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수해의 괴물 (2)
“나 원 참, 뭘 그리 왔다 갔다 하는 거요. 쫓느라 한참을 고생하지 않았소.”
그림자 속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오토는 그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너, 너는 공작성에서!”
비두킨트.
그가 부하들을 이끌고 아틸라의 뒤를 쫓아왔다.
‘이제야 납셨군.’
아틸라는 한참 전부터 그의 추격을 눈치채고 있었다.
“작센이 사주한 건 아닐 테고. 누구지? 죽은 롤랑인가?”
“의뢰인은 없소. 개인적인 흥미가 생겨서 말이지.”
“흥미?”
“도살자. 당신에게 말이오.”
“난 남자 싫어하는데.”
“재밌는 농담을 하시는군.”
말과 달리 비두킨트는 제법 불쾌했던 모양.
비두킨트가 검을 뽑자 부하들도 제각기 무기를 들었다.
“가스코뉴 공작령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쳤던 도살자의 목이라. 어떨 것 같소. 그걸 들고 툴루즈 백작가를 찾아간다면.”
“내 목이 그럴 가치가 있나.”
그렇게 말하던 아틸라는 이내 무언갈 깨달았다.
“전쟁이 벌어진다는 건가.”
“눈치가 빠르시군.”
애초에 비두킨트를 공작성에 부른 건 롤랑이 아니었다.
리베르였다.
‘관조자들은 전쟁을 원하는 건가.’
“남부 최대의 곡창지대를 소유한 가스코뉴 공작령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소. 아키텐 백작령과의 전쟁 후유증에 더해 전 가주의 죽음까지.”
비두킨트의 눈이 번들거렸다.
“툴루즈 백작께서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않소.”
‘머리 가죽 수집가’ 비두킨트가 툴루즈 백작령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었던 이유.
그의 뒷배가 다름 아닌 툴루즈 백작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역사가 또 바뀌고 있군.’
원작에서 가스코뉴 공작령과 툴루즈 백작령 간의 전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달라진 점이라면 비두킨트의 말대로.’
가스코뉴 공작의 죽음.
아울러 일공자인 롤랑의 죽음까지.
‘롤랑이 후계자가 되리라는 게 정설이었으니까.’
롤랑과 대조적으로 작센은 대외적으로 별달리 알려진 게 없었다.
형인 롤랑의 수완이 워낙 뛰어나다 평가받았기 때문.
그러나.
‘정말 뛰어난 건 작센 쪽이다.’
툴루즈 백작은 작센의 진가를 모르고 있다.
그러니 전 가주와 후계자까지 죽어 엉겁결에 군주가 된 작센의 영지가 한없이 먹음직스럽게만 보일 테지.
‘리베르의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손님을 앞에 두고 너무 쓸데없는 말만 지껄였군.”
큭큭 비소하던 비두킨트가 버럭 소리쳤다.
“공격해!”
비두킨트의 부하들이 돌진을 시작했다.
아틸라는 히죽 웃으며 용아귀를 추켜올렸다.
“개떼처럼 몰려왔군.”
힘껏 내리쳤다.
“프헉……!”
“끄아아아악!”
앞서 달리던 용병 둘의 상체가 반듯하게 쪼개졌다.
뒤이어 세 개의 잘린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오토도 자신에게 달려드는 용병들을 차례로 베어 넘기고 있었다.
“이놈들! 내가 바로 오동나무 용병단장 오토 님이시다!”
아틸라와 비교되어 약해 보일 뿐, 오토 역시 상당한 실력자였다.
“과연.”
비두킨트는 느긋하게 전투를 지켜봤다.
도살자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결국은 인간.
‘인간의 지구력엔 한계가 있다.’
부하들을 내보내 체력을 떨어뜨린 뒤 기진맥진한 상대를 제압한다.
비두킨트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었고, 그는 그런 식으로 자신보다 강한 상대의 머리 가죽을 수없이 벗겨 왔다.
‘생각보다 지구력이 뛰어나군.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비두킨트가 입맛을 다셨다.
녀석의 길고 풍성한 머리털을 보아하니 가죽을 벗기는 맛이 남다를 것 같다.
“프허억……!”
“그아아아아악!”
그러는 사이 부하들은 계속 죽어 갔다.
어차피 툴루즈 백작이 지원해 준 자들이 대부분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렇긴 한데.
‘뭐지?’
의아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체력이 소진될수록 움직임이 둔해져야 한다.
그런데 도살자는.
‘느려지지 않는다고?’
아니 오히려 더 빨라지는 것 같다.
‘저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오동나무 용병단장과 새끼곰 또한 크게 지친 모습이 아니었다.
이유는 있었다.
[ 스킬, 전사의 외침이 활성화됩니다. ]
[ 모든 파티원의 근력과 체력이 10% 상승합니다. ]
전투 시작 전, 아틸라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었다.
[ 동료들이 함께 싸우길 원합니다. ]
[ 파티를 맺으시겠습니까? Y/N ]
‘오. 이게 바로.’
수락하자마자 좌측 상단에 펀치와 오토의 창이 생성됐다.
심안만큼은 아니지만 레벨과 체력 등의 간략 정보가 적혀 있었고.
전사의 외침 버프가 둘의 썸네일 위에 떠오른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어어 이거 뭐지? 갑자기 몸에서 막 힘이 솟는 거 같소!”
오토는 전혀 이유를 모르겠는 모양.
‘역시 이건, 나 혼자만의 권능이다.’
아틸라는 만족한 얼굴로 용아귀를 휘둘렀다.
시체의 산이 켜켜이 쌓여 갔다.
적들이 주춤대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뭐야. 더 안 와?”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비두킨트가 공격하라 외쳤지만 부하들은 눈치만 살필 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틸라의 무력에 압도당한 것이다.
‘형편없는 놈들.’
툴루즈 백작에게 빌린 자들은 애초부터 자신의 부하가 아니다.
충성심 따윌 기대하긴 힘들다.
‘어쩔 수 없군.’
전의를 상실한 아군을 움직이게 하려면 지휘관이 직접 나설 수밖에.
‘실력을 보여 주마.’
보다 안전하게 사냥하고 싶었을 뿐, 비두킨트는 제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눈앞에서 부하들이 썰리는 모습을 봤지만 자신 역시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여겼다.
상대가 지친 기색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허풍이다. 그 정도로 움직였는데 체력이 온전할 리 없지.’
비두킨트가 몸을 날렸다.
그러자 부하들도 무기를 고쳐들고 가세했다.
“우와아아아아!”
쇄도하는 비두킨트의 대도를 아틸라는 용아귀를 들어 막았다.
샤를이나 사바흐보다는 아래지만 카스피보다는 윗줄의 실력.
‘제법이군.’
“우어어어어어!”
곰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비두킨트가 검을 쏘아붙였다.
아틸라는 반격하지 않고 잠시 방어에 전념했다.
‘죽여도 상관없으려나.’
패영전 역사를 가만히 되짚었다.
비두킨트를 제거했을 때, 역사의 흐름에 큰 변화가 생겨날 수 있는지에 대해.
“오오! 대장이 도살자를 밀어붙이고 있다!”
“역시 비두킨트 대장!”
“도살자의 머리 가죽을 벗겨 주십쇼!”
비두킨트의 부하 하나가 기습을 시도했지만 펀치의 앞발과 이빨에 쓰러졌다.
아틸라는 흐뭇한 눈으로 펀치를 바라봤다.
‘펀치 이 녀석.’
그 와중에도 비두킨트는 신들린 것처럼 대도를 휘둘렀다.
방어에만 몰두하는 아틸라를 향해 소리쳤다.
“으하하하하! 무패의 도살자라 불리더니 별것도 아니로구나! 이제부터 도살자의 칭호는 나 비두킨트가 가져가겠……!”
퍼걱! 비두킨트의 팔이 검과 함께 날아갔다.
“끄어어어어……!”
잘린 어깨를 잡고 꺽꺽대는 비두킨트의 복부를 아틸라는 냅다 걷어찼다.
토사물을 쏟아 내며 녀석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마침 적 하나의 목을 벤 오토가 번쩍 양팔을 들며 소리쳤다.
“여, 역시! 믿고 있었수!”
정적이 감돌았다.
비두킨트의 부하는 아직 스무 명 가까이 남아 있었지만 누구도 아틸라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대, 대장이…….”
비두킨트는 툴루즈 백작령의 용병 중 손꼽히는 강자.
그런 그가 순식간에 전투불능 상태가 되었다.
“크헉……. 크흑……. 컥……!”
구더기처럼 버르적대는 비두킨트를 아틸라는 무심히 내려 봤다.
아틸라는 비두킨트의 숨통을 끊지 않았다.
죽이지 않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 아니었다.
“펀치.”
의중을 알아챈 펀치가 방방 달려갔다.
그러고는 콰득! 비두킨트의 목젖을 잡아 뜯었다.
역시 펀치는 막타 치기를 좋아한다.
“퓨르르러럭……!”
바람 빠지는 신음을 흘리며 비두킨트는 제 명을 달리했다.
경험치가 올라갔다는 메시지에 이어 펀치가 레벨업을 했다.
‘좋아.’
아틸라는 펀치의 성장에도 신경을 쓰기로 했다.
이미 상당한 능력치를 지니고 있는 자신에 비해 펀치는 레벨업 속도가 빨랐다.
‘녀석을 키워 두면 반드시 도움이 된다.’
아틸라는 확신했다.
‘내가 상대했던 그리즐리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저렇게 작은 몸집에 이미 웬만한 기사 정도의 전투력을 보유한 펀치다.
성체가 되었을 때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바토리의 화살이 그리즐리의 신력을 억제했던 게 분명해.’
펀치를 키우고 싶은 이유는 또 있었다.
‘인벤토리.’
시험해 본 결과, 펀치의 인벤토리엔 고작 두 개의 아이템만 보관할 수 있었다.
‘레벨업을 할수록 칸이 늘어날지도 몰라.’
다행인 점은 화폐는 무한정 보관이 가능하다는 것.
‘무슨 움직이는 저금통도 아니고.’
자신에게 돌아와 헥헥대는 펀치의 머리를 아틸라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우두머리를 잃고 도주하던 용병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방향을 틀어 아틸라 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저, 저게 대체 뭐요!”
오토가 외쳤다.
집채처럼 커다랗고 시커먼 것이 용병들을 으적으적 씹어 삼키고 있었다.
크르르르르르……!
늑대와 닮았지만, 달랐다.
아틸라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다이어울프!’
[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
[ 수해의 괴물 ]
‘시나리오?’
[ 첫 번째 임무 ]
[ 수해를 탈출한 다이어울프 무리를 격퇴하십시오. ]
아틸라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메시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다이어울프는 무리생활을 하는 몬스터다.
결코 혼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여, 여기에도 있다!”
“이쪽에도!”
“사, 살려 줘!”
역시나 또 다른 다이어울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틸라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다섯 마리가 전부인가.’
이어진 메시지는 아틸라의 가정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 다이어울프의 가죽 (0/5) ]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다이어울프 무리는 열 마리를 넘기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 임무 완료 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준비해. 곧 이쪽으로 온다.”
아틸라의 말대로였다.
이성을 잃고 이리저리 도주하던 용병들은 순식간에 고깃덩이로 화했다.
오토가 바들바들 몸을 떨며 외쳤다.
“저,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요!”
오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세계에선 마법사뿐 아니라, 몬스터도 대단히 강력한 존재.
‘다이어울프는 그중 약체에 속하지만.’
그래서 ‘첫 번째 격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놈들이 수해 밖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설정해 뒀는데.
‘리베르.’
수시로 이동 방향을 바꾸던 녀석이 왜 남쪽으로 행로를 고정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수해에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놈의 새끼.’
하지만 일단은 눈앞의 위기를 극복하는 게 먼저.
지금의 자신이라면 쓰러뜨릴 수 있다.
두세 마리씩 차례로 덤빈다는 전제하에.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늑대는 협동하는 짐승.
늑대형 몬스터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선 어쩔 수 없이 오토와 펀치를 믿고 가야 한다.
“펀치.”
주인의 의지를 읽은 펀치가 맡겨 두라는 듯 포효했고.
“오토.”
“왜, 왜 그러슈!”
“한 마리 맡아.”
“흐에에에엑! 저런 괴물을 어떻게! 나, 난 못하겠수!”
“그럼 걍 뒈지던가.”
아틸라가 돌진했고, 펀치가 그 옆을 바짝 따라붙었다.
뒤늦은 후회를 내뱉으며 오토도 달렸다.
“시, 시벌 괜히 따라왔어!”