접근하려면 고블린, 놀, 다이어울프의 군단을 통과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틸라는 웃었다.
그는 자신했다.
‘왜냐하면.’
난 패영전의 원작자니까.
‘그리고.’
[ 다이어울프의 가죽 (5/5) ]
[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
[ 새로운 전투 스킬이 개방됩니다. ]
이 상황에 걸맞은 새로운 스킬이 있었으니까.
“딱 기다리고 있어라. 트롤 새끼들.”
펄럭! 다이어울프의 가죽을 등에 두른 아틸라가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오토가 기겁하며 외쳤다.
“아, 아니! 거기서 뛰어내리면 어쩌자는 거요!”
“잔말 말고 뛰어! 영주 나리!”
오토의 멱살을 잡으며 카스피도 훌쩍 몸을 날렸다.
“나, 나는 왜!”
“아하하하하하!”
솟구치는 바람에 아틸라의 머리가 불꽃처럼 흩날렸다.
성벽을 오르던 고블린의 정수리에 콰앙! 용아귀가 꽂혔다.
아틸라의 입이 귀 끝까지 찢어졌다.
“까마귀 군주. 너 새끼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